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교육, 한번쯤 들었던 말,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는 상식을 불러일으키는 말, 그러나, 딱히 뭐라 하기에 애매한 말. ‘교사를 위한 부모를 위한 발달교육’, 370매 분량이다. 나는 비고츠키 입장에서 본 사람 중심 교육을 하자는 취지의 제목에 끌렸다. 저자께서 이 책을 친필로 증정해 주셨다. 어느새 ‘삶의 힘이 자라는 우리 인천교육!’ 인천교육의 모또가 되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사람중심교육의 기본, 발달교육, 세계에 대해 답하다로 제시했다.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비고츠키 심리학에 기대어 발달교육적 인간학에 관한 담론으로 구성했다(7).
발달의 발생적 국면을 세 가지 층위로 제시했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1) 너와 마주보기. 인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게되는 과정, 상호주관성을 제시했다. 서로가 학습의 사태에서 서로 돕는 모습을 보인다면 상호주관성이 중요해진단다. 문화심리학이 이러한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다.
2) 우리 함께 있기.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육화된 존재로 삶을 체험하는 일, 몸의 정동작용으로 주체가 되어가는 일, 인간이 공동의 삶을 살아가도록 키워주는 일, 그러한 삶을 겪도록 하는 일을 학교문화 측면에서 접근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고 한다.
3) 나 혼자 되기. 최종 도착지는 개별적 인간의 내면성 성립이다.
발달교육이 이루어지는 일은 교육공학적 대안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아이들 마음속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발달교육이 사람 중심 교육의 기본요소임을 강조한다. 비고츠키가 제시한 대결론, 교육과 발달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러나 분명 과잉된 교과교육측면보다는 아이의 발달적 성취 경험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이상이 저자의 머리글이다.
목차를 보고 굉장히 세부목차가 반가웠다. 읽고 싶은 주제로 가득하다. 특히, 상호주관성, 정동, 실천공동체, 역량, 자기 생산 등의 용어는 평소에 듣던 용어들이다. 그런데 늘 헷갈리고 망각되었다. 저자는 인식론적 차원을 벗어나 존재론적 사고를 강조했다고 했다. 며칠에 걸쳐 전체를 통독한 지금, 내 머릿속에는 발달교육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측면보다, 발달교육이 필요한데, 어떠한 측면에서 그 발달의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지를 제시한 것 같다. 즉 발달은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거기에 대해 존경과 신비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일러주는 듯 하다. 1)너와 마주보기, 2)우리 함께 있기, 3)나 혼자 되기라는 큰 틀을 지지할 수 있는 설명할 수 있는 세부사례가 제시되었다. 세부 목차는 각 발달측면을 설명해주는 논거로서 활용되었다.
세세하게 미주로 해당 용어와 배경을 제시하였다. 잔글씨가 큰 글씨보다 더 잘 읽혔다. 세부목차와 관련하여 인용된 내용들은 각 발생국면을 향해 항해하는 배들에게 어떤 방향에서든지 언제든지 발달이라는 방향성에 대한 참조점으로서의 북극성 역할을 하고 있다. 세세한 인용과 학자들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세부목차마다 갖는 매력 때문에 완독을 하였다. 읽으면서 만든 밑줄을 다시 훑어보며 노트북에 타이핑을 선별적으로 해보았다. 역시 새롭고 어렵다. 이 어려운 용어들, 사례들이 다 무엇에 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다보니, 힘들게 읽어진 이유가 다가온다. 예고없이 등장하는 무수한 철학자의 사색, 그들이 고민했던 용어들이 나에게 버거운 것이다. 발달교육을 말하는데 이렇게 철학자의 목소리가 필요할 줄 몰랐다. 소화하지 않은 채 읽기 때문이었다. 발달교육을 만만하게 본 것이다. 인간이해를 평소에 안 하다가 다층적으로 심도있게 접근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논의를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 머리가 작년과 달리, 손상을 입은 듯 하여 잘 안 읽힌다.
내가 세 부분의 큰 틀과 세부목차 사이의 연결점을 잘 찾지 못해서 그런듯하다. 타이핑을 치면서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었다. 몇 번을 읽어도 어려운 건 어렵다. 다만 저자가 쓴 노력에 대해 독자로서 두 번읽은 정도야 성의를 보여야겠다는 다짐으로 읽었다.
