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근대사 - 실패를 넘어 자주적 독립 국가를 꿈꾼 민중의 역사
김이경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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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관계에서 평화란 대등한 힘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p40 <1부. 한국 근대사의 시작>


고등학생 때였던거 같다. 국사선생님이 한국의 근현대사는 국사에서 제일 민감한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근현대사와 연관된 사람들이 생존해 있거나 그 직계 후손들이 언제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아서라고 했다. 그래서 70만전 인류의 탄생 부터 조선후기까지는 열심히 배웠는데, 그 후의 내용은 중요사건 연도만 몇개 외우고 지나간거 같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근대사>는 학창시절 이렇게 배우고 지나간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었다.


미국은 1830년경 부터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에 대한 면수출을 늘리고자 했으며, 태평양 항로의 거점기지로 미국은 일본과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에 제너럴셔먼호를 보내기도 하고, 오페르트 도굴사건(남연군묘 도굴사건)을 꾸미기도 한다.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그 후 다른 서방국가들이 조선의 강과 바다를 측량한다는 이유로 군함을 끌고 와 조선인들과 무력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나 서방국은 조선에 거듭 패하거나 피해가 막심한 작은 승리를 거둘 뿐이다. 서방의 신식무기에도 굴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농기구를 들고와 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라면 총과 대포가 무서워 꼭꼭 숨어있을거 같은데 말이다. 의병의 조짐이 여기서도 보인다.


계속된 패배에 서방국가들은 일본에게 조선을 설득해 개항을 하게끔 뒤에서 시킨다. 군함을 원조해 주고 자금을 대주면서. 이 시기 청나라와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청의 지배하에 있던 오키나와가 일본 손에 들어간다. 청은 자존심에 금이 갔고 일본과 휴전을 맺고 싶어한다. 조선은 친청파와 친일파로 나뉜다. 그리고 알다시피 조선은 우왕좌왕 내부싸움을 하느라 군대를 더 키우지 않는다. 위선의 여러 실책들로 1910년 8월 29일 경술치국의 날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에게 지배를 당한다.


책 말머리에 작가는 한때 <열심히 싸워봤자 결국은 패배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나 역시, 민초들이 목숨걸고 싸워봤자 고위관료들이 친일, 친러, 친청에 붙어 정치질을 하느라 나라를 빼앗겼다고,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열심히 싸워서 결국 나라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물론, (자력독립을 준비하던 중 일어난 미국의 히로시마 핵공격으로 인해) 어쩡쩡하게 독립이 되었고, 해방 후 나라가 둘로 쪼개져서 아직도 찜찜한 감은 있다.

동학의 말단인 접주에 지나지 않았던 전봉준이 농민군의 총지휘관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_중략_그가 벌인 전쟁은 종교전쟁이 아니라 농민전쟁이었다.p101~102 <3부. 농민군과 갑오개혁, 근대화의 빛이 되다>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힘겨루기를 하느라 외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을 때, 관리들이 민초들을 수탈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때도 조선의 뜻있는 양반들과 민중들은 외세에 맞서 의병이 되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나라 안팍에서 싸워나갔다. 상황에 맞게 무력으로, 글로 싸웠다. 이도 안되는 이들은 적은 돈이나마 의금/성금(나무를 판 돈, 12살 아이가 번 돈 등)으로 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을사오적이니, 민족반역자니, 친일파니, 앞잡이니 분통터지는 많은 매국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많은 의인이 있었다. 역사를 배워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 앞으로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안정적인 나라가 되길 바란다.


(초록비책공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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