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는 모델까지 하는 전방위 디자이너라는 정도.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으나, 그와 함께 일을 해 본 적이 없고, 학창시절을 공유하지도 못했다. 그와 마주하고 이야기 나눈 것은 마흔이 훨씬 넘어서였다. 나에게 그는, 회색 후드티 쪼가리를 걸쳐도 아우라가 있는 유명한 선배 디자이너일 뿐.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다. 그는 저 높은 데 있는 선배디자이너. 나 같은 쪼랩은 그저 '으아- 멋지다' 이런 심정으로 바라볼 뿐. 야한(?) 표지를 하고 세상에 나온 [오밤중 삼거리 작업실]. 이 신간은 사람들이 '천재'라 부르는 한 선배디자이너의 작업실에서 그의 '수다'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무용담이 아니라 수다. 힘을 쫙 빼고, 단문으로 담담히 (간혹 유우머를 섞어) 이야기하고 있다. '수다'를 듣는 것이니 책을 집어 들고 단숨에 읽힐 법도 한데, 대목 대목에서 책장을 덮고, 나와 비교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와 내가 다른 경로로 아는 제3자의 이름도 툭툭 튀어나왔다. 그는 작업실 구석구석에 있던 예전의 스케치까지 끄집어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의 '수다'를 통해 알게 된바, 그는 '천재'가 아닌 듯하다. 그는 지독한 자료수집가고, 그림을 못 그리고,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도망을 가기도 하고, 결과물을 품질을 높이려고 노심초사하는 그런 선배였다. 그는 그놈의 얼어 죽을 '영감'을 끄집어내기 위해 집요하게 대상에게 작업을 걸었다. 마치 마음에 둔 예쁜 여성에게 작업을 걸듯 집요하게... 스포일러가 될까봐 그 내용을 소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의 영감은 그의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자료수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림을 못 그리는 디자이너다. 그림도 못 그리면서 많은 스케치를 한다. 그의 스케치 방식 또한 독특한데 이 또한 스포일러가 될까 봐 밝힐 수 없다. 그리고 몇몇 작업의 경험을 별 꾸밈없이 들려준다. 이 대목쯤 이르면 더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내가 놀란 부분은 마지막의 '제작'부분. 아. 대가의 디자이너는 이렇게 자기의 작업을 완성시키는구나... 이쯤에 이르면 어쩔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그 나이가 되면, 후배들을 위해 이런 작업을 해주어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학창시절 디자인 공부는 실기실에서 이루어졌다. 집이 멀었던 나는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집에 가고, 실기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나는 몇몇 선배의 '시다바리' 역할을 하면서 디자인을 배웠다. 내 세대의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그러하듯... 시다들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단순노가다. 그러한 작업을 하면서, 선배들이 어떻게 디자인을 풀어가는지 어깨너머로 배웠다. 내가 제공하는 노동은 일종의 수업료인 셈. 함께 밥상, 술상, 침상을 같이하다시피 하면서, 그렇게 선배들에게 배웠다. 그 시간은 너무도 소중해 내 기억저장소에 차곡차곡 간직되어 있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만 까딱하면 수없는 이미지와 자료가 쏟아지는 요사이의 상황과는 참으로 많이 다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학창시절 작업실의 풍경이 계속 떠올랐다. 선배와 후배가 어우러져, 때론 진지하게, 때론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하던 풍경. 그렇게 함께 성장해가던 풍경이... 누군가의 생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묘한 쾌감이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대개 재미나다. 게다가 이야기꾼이 이야기 거리가 많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책에서 그는 그의 작업실 풍경, 그의 생각, 그의 이야기, 그의 노하우를 마치 별것 아닌 양 술술 풀어 놓고 있다. 경륜이 있는 디자이너라면 추억과 공감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방식을 ‘훔쳐'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내기 디자이너라면, 밑줄 좍좍 쳐가면 읽어야 될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쯤엔 ‘변양’이 좀 부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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