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 8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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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서문에서 인류의 모든 지식 중 가장 유익하면서도 발전이 가장 덜 된 것이 곧 인간에 관한 지식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 그 자체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한,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 근본에 대해 얼마만큼 생각해 보았는가.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적응하거나, 부정하거나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동 할 뿐 저변에 깔려있는 현상을 연구하고 그것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사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게’만든 사람과 제도에 대한 불만과 의구심으로 시작해본다면 과연 이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억제하고(불평등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 혹은 불평등에 대한 만족을 뒤로하고(불평등으로 인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 현상 자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생명체는 진화하게 마련이다.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환경이 되는 모든 곳에서 각각의 종들은 적응을 위해 변화한다. 물론 그 변화를 포기한 종에 대하여서는 의논의 여지가 없다. 적응하여 살아남아 다음을 기약함은 전제 조건인 것이다.
딸기는 다섯 개의 꽃잎을 피우는 데 딸기가 더 실하게 열릴 수 있는 토지 조건이 형성되면 꽃잎을 두 세 개 더 피우기도 한다. 꽃잎이 지고 딸기가 열리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잎이 많은 딸기가 더 크고 맛도 좋다고 한다. 딸기 종자는 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미리 꽃잎을 하나 더 피우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우성과 열성의 형질을 살펴보면 우성이 더 우월한 쪽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게 부모의 형질 하나만 해당되어도 자녀에게 되물림 되는 우성 형질은, 쓴 맛을 느끼거나 엄지 손가락을 구부리는 등의 것들이 우성인 것으로 보아 열성보다 발달한 것들로 간주해도 큰 문제가 없다. 이는 다음의 종에 더욱 유리한,발전된 유전자를 물려주려는 자연상의 이치인 것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고,양육에 대한 체계가 부족했던 시기에는 사람도 꽤 많은 자녀를 출산했다.사망률이 높은 만큼 살아남는 종에 대한 믿음도 컸을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출산 이후 양육의 방식과, 환경에 따라 그 결과물(자녀)의 완성도에 차이가 생기므로 선택과 집중을 통한 몰아주기 방식으로 출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강한 자라면 살아남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자를 만들고자 하는 판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불평등에 있다.

루소는 자연적 불평등은 타고 나는 것으로 이러한 불평등은 문제가 되지 않고이러한 불평등만 존재한다면 인간은 행복하다고 했다. 타고난 불평등은 키가 작다거나, 눈이 크다거나, 갈색 머리라거나 하는 식의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불평등이, 어떻게 생각하면 불평등이라기 보다는 그 다양성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지 모르겠다.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신은 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은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 유머감각이 없거나 지적 수준이 떨어질 때, 그리고 반대로 외적인 매력도와 정신적인 매력도가 상반적일 때 우리는 그런 농담을 한다.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는 대신 다른 무엇을 주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데, 이것이 신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우위에 있는 외적 형상을 갖춘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내면의 소양을 갖춰야 하는 필요성이 낮았을 것이라고 유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사람은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살면서 충분히 인정 받았을 것이고, 그 아름다움으로 꽤 많은 일들을 어렵지 않게 이뤄왔을 것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동등한 기회가 미녀와 미남보다 추녀와 추남에게 더 많이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같거나 적을 것이다. 결코 많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하면 그것은 불평등이 아닌 것인가. 다만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현혹된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소양부족으로 볼 것인가.미녀와 미남을 우대하라는 특별한 규정도 법도 없다면 그것은 제도에 의한 불평등이라고 볼 수도 없지 않은가. 규격화된 사이즈의 같은 용량의 사람들이 제품 찍어내듯이 출생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불평등은 애초에 존재했으며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려 하는 것이 되려 문제라고 판단된다.

세상에 많은 불평등이 있다.
이해할 수 없고,이해하여서도 안되는 부조리한 불평등도 존재한다. 그것들에 대한 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다름’이 존재하는 한 불평등의 이름을 가진 모든 불편한 현실이 이미 예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여 다툼이 생길 것도 아닌데 조금 더 근면한 자가 먹을 것을 조금 더 많이 비축해놓고, 아침 일찍 일어나 노동한 것을 잃고 싶지 않아 그것들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자 먼저 보유한 것들에 대한 소유를 명확하게 할 것을 주장하고 또한 그 경계(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확인을 받고 싶어하며 그 확인을 뒤집거나 변경시키지 못할 강한 제약이 필요했고
그 제약들을 이행하게 하기 위한 더 강한 규칙들도 필요하고 그 규칙을 인정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게 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고, 그 제도를 만들기 위한 강인한 힘이 필요하여 만들어진 모든 규정들이 결국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불평등이 불필요 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제일 처음 시작한 가정에서처럼
남들보다 잠을 조금 자고 더 일찍 일어나 수렵이나 사냥으로 얻은 그 개인의 노동력의 대가가 분배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말이다. 루소가 지적했듯이 모든 자연의 것들은 충분하지 않다. 충분하지 않아 내 몫을 잃을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에 내가 미리 나의 미래를 위해 준비해 둔 부분에 대해서는 잃지 않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몫을 작정하고 노리거나,
별 생각 없이 취하려고 하는 부류들로부터 그러한 권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규정이나 법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지한 인간들을 설득시켜 그들의 권익과는 무관한 법을 제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법은 결국 그 법의 제정에 동의한 사람들에게 족쇄가 되어 때로는 불평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아주 소수들과의 교류만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형평성을 잃지 않는 법과 제도는 도리어 불평등을 좁혀나갈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루소가 언급했듯이 자연적인 불평등이 다른 여러 요인들과 결합하여 다른 불평등을 초래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다.
불평등은 불평등을 낳는다.
불평등이 세대를 지나면서 평등이 되었다 한들 불평등에서 시작한 근본은 변함이 없어,
평등으로 승화된 불평등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이 가진 자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자. 그 환원된 재화나 용역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이득들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는 없다. 적어도 현재의 인구와 문화에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분배의 이득을 본 사람과, 손해를 본 사람, 그리고 이득도 손해도 보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될 것이다. 이것 또한 불평등인 것이다.

인류의 모든 생명체가 각각의 자신의 종을 더욱 성하게 하고,
근본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끊임없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진행한다면 그들의 자연적인 불평등은 결국 불평등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러한 불평등을 부당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금씩 모든 판단이 가능한 대상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법을 변경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아래 모두를 평등하게 할 수는 없으나
평등으로 가려고 하는 방향만은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앞으로 더욱 벌어질 불평등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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