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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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를 잘 모른다. 고작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본 게 다다. 그렇지만 <노르웨이의 숲>에서 어떤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고, 이 책의 줄거리가 여성들에게 안기는...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 때문에 하루키와, 그의 작품을 지레짐작했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국내 독자들이 많다길래 호기심에 읽게 됐다. 말 그대로 소설가가 생각하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다뤘다. 당연히 하루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나온다. 뭐 어떻게 처음 소설을 쓰게 됐고, 소설 쓰는 루틴은 어떻고, 퇴고는 어떤 과정으로 하며,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형상화하는 과정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하루키에 대한 일본이나 세계의 평판도 엿볼 수 있다. 달리기 마니아, 성실한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니 그 건강함과 성실성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약간 삐딱한 마음으로 읽었는데, 솔직하면서도 굳건하게 털어놓는 소설이야기에 마음이 풀릴 수 밖에 없었다.

또 이번에 하루키 나이도 처음 알게 됐는데 나에게는 거의 할아버지... (왠지 죄송하다..근데 사실) 내 기억에 하루키 신작은 계속해서 나왔고, 최근에는 따끈따끈한 소설집까지 내셨던데 이토록 노장투혼이셨을줄이야.. 이 점에 왠지 또 마음이 약해지고. 등단 이후부터 자신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정말 꾸준히 소설을 써온 점, (본인 말마따나) 어느 정도 자기 갱신을 했다는 점이 멋있는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이 에세이를 읽고 하루키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내려놓기로 했다.

책을 읽고 호기심에 빨간책방 하루키 편도 찾아들었다.. 한창 빨간책방 들었을 때 하루키도 다뤘던 것이 생각나서 찾아본건데 벌써 7년전이다. 그 당시 핫했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편이다. 이동진과 김중혁이 열렬히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하루키의 소설을 꼭 읽어보고 싶어진다. 최소한 <해변의 카프카>나 <태엽 감는 새> 둘 중 하나는 꼭 읽어보기로...

하루키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소설 쓰시길 바란다. 나는 계속해서 소설의 힘을 믿는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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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 P110

즉 중요한 것은 뜯어고친다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작가가 ‘이곳을 좀 더 잘 고쳐보자‘라고 결심하고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손질한다, 라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어떻게 수정하느냐‘라는 방향성 따위는 오히려 이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 작가의 본능이나 직감은 논리성이 아니라 결심에 의해 좀 더 유효하게 이끌려 나옵니다. 숲을 몽둥이로 두드려 안에 숨은 새를 날아오르게 하는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떤 몽둥이로 두드리든, 어떤 식으로 두드리든, 그 결과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아무튼 새을 날아오르게 하면 그걸로 좋은 것입니다. 새들의 움직임의 역동성이 고정되어가던 시야를 뒤흔듭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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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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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읽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충격을 잊을 수 없어서 내친김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읽었다. (과작하는 작가라 두 권만 읽어도 테드 창 전작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역시나 숨가쁘게 우다다 다음 내용을 눈으로 뒤쫓게 됐다. 간혹 이해가 안되는 물리학 법칙이 나와도 적당히 흐린 눈 하며 읽을 수 있다. 그냥 재밌으니까.

각 단편들이 품고 있는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 떠오르기도... 일흔 두글자의 명명법으로 움직이는 자동인형(골렘)이라던지 천사의 강림으로 인한 재앙과 은총이 일상화된 세계라던지...이세계((異世界) 안에서 사회의 불평등은, 신에 대한 믿음은 어떤 식으로 구현될까? <- 요런 식의 철학적인 질문을 테드 창은 던진다. 

그런데 소설이 던지는 철학적인 물음..이런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그의 상상력은 위로가 되고 너무 아름답다. <네 인생의 이야기> 는 지구에 방문한(?)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 루이즈의 시점으로 쓰여진 이야기다. 대개 말을 음성화 한 지구의 언어와 달리 헵타포드의 언어는 문장 자체의 형상이 의미를 한번에 보여주는 의미 표시 문자다. 따라서 헵타포드들은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에서 최종 목적지를 알고 수면에서 굴절하는 빛처럼, 결과를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하는 최종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는 채로 문자 언어를 구사한다. 결말을 알면서 인생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이즈는 이러한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며 그들의 사고 방식을 어느 정도 체화하게 되고, 자신 인생의 이야기까지 이해하게 된다. 다 읽고 나면 뜬금없다고 여겨지던 소설 첫 머리의 시점과 문체가 이해된다. 이제는 독자도 헵타포드 식의 언어를 알고 있는 상태니까. 여하튼 너무너무 아름다운 상상력이다.