아래 내용은 내 자신이 무엇을 읽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 크다. 저자가 말한 것 가운데 내 마음에 드는 문구를 정리한 것이다. 책의 내용을 미려하게 정리하겠다는 의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훑어 보면서 학자들의 인용 내용이 방대함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달교육 이해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교사라는 역할수행에 조금이라도 뼈와 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씨름을 해 본 것이다. 이하 내용은 저자가 제시한 목차순서에 따라 마음에 드는 부분만 그대로 옮겨놓은 것게 불과하다. 사이에 간간히 있는 [ ] 는 나의 단편적인 생각이다. 좀더 숙고하고 사례를 들면 좋으련만, 책의 내용을 옮기는 일로 마무리한다.
Ⅰ. 너와 마주보기
미완의 탄생이기에
미성숙한 탄생은 오히려 사회성을 증가시키고 목적을 갖고 시작할 수 있게 한다. 의존적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더 가변적이다.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변형이며 시작은 자유이며, 곧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만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일생을 스스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형성해가는 존재이다.
엄마와 아기의 정서적 상호작용
흉내내는 행동, 맞장구는 정서적 조율이며 전 언어적 상호행위의 지속적 경험으로 중요하다.
비고츠키는 정서를 고등정신기능발달의 출발점이자 발달과정에 일어나는 정신기능의 작용을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38). 심미적 감각의 발달과 이에 관련된 상호작용은 미래행동을 조직하도록 고취시키는 잠재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술활동은 실패가 없는 심미적 감각을 보장해준다.
인지발달의 발생적 기원, 미메시스
흉내내기인 모방은 배움의 행위이다. 지연모방, 상징으로 매개된 행위, 예를 들어 상징놀이야말로 창조성의 원리가 들어있다(49). 흉내내기는 상대방의 재현이 아니라, 옮김(rendering)이다. 흉내는 상대방에 대한 반응으로, 소통을 생산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형태의 차용이다(49).
[ 교사의 시범, 부모의 양육, 일상적인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일상이 곧 혁명이 될 수도 있다던데. 그런데, 이 일상이 말처럼 쉽지 않다. 여기에서 갈림김이 시작된다. ]
미메시스는 주어진 것을 미메시스적으로 전화하며 수용자의 상상력이 모방과정에 함께 참여하며, 주어진 것의 개별 특성들을 미화, 개선, 보편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미메시스적으로 전유하는 일에는 상징적 물질적 실제적 신체적 측면을 지닌다. 미메시스적 행동을 통하여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는 사회적 미메시스 상황이 생겨 참여하는 사람 사이에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미메시스는 장차 살아갈 세계를 향해 취하는 태도를 특징짓는다. 삶과 발전과정 전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각하고, 재현하는 일련의 상호교섭은 상호주관성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이를 통해 정체성이 생성되며, 참여방식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으로 존재한다.
언어와 사고의 발생적 발달
언어가 인간관계 형성의 핵심이다. 비고츠키는 사고발달의 방향은 사회(말하기 영역)로부터 개인(사적 영역)으로 진행한다고 주장한다. 아이의 자기중심적 사고 역시 사회적 관계가 성장과 발달의 여건에 조응하여 내면화한 것이다. 내면화란 그 고등정신기능이 진정한 내적 정신기능으로 아이의 마음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이 때 개인외부에서 오는 사회적 영향이 개인 내부로 변화되는 과정, 즉 그들의 구성, 발생적 구조, 행동양식 등 그들의 본성 전체는 사회적이며, 정신과정으로 전이될 때도 그들은 준 사회적으로 남는다(73-75, 경쟁을 넘어 발달교육으로).
시각은 전체적이고, 말은 분석적이며, 순차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화된 지각은 범주화된 지각으로 구성되어 종합화하는 기능을 갖는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색과형태로만 보지 않고, 의미를 가진 세상으로 보게된다. 지각은 역동적 행동체계의 일부가된다. 동작이 지각과 함께 움직이면서 지각적 상황속에서 개별 요소를 평가하여 배경에서 형상을 골라내는 선택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주목한다’는 것이다. [ 이처럼 선택적 주의가 지배적인 학생은 학교에서 교사에게 관심받죠.]
