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윤슬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만일 내가 인기 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온 세상이 부끄러워 밖에도 못 나갈 테니 딱한 일이지만, 그렇게 될 리도 만무하니 또한 딱하다.

p205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중에서



영원한 현역이 되고 싶다는 박완서 작가의 말을, 그 분의 딸 호원숙 수필가의 글을 통해 다시 곱씹게 되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1970년 부터 2010년까지 박완서 작가가 쓴 660편의 에세이 중에서 일부를 골라 출간한 에세이집이다. 40년 동안 써내려온 에세이이다 보니 마흔의 박완서와 예순이 훌쩍 넘은 박완서를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이 책은 6개의 큰 주제와 그 안의 35개의 작은 주제 속에 짤막한 에세이를 담아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년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라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p40 사십 대의 비 오는 날_소도구로 쓰인 결혼사진 중에서


나와 박완서 작가는, 나와 우리 할머니만큼 세월의 공백이 있다. 그래도 세월의 공통분모라고 할수 있는, 지금은 잊혀진 버스 차장(어릴 적 뉴스에서 봤다), 백화점 셔틀 버스, 공중전화 카드 등이 에세이를 통해 다시금 나와 할머니, 나와 박완서 작가를 과거로 이끌어준다. 지금의 아이들은 모르는 나와 엄마와 할머니의 추억을 말이다.


또한 에세이는 박완서 자신이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 가족에 대한 사랑,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남편과 20대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간 아들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에 대해서 쓰고 있다. 

세월이 차곡차곡 쌓이면 슬픔도 차곡차곡 쌓인다고 하는데, 일흔이 넘는 동안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낸 슬픔을 어찌 잊으랴 싶다. 특히 자식을 앞세운 슬픔은, 에세이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된다.


그리고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땅, 어린 시절에 살던 개성의 작은 동네에 대한 향수를 할아버지와, 뒷마당, 할머니의 베보자기를 통해 그리고 있다.


작가는 어린시절 개성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숙부들과 함께 살았단다.작가가 태어나던 날, 딸이라는 걸 알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밤새 옥편을 붙잡고 딸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짓느라 밤을 샌다. 간난이, 섭섭이 같은 이름이 아니라 제대로된 이름을 지어주려고 두 남자가 고심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아주 오래 전 박완서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했을때, 남성작가인가 생각했다. 1930년대 흔히 듣던 여자이름이 아니라, 힘 있고 당찬 느낌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내 주위의 할머니 이름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가진 편견이었다. 


장남인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갑작스레 죽자 어머니는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며 서울로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 딸 박완서가 학교갈 나이가 되자, 딸도 서울로 데리고 간다. 종손이 모질다며 집안 어른들로부터 욕을 먹으면서, 서울에서 삯바느질로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애 둘을 키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어머니로부터 <넉넉한> 사랑을 배웠다며 그 시절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물질 보다는 사랑이 넉넉했던 시절, 어머니 안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가 보다. 나이가 들면 내가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해주어야 할 자식, 손주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쓰면서도 작가는 간혹 울컥울컥한 이야기를 담담히 쓴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작가가 남편에게 65세가 되어도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무임승차를 하지 말자고 한다. 구두쇠 남편은 웃으며 알겠다고 하는데, 그 남편이 결국 64세에 죽어 그 약속을 지켰다며 담담히 이야기한다. 세월이 약이라고 오랜 세월이 흘러, 단장을 끊는 슬픔도 무뎌질 수 있구나 싶다.


같은 이야기라도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작가의 손으로 쓰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오랜만에 대가의 묵직한 에세이를 읽었다.


박완서 작가는 어른들을 위한 책만 쓰신 줄 알았는데, <7년 동안의 잠>과 같은 어린이동화도 여러 권 쓰셨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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