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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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에 홀로 남겨진 7살짜리 소녀가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며, 얼마 되지 않아 4명의 형제자매들도 차례차례 떠나버렸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넷째 오빠 조디마저도 아버지에게 혁대로 두들겨 맞은 어느 하루, 꼭 살아남아야 해, 라는 말을 남기고선 소녀를 남겨두고 홀로 떠난다. 매번 술에 취해 돌아오던 무서운 아버지도 언제부터인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소녀는 완전히 혼자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짐승과 벌레들이 가득한 습지에서.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모든 사람에게 버려졌던 한 소녀의 이야기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한 소녀가 고독과 멸시를 딛고 일어서서 끝끝내 살아남고 무언가를 이루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기본적으로는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본래 생태 연구자로 학술서적만을 집필하던 델리아 오언스는 70세가 넘어서 첫 픽션인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알다시피 70세라면 소설가로서 데뷔하기엔 상당히 늦은 나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묻혀버릴 줄 알았던 이 소설이 북클럽을 운영 중인 배우 리즈 위더스푼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었던 것이다. 그 뒤 입소문을 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유명해진 다음 아마존에서 1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는데, 페이스북에서도 후기를 몇 번 보았을 정도이니 현지의 반응은 아마 엄청났을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를 무시하지만 대중은 생각 외로 냉정하다. 특히 경영경제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소설 분야는 더 그러하다. 마케팅 기술로 베스트셀러에 올릴 수는 있어도 책 자체가 별로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말. 사실은 북클럽 추천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역시나 유행하는 것은 너무 궁금하므로 결국 읽어보게 되었는데.

소감을 말하자면 우선 매우 재미있다. 잘 쓰인 소설은 역시나 페이지가 빠른 속도로 넘어간다. 재미없으면 당장 덮어주겠어 하면서 경계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늪지에서 시체가 발견되어 소란스러워지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7살의 어린 카야가 온갖 역경을 헤치고 홀로 버티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이야기와 살인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이 17년의 시차를 두고 조금씩 맞물려서 돌아간다. 누가 남자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밝혀지는 부분에 이르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그러므로 성장소설뿐만 아니라 미스터리 추리물, 법정소설의 느낌도 나고, 소녀의 사랑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분은 연애소설 같기도 하다.

다만 읽으면서 요즘 나오는 소설들 같지 않고 ‘옛날 소설’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뭐 헤밍웨이니 피츠제럴드니 하는 고전 명작 정도까지는 아니고 1980~90년대 유행했던 미국 소설의 느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문체와 캐릭터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들.

“테이트 부탁이야, 나를 잊어야 해.”
“한 번도 너를 잊은 적 없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거야, 카야.”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잖아. 난 남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그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단 말이야. 부탁이야, 이해가 안 돼? 무서워서 아무하고도 가까워질 수가 없어. 못 하겠어.”
“그럴 만도 해, 카야. 하지만....”

또는 이런 문장들.

“테이트는 아버지가 말한 진짜 남자의 조건을 생각했다. 거리낌 없이 울 수 있고, 심장으로 시와 오페라를 느낄 수 있고, 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

이런 문장들을 어디서 봤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청소년기에 열광했던 시드니 셸던 책들이 주로 이런 느낌이었다. 주인공 캐릭터도 그렇고. 플롯의 전개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고. 물론 저자의 나이(70세)가 나이인만큼, 또 소설의 시대적 배경(1960년대)이 배경인만큼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인물들의 캐릭터가 매우 전형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마음속 깊이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숲 속에 사는 소녀,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출 수 없는 야성미,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남자들, 그들에게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아 가시를 세우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녀의 마음.

그런 요소들이, 그런 소녀의 ‘성’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너무나, 예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소녀가 수동적이라거나 순종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여성혐오이거나 한 것도 아니고. 사실 주인공 카야는 죽을 뻔하던 위기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했고,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로부터 스스로 지켜낸 용감한 여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의 ‘독립적인 성향’마저도 80-90년대에 등장하던 여성 캐릭터들 분위기가 난다는 것. 뭐 좋게 말하면 고전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이 역시 저자의 나이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지점이기는 하다.

하여간 비록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재미있는 소설은 역시나 재미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7살짜리 어린아이가 홀로 살 궁리를 해나가는 모습, 하나하나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은 마치 <대지>와 같은 농경 소설(?)을 연상시키며, 법정에서 공방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초창기 존 그리샴 작품들처럼 흥미롭다. 또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또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시드니 셸던에 버금간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시들은 기품 있고 늪지의 생태를 묘사하는 장면들 역시 굉장히 아름답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대중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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