행위 형식으로서의 언어
구술문화속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란 행동의 양식이지 사고를 표현하는 단순 기호가 아니다. 언어는 행동의 형식이자, 삶의 방식이 된다. 언어는 행동을 통제하는 독특한 자극이며, 표찰들의 한 묶음이 아니라, 공구상자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양식은 말에 의해서 상황의 일부를 체현하고,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하여 정돈되는 것이다. 비고츠키는 언어체계의 일부 구성요소가 개인의 행동을 계획하거나 감독하고 통제하고 조직하고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언어는 의사소통 기능과 함께 지시 기능이 있다. 아이는 의도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작은 의도에서조차 비범한 자유를 보여줄 수 있다(마인드인 소사이어티, 53-58). 이런 점에서 언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양식을 결정해준다.
감정, 정서, 느낌의 구조
정서에는 감각적 즐거움과 같은 초보적 일반적 정서, 그리고 심미적 정서가 있다. 고등정신기능의 발달을 이끄는 것은 일반적 정서가 아니라, 심미적 정서이다. 심미적 정서가 발생하려면 특별한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비고츠키 예술 심리학과 도덕교육, 95-112).
정서는 현실로부터 요소들을 선택하여, 이미지 자체의 외적 논리, 예컨대 그들 사이의 외적 유사성이나 근접성에 근거하여 연결되지 않고 공통된 감정이나 공통된 정서적 기호를 통해 연결되고 합쳐진다. 이를 바탕으로 결합된 모든 상상의 구성물이 역으로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며, 이 구성물 자체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실제의 감정, 즉 진정으로 경험되는 감정인 것이다.
사회적 상호작용과정에서 모방, 피드백, 정서적 전염을 통해 정서는 유발된다. 우리는 인식이나 활동을 하기 전에 이미 문화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의 체계 또는 세계 속에 산다. 시작은 단편적 체험이나 재현에서 출발하지만, 사물에의 소유와 변형, 제작과정에서 감정과 감각의 풍요를 추구하면서 세계의 테두리에 대한 이해에 연결되게 된다. 세계 내 존재의 방식으로 정서적으로 세계를 친숙하게 받아들여 실천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감은 의사소통의 주관적 조건
공감능력이란 바로 정서모방능력을 뜻한다. 정서적 현존에 대한 감응 능력의 부족한 경우, 몸짓에서 표현되는 태도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 감정적 맹인이라서 정신적 맹인이 되는 경우가 자폐 행동 발생으로 본다.
겨울뉴런, 타자를 자기에게 비추어 이해한다는 뜻으로 공감능력, 동조현상을 말한다. 미메시스로부터 공감, 감정이입에 이르기 까지 서로 흉내내기로 소통하고 연결가능성을 높인다. 감정이입은 자신의 위치를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저 안’으로 옮겨놓고자 하는 것이다. 정서적 공감으로서의 감정이입은 타자와 일치하려는 윤리적 노력이다. 그런데 선입견과 판단을 유보하는 가운데 공감을 유지해야 하므로 쉽지 않다. 공감은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조언하는 역할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이다. ‘현존’은 이처럼 새로운 얼굴을 순간순간의 반응으로 요구한다.
우리들을 향해 구성되어있는 일상을 공감의 토대로 삼게 된다. 여러 감각은 공통감각을 통해 질서를 찾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공통감각은 일상 세계의 지식으로 간주되는데,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구체적인 실감을 준다. 공감적 지각을 통해 생활세계를 구성해낸다(현상학과 정치철학, 262-264). 일상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길러지는 공통감각은 관계맺음에서 길러지는 상식이다. 이미 공감은 이해된 이해로서 나의 삶에 하나로 지평을 새롭게 생성해가는 것이다(가다머). 이를 통해 공동의 세계로 구성해 갈 수 있게 된다.
