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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ㅣ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예닐곱 살 때 쯤의 기억은 파편 몇 개로 남아있다. 88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를 들으며 TV 앞에서 얼어있던 감동적인 기억.(정수라의 “아! 대한민국”도 곧잘 따라 불렀다.) 1학년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면서,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들으려 서산 ‘국민학교’ 운동장에 새까맣게 모인 아줌니, 아자씨, 할매, 할배들을 헤치고 나오던 기억. 어린이 만화를 제치고 양복과 군복과 붉은 눈들이 나와 재미없는 얘기만 하는 청문회! <톰과 제리>이었는지, <아기 자동차 붕붕>이었는지 못 보는 게 골 났지만, 엄마 아빠는 청문회를 열심히도 보셨다. 그리고 거리에는 최루탄 냄새가 자옥했다. 아마도 전대, 조선대, 동신대생이었을 언니 오빠들이 뛰고 그 뒤를 까만 것이 쫓고, 길가에 선 나는 따끔따끔 어질어질했다.
90년 대 중반 정도까지는 길에서 매캐한 냄새와 맹렬한 외침을 만났을까. 무언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그런 나날들과 결별했다. 난 어렸고, 학교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시대를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단에서 맑스를 전공한 교수가 지지 정당 하나를 갖는 게 민주시민의 의무라 대학 신입생들에게 가르쳤다. 동아리 선배들은 옛날 운동하던 시절에, NL놈들이 어쩌구 저쩌구 쇠파이프 들고 싸웠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주체사상 소릴 해대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정당의 당원이 되었다.
내 예닐곱 기억의 파편 속에서 시대를 끌어간 주체로 서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선후배들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환상을 다 깼다. ㅠ.ㅠ 거기에도 나르시시즘 환자들이 있고,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 있고, 구제 못할 멍청이들이 있었다. 도대체 이 무시무시한 땅위에 섰는 용감한 존재들에게, PD니 NL이니 IS니 하는 소리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으나, 운동권의 인사이더들은 내 말을 듣고 눈에 빨간 불을 켰다. 네가 몰라서 그래!! ㅡㅡ;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아예 등을 돌린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 등을 보일 것인가? 이젠 집단에 대한 환상이 없는 걸. 누가 어느 땅 위에 어느 집단의 이름을 달고 섰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지혜롭고 열린 사람인가가 중요할 뿐. 지혜로운 개인들이 있다면, 남들이 이 땅 위와 저 하늘 아래 어떤 경계를 그리더라도 상관 없다.
내가 정체성을 찾는 데 모델이 되는 사람이 몇 있다. 에리히 프롬, 헨리 데이빗 소로우, 박홍규, 체 게바라, 가네꼬 후미코, 그리고 '지루'의 아버지 우에하라 씨~~ㅋ 하필 철학을 전공하면서, TV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운동권을 따라다니면서, 치열하게 숨 쉬면서, 내가 되어야겠다 생각하게 됐던 게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 무권위주의자, 또는 반 권위주의자(?), 자유, 자치, 자연, 주제적인 인간, 등등등의 개념들. 매력적이면서 모호하고, 골치 아픈 개념이지만, 분명 이 세상 한두 명 쯤은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오래된 만화책(<<내일의 죠>>였든가?) 을 찾아 읽고, 화려한 쇼핑몰을 구경하는 게 즐거운 열 두 살 소년 지로. 좋은 옷을 입으며,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맘껏 먹고, 내노라는 사립학교에 다니는 외가네 친척들이 부러운 소년 지로에게, 구제불능 아버지가 있다. "세금 따위 낼 수 없어!!"라며, 국가를 능멸하는 아버지. "학교 따위 가지 마!"라며 지로의 미래에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 아버지. "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무능한 아버지. 집안 바닥에 배나 등을 깔고 누워 코나 파고,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을 홉뜨다가 큰 몸을 일으켜서 굵은 팔뚝을 휘저으며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픈대로 다 내지르는 지로의 아빠, 우에하라 씨.
세상의 경계와 권위와, 구속을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스트. 그들은 어디엔가 있지만, 누구인지 무엇인지 정해져 있지는 않다.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다 해도, 이렇게 해봐라, 명확한 지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련다 해서 될 수 있지도 않다.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단언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렇게 살았고 살고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며, 스스로 느끼고 내 삶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정확히는 오쿠타 히데오의 목소리이겠지만, 우에하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책에 빨간 줄을 많이 쳐놨는데, 책을 빌려줘서 뭔 소리들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ㅡㅡ; 그저 내 피부에 스며들어 버렸을 뿐!
<<남쪽으로 튀어!>> 엉뚱하고, 재밌고, 통쾌하다. 북세통에 소개된 걸 보고 어서 눈앞에 보이길 발 동동그리며 기다렸다. 정말로. 그리고 우에하라 씨의 고향 어르신이 지로를 "지루"라고 부를 때마저도 웃었다. 파리를 "포리"라고 하듯, 어떤 어르신들에겐 절대 발음할 수 없는 음이 있다.^ㅡ^ 책을 잡을 때만은 모든 의문 떨치고, 다만 이 안에 캐릭터들을 만나면 되겠다. 그들을 만나고 무언가 생각하고..... 단지 알기만 해도 좋다. 재밌는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소설이다.
헌데 아나키스트이고 싶은 사람들은 조금 절망할 지 모르겠다. 생활을 떨치고 찾아갈 남쪽 섬 고향이 없고, "지루야"라며 옥수수, 고구마, 집안 살림살이들을 실어다 줄 순박한 이웃도 없고, 율도국 비스꼬룸한 이상세계 파이파티로마로 갈 수 있다는 희망도 없는 이 삭막한 도시의 몽상가들은 어떻게 하나?
이상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괜찮다. 이 삭막한 도시에서 '끝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상을 품고 살아가기만 해도, 이미 삶이 풍족하지 않을까. 외로워질 때마다, "남쪽으로!!"라고 수선을 떨어볼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