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미술관 -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
탁현규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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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잡문록 #조선미술관 #탁현규


탁현규 선생님의 신작 『조선미술관』 (블랙피쉬)은 ‘조선 풍경’이라는 관점에서 조선의 회화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신한평, 정선 등 쟁쟁한 화가들이 담아냈던 조선 사람, 조선 풍경, 조선 풍습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죠. 그런데 ‘조선의 것’이라는, 어쩌면 지금은 낡아 보이기까지 하는 그 담론은 당대에 지식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뛰게 한 설렘의 가치였습니다.


17~18세기 조선을 뒤흔들었던 하나의 시대정신은 ‘법고창신(法古刱新)’입니다. 그러한 담론이 뜨거웠던 파트 중 하나가 문장론인데요. 이전까지 적잖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고문(古文) 이라 하여, 당나라의 문장과 한나라의 시에서 쓰인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이를테면, 한시를 쓸 때 수도를 가리켜 한양이 아니라 낙양(洛陽)이라 쓰고, 재상의 벼슬을 가리켜 영의정·좌의정이 아니라 삼공(三公)이라 썼습니다. 그것은 그때의 표현법이 최고의 경지이며, 나아가 유학이 지향해야 할 정신적 가치를 잘 머금고 있다는 평가에서 비롯된 유행이었죠.


법고창신은 이러한 사조에 의문을 던집니다. 한양의 풍경을 보고 시를 쓰면 한양이라고 적어야지, 왜 낙양이라고 쓰냐는 거죠. 이러한 의문은 지식인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가, 조선의 사람과 조선의 풍경을 조선의 말로 표현하는 사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림에도 적용됐습니다. 이른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입니다.


그런데 사실, 법고창신론은 ‘완전한 창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고창신론의 대표 주자인 박지원은, ‘창신하여 비루해지느니 때로는 법고하여 고루해지는 게 낫겟다’라는 말도 했죠. 그것은 새로운 표현법을 쓰되, 유학의 이념과 지향점에서 벗어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회화에서도 적용됩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은 이전 시대의 화가들에 비하면 분명히 조선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옛 그림에 쓰였던 표현법을 적용하여, 사물을 왜곡해서 그리기도 했죠. 이를테면 박연폭포를 실제보다 세 배쯤 늘려서 그린 것처럼요. 그것은 이전 시대의 작품들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삶의 정신과 이상적 사회상을 담아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폭포는 단순히 폭포가 아니라, 사대부에게 특정한 정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확실한 소재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상에 가까운 폭포의 모습으로 담아내고자 한 거죠.


그런데 정신적 감흥이 김 씨에서부터 최 씨까지 모두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다양성이야말로 새로운 사조의 창조로 이어지기 마련이죠. 17~18세기에 불었던 ‘조선의 표현, 조선의 그림’이라는 담론은 다양성에 대한 본능적인 요구였고, 그에 따라 이전 시대에는 다뤄지지 않았던 대상이 화폭에 안착합니다. 탁현규 선생님은 그 대상들을 정밀하지만 간결하게 추적해 나가며, 독자의 정신적 감흥을 한 장 한 장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백미는 그림 이면의 장면을 상상하는 저자의 추론입니다. 신한평의 <자모육아도>에서는 그림에 등장한 세 사람의 표정에서 기쁨, 슬픔, 분노를 읽어내면서 나아가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심리 상태를 추적합니다. 신윤복의 <홍루대주도>에서도 좀처럼 짐작하기 힘든 사람들의 관계와 신분, 나아가 행동의 목적까지도 읽어내죠. 이렇듯 저자는 인물의 몸짓과 표정, 전체의 구도, 사물의 유무, 시대와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 등을 종합하여, 우리에겐 낯선 조선의 풍경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극의 한 풍경으로 탈바꿈합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술사가의 작업에도 충실합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고 비교 분석하여 그림에 담긴 역사적 사실의 조각을 맞춰나가죠. 


결과적으로 저자는 하나의 그림에서 드라마 대본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즉, 한 컷의 미장센으로부터 영화 전체를 읽어내는 영화평론가처럼 작품을 해설하죠. 저자가 시도한 사실에 기초한 분석과 상상에 의거한 해석은 이 역시 법고창신의 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칭찬하고 싶은 점은 책의 편집입니다. 책의 몇 페이지를 넘기자, 일관되게 사진을 책 중앙의 접합 부분에 걸치게끔 삽입한 것을 보고 다소 당황했습니다. 게다가 작품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꼭 접합 부분에 걸쳐, 제대로 볼 수 없었죠. 의문은 곧 풀렸습니다. 편집부는 접합 부분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하이라이트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다음 페이지에 더 잘 보이도록 삽입했습니다. 독자에게 부분과 전체를 하나하나 보여주고 싶었던 저자와 편집부의 고민이 보이는 지점이었습니다.


책은 읽기에 부담 없는 양입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저자의 다채롭고 자유로운 해석 끝에는 ‘조선의 그림을 통해 한국인의 정신을 읽어낸다’라는 주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의 정신과 한국인의 정신은 다른 만큼 같고, 같은 만큼 다르죠. 많은 분이 이 책을 통해 그림 안에 담긴 삶의 역사를 추적해 나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쓸모 있는 책’을 만났습니다. 앞으로 저 또한 역사 교양서를 쓸 때 이 책에서 제시하는 설명과 도판을 활용할 일이 자주 있을 듯합니다. 풀컬러 조선미술사 책을 펴낸 저자와 편집부의 치열한 고민과 용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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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수업 1 : 고대 그리스 철학 -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자세하고 유쾌한 철학 이야기 철학사 시리즈
김주연 지음 / 사색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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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출판사, 사색의 숲에서 처음 펴낸 철학사 수업 1(김주연 저, 2021)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로부터 헬레니즘 시대까지 약 700년 간 고대 그리스의 철학사를 다루고 있다. 철학 플랫폼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까요?”