인간발달의 기초, 상호주관성
우리의 일상세계는 상호주관적 세계이다(버거와 루크만). 사회적 현실이 개인에게 행동 지침으로 제공되고 개인 행동을 제약하게 된다. 행위자 본인의 주관적 해석과 이를 이해하는 다른 사람의 주관적 해석이 일치해야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개인은 그의 생활세계적인 상황에 상호적으로 공유된 해석을 이끌어낸다. 생활세계는 당사자들이 배경지식으로 공유하고 있을 그 무엇이다.
상호주관성은 인간발달의 기초이며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테스트이다. 생각없는 공유가 아니라, 학습된 경험이다. 사람은 사회적 집단의 성원으로 기억하면서, 사회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기억이 재구성된다. 개인의 기억은 그가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연대의 중첩, 연계망의 접점이다. 그래서 보편적 기억이란 없으며, 모든 집합 기억은 공간과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특정 집단이 갖고 있는 것이다.
개별적 자아는 일단 개인 간의 상호작용에서 먼저 나타나고, 그 후에 개인 내 과정으로 내면화된다.
마음의 발달이 일어나는 내면화과정이 외적, 개인 간 정신과정의 단순한 복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열적이다. 언어와 사고가 그 발생적 기원을 각각 달리하면서 서로 상호 교차한다는 점에서도 분열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경쟁을 넘어 발달교육으로, 76-78).
일상적인 활동이 관행화되고 당연시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미이다.
공통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예: 관찰하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를 잘할 수 없다.(영국 변호사), 우리는 같은 단어를 쓰는지는 몰라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 언어가 말을 한다, 대화가 대화를 한다. 이 모든 사례는 대화 안에서 언어가 새로운 지식을 변증법적으로 발생시키는 작동구조를 말한다.
담화의 조건
새로운 사회집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특정 형식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집단 내부의 기준을 배우는 것이다.
대면상황에서의 윤리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대면상황에는 상호작용의례가 작동한다. 상황에 따라 여러 자아가 다르게 구성되며, 상황속 역할에 따라 서로를 알게 된다. 고정된 인격이 없고 역할가면안에 있다.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상호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역할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즉각 규칙을 재정립하게 된다.
Ⅱ. 우리 함께 있기
생명은 관계이다
생명에 대해 구체적인 감각을 통해 존재하는 살아있는 실체로 고려해야 한다. 생명이란 관계이다.
인간유기체의 특유성
정신, 신체, 세계는 지속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상호적으로 창조된다. 몸으로 생각한다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여러 감각을 통합한다는 것을 현상학적으로 다시 파악하면, 활동하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신체가 여러 감각을 통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각의 지평은 생활세계와 사태적으로 유사하다. 이원론보다 더 근원적인 제3의 지평을 설정한다. 지각된 세계 안에서는 주관과 객관, 의식과 사물을 일의적으로 분리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아의 연구, 271-275).
몸짓과 의식의 발달, 붙잡음에서 가리킴으로
몸짓은 언어에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의미가 존재하게끔 도와주는 물질적 운반책이다. 아이의 움켜쥐기 동작이 가리키는 특정행위로 상호작용을 반복하면서 지적기능을 가진 의식발달로 이어진다. 여기서 아이와 엄마의 시선 공유를 통해 지각영역, 그 자체가 즉 대상의 대상성이 성립한다. 타자와 시선 공유를 통해 지각 영역의 구조화가 일어난다. 의식이 타자에 의해 ‘나’가 대상으로서 규정되어 비로서 자아가 성립한다. 자아가 있어서 외계의 것을 대상화하는 작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 작용의 획득에 의해 비로소 자아가 성립한다.
우리의 의식체험은 항상 지향적 관계속에서 어떤 대상성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따라서 의식과 대상(세계)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항상 뭔가를 일상적으로 지향하는 의식을 발동하면서 살고 있다.
지향적 의식체험은 세계에 대한 의미를 구성하는 의식을 말한다. 지향성은 개념이나 판단으로 채색되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생생한 세계와의 대면 그 자체이다. 주어진 것 자체를 특권화한다. (현상학과 상호문화성, 79-83).