언어적이지만 비음운적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개념은 언제나 나를 매료했다. 내게는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청각장애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미국식 수화를 쓰며 자랐고, 내게 영어 대신 수화로 생각하는 일이 자주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수화로 코드화된 사고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마음속 목소리 대신 마음속 손 한 쌍으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하곤 했다. - P203

인류와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맨 처음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 양측은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 비해, 헵타포드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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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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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흐름 시리즈가 줄곧 궁금했어서, 작년 12월 말 무렵에 도서관에서 세 권을 빌려왔었다. 작고, 가볍고, 폰트도 에세이스러워서 (?) 후루룩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민음사 TV에서 에세이 제작과정을 보고 나니,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 디자인과 판형이 새삼 눈에 뜨인다.

 

그런데 생각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후루룩 읽으려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 특히 <시와 산책>은 작가가 건져올린 시 구절, 일상의 풍경들을 곱씹어 읽게 되고, 그러다보니 읽는 속도가 자연스레 느려진다. (솔직히 말하면 다 소화시키진 못했다. 12월 말 무렵부터 읽었는데 이때 책읽기싫어병에 걸렸어서..겨우 꾸역꾸역. 읽어야 산다는 마음으로.) 그래도 책에서 느껴지는 예민한 맑음, 낯선 외국 시들이 좋았다. 시를 많이 읽어야겠다고 또 한번 결심.

 

친구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의 텍스트 해석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탄한 적이 있다. 막 전혀 다른 텍스트 사이를 종주하고 횡단하는 능력.. 단순히 A라는 작품을 보니 B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이 수준을 넘어서서 그 둘 사이를 엮고 연결해서 이리쿵 저러쿵 하는... 뛰어난 에세이 저자는은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말들의 흐름 시리즈 저자들이 그렇고. (열 권중에 세 권 읽었지만) 그런데 한편으로 아직 나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이런 에세이 위주의 독서는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내가 한 게 아닌 남이 한 독서를 떠먹어 받아먹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요즘 이런 에세이류가 인기를 끄는 것도 사람들이 간편한 독서를 원하기 때문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에세이도 그 목적과 종류가 천차만별이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을 터..

 

하여튼 한정원의 이 책도 좋고, 난 금정연을 원래 좋아했었고, 사실 시리즈 첫번째인 정은의 <커피와 담배>가 젤 좋았다.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이 책이 좋았으니까 이 둘을 하나라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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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2003년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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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독서모임을 하게 됐다. (거의 소원 성취..) 한 달에 한 번씩 한 작가의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임의 이번 테마가 김연수가 됐기 때문이다. 주최하시는 분이 내게 리스트를 꾸릴 선택권을 주셔서 고심하다 첫 책으로 이 책을 꼽았다. 원래 모임 하루 이틀 전에 허겁지겁 책을 읽지만, 이번 책은 조금 일찍 펼쳤다. 다시 읽을수록 작가 모임의 첫 책으로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ㅋㅋ)

 

그의 박학다식함이 적당히 묻어있으면서 (지나치면 떨어져나가기 십상이니까) 독자들은 모를지언정 상황에 알맞는 우리말 표현을 쓰겠다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이고 그러면서도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그냥 이야기 자체가 맛깔난다. 또 <뉴욕제과점>은 작가가 자전소설이라고 밝혔으니 왠지 작가 입문작으로도 걸맞아 보인다.

 

내 김연수 독서는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이뤄져왔다. 중고등학교때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의 대부분의 책을 읽었고, 그러다가 그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면서 그의 온갖 TMI를 알게 된 나머지 마치 그를 잘 아는 것만 같은 단계에 도달했다. 물론 나는 김연수의 1%도 알지 못할텐데, 그 사실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내 삼촌쯤은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여전히 든다.

 

그래서 그의 조카쯤 되는 것만 같은 심정으로, 삼촌의 어린 시절 앨범을 들추어 보듯 이 책을 읽었다. (폰삼촌,,) 아무리 옛날 사진이래두 지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듯, 이 책도 내게 그랬다. 김연수가 이때부터 단편을 이렇게 써 왔군.. 회고록의 형식으로, 지나간 과거와 그 과거가 내게 남긴 흔적을 들추어 보면서, 기억을 차근히 재구성해나가는 거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된다. 하나라고 믿었던 길이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 하나는 눈에 보이는 길이고, 나머지는 보이진 않지만 줄곧 존재했던, 회고를 통해 의미를 찾고 드러난 길이다. 예컨대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태식은 게이코가 떠나간 뒤, 김 서린 유리창 위에 남겨진 손바닥의 손금에서 희끄무레한 길을 본다. <첫사랑>에서는 유년 시절의 나비가,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에서는 애기똥풀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천착의 과정이 다른 장편이나 유령 작가보다는 어렵지..않다고 해야 할까? 이 소설에서 김연수는 그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끌어와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기보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재료로 삼는다. (이것도 김연수의 기억이 아닌 허구적 기억이지만...) 그 장벽이 낮다.

 

또 너무나 김연수식 인물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에서 80년 5월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신문을 스크랩하는 '나'의 아버지처럼. 무의미하게 글자를 탐독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 (이러한 인물들은 그의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변주된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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