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은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탐정물이나 추리물은 잘 안 보게 된다. 셔츠에 묻은 잉크 한 방울을 보고 살인범을 찾아낸다는 발상이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 ‘탐정’이 구구절절 그 중간단계를 자세히 이야기해주긴 하지만 여전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는다. 물론 ‘탐정’이라는 직업부터가 비현실적인데 뭘 기대하냐면 할 말이 없지만. 하여간 커서는 장르문학 중에서도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주 몰입해서 읽었다. 꽤 두꺼운데도 잠까지 줄여가며 봤다.

루 버니의 <오래전 멀리 사라져 버린>은 아주 잘 쓰인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다. 추리소설의 장점은 갖추었고 단점은 최대한 배제했다. 탐정물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설정이 거의 없다. 모든 것은 ‘납득 가능하게’ 전개된다. 장르문학이지만 거의 순문학에 가까울 정도로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고 깊이가 있다.

소설은 두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어린 자신을 축제 한켠에 세워놓은 채로 결국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던 언니를 몇십 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줄리애나, 그리고 영화관에서 일어난 무장강도 사건에서 홀로 살아남은 뒤 그 트라우마에 계속 시달리는 탐정 와이엇. 과거를 잊고 싶은 나머지 개명까지 하고 살아가던 와이엇은 친구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사건 의뢰를 받고 다시 오클라호마 시티로 향한다. 줄리애나는 어린 시절 언니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용의자의 행방을 전해 듣고 다시금 언니에 대한 추적에 나선다.

둘 다 사건 자체가 엄청나게 신비롭거나 미스터리한 것은 아니지만 때로 사소한 의문이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파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두 명의 주인공 모두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왜’ 언니는 나를 두고 돌아오지 않았을까. 어디로 갔을까. ‘왜’ 나만 살아남은 것일까.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므로 자세한 내용을 말하면 재미가 반감되므로 생략하고, 일단 긴장을 조성하는 방식, 인물의 서사를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방식 등이 아주 좋았다. 동시에 어떤 사건이나 장면을 활용하는 수준이 아주 적절했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거나 ‘전시’ 하지 않았다는 말. 특히나 여성 캐릭터가 아주 입체적인 부분이 인상 깊었다. 이런 장르물에서 흔히 저질러지기 쉬운 실수인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이 전혀 전형적이지 않다. 처음에는 이름도 그렇고 여성 작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자인 것을 알고 조금 놀라고 또 기뻤다.

남성 작가, 그것도 장르 문학 작가가 이 정도로 입체적인 여성을 그려낼 수 있다니, 세상이 정말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희망이 마구 생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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