함께하는 세계의 형성
우리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홀로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환경과 더불어-도구로서든, 조력자로서든-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정의된다. 이것이 근접발달영역 개념이다(경쟁을 넘어 발달교육으로, 37-50). 근접발달영역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발달이 일어난 연후에 그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근접발달영역은 사람들이 무엇을 함께하는 것이기에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합주단의 공연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창조된다.
한 개인의 개체인 그 신체 역시 또 다른 개체-예를 들어, 공동체를 하나의 신체로 보았을 때-의 일부일 수 있다. 이것이 개체화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개체화하고 개체화되는 구성적 활동 과정이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집합적 신체를 이룬다고 말하는 것은 그 개개인이 동일한 속도는 아니라 해도,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이다.
움직이는 몸의 정동과 권력관계
정동(affect)은 신체의 운동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정의된다. 정동은 신체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몸은 상호 정동한다. 인간이나 비인간인 다른 실제들에 의해 추동되고 움직이고 실현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신체의 변용(affection)을 동반한다. 신체의 변용은 다른 신체와의 섞임에서 비롯되는 움직임의 변화일뿐이다. 그 변용을 되기(becoming)라고도 한다. 아이들이 놀이 규칙을 점차 바꾸어가는 것이 신체의 정동작용이며, 능력을 변주하는 것이다.
감정은 자기가 관여하는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이라는 측면에서 정동과 유사하다.
권력은 소유물이 아닌 관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행사된다. 권력은 ‘타인의 행위에 대한 행위’로 정의된다. 권력은 행위자로서 타인의 능력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제하며, 일련의 개방된 실천적, 윤리적 가능성에 근거해 혹은 이를 통해 작동된다(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104-108). 권력은 소유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일정한 관계속에서 자리하므로 무한하다. 푸코적 의미에서 권력은 타인의 행동에 작용하는 어떤 방식에 가깝다.
정동은 동일한 사건과 다르게 공명하며 복합적 수준으로 조직화를 발생시킨다. 프랙탈적 존재론뿐 아니라, 비선형적 인과성을 상기시킨다. 정동이 작용하는 수준에서는 잠재적 공존과 상호연결안에서 공명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어와 문화적 존재의 발달
어떤 문화적 존재가 되는 일은 특정 신념을 선택하고 여러 절차와 의례에 의미있게 참여하느냐의 문제를 포함한다. 사물이 나에게 의미를 갖는 방식에 따라 규정되며, 해석의 언어를 통해서 나에게 의미와 정체성의 문제가 해결된다.
학교는 문화에 대한 준비와 준비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이다. 문화는 체계적이고 안정된 사고나 신념(행위나 판단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교육의 문화, 247-252).
언어와 같은 문화적 기호를 내면화하는 일은 단순기호의 매개화가 아니라, 기호로 매개된 행위, 즉 문화적 활동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특정한 실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언어와 조직, 8-24).
사람들은 표현양식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사물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게임처럼 사회적 상황 안에서 수행을 통하여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을 알도록 이끄는 관습을 연습한다. 언어게임 작동의 근원적 조건으로서 삶의 형식을 소개하고 있다. 삶의 형식은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경험과 인식의 궁극적 기반으로 간주한다. 우리의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삶의 형식과 같은 의미의 틀이 필요하다. 의사소통행위의 주체들에게도 당연시되는 가정, 즉 생활세계 개념이 주어진다.
하버마스 관점에서 생활세계 내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증진시킬 필요를 부각시키고, 합당한 만큼의 체제적 합리화와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화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저울질해볼 수 있다. 교육과 관련되는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다.
조직사회와 실천공동체
실천공동체는 개인들 간의 상호주관적인 행위로 환원되지 않는 공동체 자체의 고유한 의미구조에 기초한 공동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공동체의 권력을 의미한다. 실천공동체의 목표는 첫째, 뚜렷한 목ㅍ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참여자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며 개개인의 창의적인 노력을 묶어낼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둘째, 실천과 학습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잘 짜인 정형화된 조직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셋째, 구성원 개인이 개발한 새로운 레퍼토리의 공유과정은 비정형적으로 조직된다. 정형화된 회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티타임을 하면서 서로 나눈다.
네트워크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가 필요하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완성된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안에서 존재하고 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항상 새로운 자기를 초월해 나간다고 하는 나선형적 순환의 과정이 필요하다.