 

였다. 물론 나는 배움이 짧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지만, 제각기 철학의 분과 학문을 전공하시는 분들조차 저마다 다른 책을 소개하였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책도, 또 나름대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책도 있었으나, 좀처럼 좋은 책이라는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음을 관찰했었다.

 

반면, 어떤 책이든 그 책이 철학사적 관점에서 철학을 소개하는 것이라는 데까지는 쉽게 합의에 이르렀다. 분과 학문에서 철학을 교육하는 현장에서도 이 방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철학사는 역사를 넘어, 철학자들의 사유와 체계를 같이 다루고 있다. 철학자들이 어떤 말을, 어떤 글을 쓰기까지의 맥락과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자연스레 철학적 사고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철학사를 바라보는 시대의 관점에 따라 큰 흐름을 느낄 수도 있다. ‘좋은 철학사서가 그 어떤 시대에도 새로 나와야 할 필요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대상이 2천 년 넘도록 사골을 우려낸 고대 그리스일지라도 말이다.

 

이 책은 좋은 철학사서가 없다라는 아쉬움을 해소하면서도,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철알못도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인문학적 관점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데 충실하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철학자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적지 않은 도판과 도표를 삽입하여 이해의 친밀도를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고대 그리스, 2000여 년이 넘는 우리와의 시간 만큼이나 다르고 낯선 사유의 체계를 소개하기 위해 저자의 고심이 적지 않았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철알못과 저자의 대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철학사적 흐름을 따라 주요한 철학자들을 다룬다. 특히, 오래도록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친 저자의 역량이 적지 않게 드러나는데, 어디까지나 교양의 영역에서 머물 수 있도록 텐션을 잘 조절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철학자 한 명 한 명을 다루는 것이 그리 깊지는 않다. 예컨대,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서사시 한 구를 들고 3시간 동안 씹고 뜯고 맛보는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기반으로 언젠가 3시간 동안 파르메니데스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으므로, 숨 가쁘게 지나가는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너무 짧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또한, 서문에서 얘기하듯,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사실, 혹은 최신의 연구 결과로 유력해진 학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거장 철학자의 철학사서가 명저인 것은 맞지만, 자신의 철학적 관점이 강하게 들어 있어, 철학사도 이해하기 벅찬 나 같은 뉴비들에게 또 다른 장벽을 선사한다. 예컨대,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피타고라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상의 영역에서 피타고라스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은 더 없을 터이다. 플라톤 사상처럼 보이던 점이 분석을 거치고 나면 실제로는 피타고라스 사상으로 드러난다. 지성에는 드러나지만 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순수하고 영원한 세계의 착상은 피타고라스에서 비롯된다.

 

철학적 사고 훈련에 능통하고 철학사적 맥락에 밝은 사람은 이 문장이 가리키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채겠지만, 나는 모른다. 반면, 이 책에서는 피타고라스를 이렇게 소개한다.

 

피타고라스는 합리적 자연철학과 비합리적 신화가 융합된 독특한 사유를 선 보였습니다. 철학이 신화에서 벗어나기 보다는 신화와의 결속을 통해 힘을 발휘한 경우인데요.

 

또한,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를 소개하면서 사실은 피타고라스가 발견하지도, 증명하지도 않은 것임을 밝힌다.

 

피타고라스가 피타고라스 정리를 접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아름답고 간결한 수학적 관계에 감명을 받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과 간결함이 우주에 내재하는 수학적 원리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바친 것 같습니다.

황소 100마리를 봉헌하는 어마어마한 의식을 거행했으니 실로 유명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정리와 황소 제사 에피소드가 덧붙어져 전해지다가, 결국 어느 시점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추측됩니다.

 

또한, 어떤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기 편안한 예를 제시한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을 소개하면서,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의 사물들, 즉 개별자예요. 철알못님도 실체고요. 저도 실체예요. 이 책상, 저 꽃, 그 강아지, 남대문, 석가탑, 이런 것들이 실체입니다.

 

이렇듯, 어디까지나 중등 교육을 마친 철린이의 시점에서 비교적 익숙하면서 이해하기 쉬운 문장의 배열로 교양입문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따라서 철학을 시작하려는, 혹은 고대 그리스 철학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매우 편안하며 적절한 안내서이다.

 

철학은 현상에서 피부에 와닿게 다뤄지는 학문은 아니다. 장막 너머에서 거대한 뿌리를 내밀어, 우리의 사유 곳곳마다 줄기를 펼치는 학문이다. 또한, 우리는 동아시아의 끝자락 한국에서 21세기를 사는 사람이지만, 지금 이 시간 떠오른 사유마다 좋든 싫든 고대 그리스를 만날 수밖에 없다. 철학사 수업의 첫 번째 시간으로 고대 그리스를 읽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타당하고 현명하다.

 

새롭게 시작하는 철린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좋은 동반자가 되리라 믿는다. 철학사 수업의 두 번째, 세 번째 수업도 기대가 된다. 학점 걱정 없이 듣는 댕꿀 강의, 들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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