문화의 근원적 토대는 윤리
자아라는 것은 다른 자아 가운데에서만 자아일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내가 말하는 곳을 정의함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감정의 윤리적 함축
삶의 현장에서 윤리는 문법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활용되는 언어이며 감정의 흐름이다. 감정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이미 윤리적인 것이 들어있다.
Ⅲ. 나 혼자 되기.
개체발생의 인지생물학적 특징, 자기생산과 자율성
우리는 자율이란 개념을 흔히 쓰는 뜻으로 쓰고 있다. 곧 자기가 따르는 법칙이나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체계는 자율적이다. 개체가 자율적인 이유는 스스로를 만들고 결정할 수 있는 생명의 자기생산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자기생산능력.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삶이다. 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하는 것이다(앎에 대한 함). 자율성 역시 자기생산체게 이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생산체계의 발제적 인지활동을 통해서, 그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발제라는 것은 실제적인 행함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자연인의 발달노선, 자애와 애기
혼자됨의 능력형성
아이들이 자기비판능력이 커진다는 것은 아이가 개별화된다는 것이다. 발달의 핵심측면 중 하나는 자기 행동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능력의 증가이다. 자기 행동을 숙달한다는 것은 의지가 발달한다는 것이다(경쟁을 넘어 발달교육으로, 85-93). 복잡하게 얽인 타자관계와 자기과ㄴ계의 균형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에게 ‘혼자’라는 것은 균형회복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칸트는 스스로 법칙을 수립하는 자유의 능력을 자율성이라고 했다. 자율성으로서의 자유와 도덕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능의 발달과 역량적 접근
인식의 문제도 지각에 주목하게 된다. 관찰하기는 관찰자의 구성이며 이 구성은 자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지적 그리고 문화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지각이나 인식은 외부 세계를 복사하는 것 아니라 관찰자의 인지체계가 행하는 조작들의 목록화라고 할 수 있다.
역량(capabilities)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이 대답에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원칙을 옹호하고 개인의 역량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렌트의 탄력성 개념을 참고한다면, 역량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기본적인 능력인 것이다. 만일 시작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자율성을 고수한는 경우, 역량은 곧 선택할 기회를 의미한다. 역량을 증진하는 것은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센은 역량을 ‘실질적 자유’이자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으로 정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기능의 선택 가능한 조합을 가리킨다. 선택의 자유는 의지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량적 접근은 사람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원칙을 옹호하고 개인의 역량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감각적 체험의 진정성
산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 아니다. 활동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존재감을 주는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루소). 이성은 단지 인지적 조작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감각적, 정신적 활동이 개념적, 논리적 사고에 수렴되는 것이며, 실천과 그대로 연결되며, 살아있는 정신이다. 교육의 최초단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체적, 감각적 생명의 자유롭고 건강한 발달이다(서사적 자아와 도덕적 자아, 243-252).
심미적 이성의 초월성
우리의 지각, 느낌, 생각, 행동은 일체 직접적으로 주체화되거나 의식되지 않더라도 크고 작은 바탕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표상의 지각이 바탕의 성질에 의하여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 현실에 밀착하여 바탕이나 테두리를 이성적 질서 속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한 원리를 심미적 이성으로 불렀다.(메를로퐁티).
자기의 발견과 자아의 기술
발달에 관한 사상에는 항상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소질이라고 부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면의 본질적 원칙이다. 이것은 소질을 보다 높은 완성의 단계로 변화시키고 완성 속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스스로를 ‘존재가 되도록 만든다’. 발달은 내면적인 소명이라는 사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헤겔).
교양은 유식함이라기보다는 그로 인한 정신의 변모를 말한다. 자기 형성 및 자기 결정의 활동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야생적이고 미숙한 인간이 도시적 문화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변모가 또한 교육의 목적이다.
고독의 힘
고민의 브리꼴라주
호모페이션스(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 고민하는 인간은 도움이 되는 인간보다 더 높다. 고민하는 브리콜뢰르는 우리가 직면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해가는데 발벗고 나선다.
서사적 자아의 주체성
이야기의 의의는 자아가 서사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리쾨르). 이야기 행위야 말로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호모 나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