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솔로몬 왕 앞에 두 여인이 아기 한 명을 데리고 찾아와 서로 자기가 진짜 엄마라며 다투기 시작한다. 솔로몬은 아기의 양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두 여자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조용히 해결책을 내린다. 아기를 반으로 갈라 여인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라. 그러자 한 여인이 울면서 저는 아기의 엄마가 아닙니다, 그냥 저 여인에게 아기를 주소서,라고 나선다. 그 모습을 본 솔로몬은 아기의 ‘진정한’ 안위를 걱정하는 그녀야말로 ‘진짜’ 엄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결국 ‘진짜’ 엄마는 아기를 되찾는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솔로몬 왕의 명판결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때는 솔로몬 왕의 지혜에 감탄했다. 그래! 엄마라면 당연히 저런 모습을 보였을 거야. 정말 대단한 판결이로군!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문득 저 판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물론 아기를 먼저 포기했던 여인이 더 심약하거나, 혹은 정말로 아기를 더 사랑한 사람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더 사랑한 사람이 반드시 아기를 직접 낳은 엄마여야만 하는가? 솔로몬이 ‘진짜’ 엄마라고 판결했던 여인이 아기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되었을 수는 있으나 그녀가 실제로 아기를 출산한 생물학적 엄마였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어쩌면 아기를 더 사랑했을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그러니까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던 시절에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모성애라는 특별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위기 상황에 처하자 괴력을 발휘해서 차를 들어 올리고,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던지고, 총과 칼에 맞아가면서도 아기를 감싸 안아 보호하고, 기타 등등. 모성애를 다룬 위대한 신화를 보고 자란 나 역시, 엄마가 되면 그런 천부적인 감정이 자연스레 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며 겪은 일들은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임신 시절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에게 말을 거는 행복한 임산부는 없었다. 임신 자체가 싫고 불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출산이 아주 임박하기 전까지는 그만큼 뱃속에 든 어떤 ‘것’이 나의 ‘아기’ 라거나, ‘생명’이라거나 이런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출산을 기다리는 것도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은 기대감보다는 신체적 불편함을 빨리 끝장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조리원에서 봤던 몇 가지 광경도 생각난다. 전부 똑같아 보이는 빨간 신생아들이 네모나고 투명한 플라스틱 침대에 눕힌 채 나란히 늘어서 있는 장면. 엄마들은 신생아실의 커다란 유리창에 달라붙어 각자 자신의 아기를 찾아보곤 했다. 정말 특징이 뚜렷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엇비슷하게 생겨서, 엄마들조차 아기 발목에 붙은 이름표를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했다. 남의 애는 물론이고 가끔씩은 자기 애 조차도. 젖을 먹이라는 연락을 받고 수유실에 앉은 엄마들은 아기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아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하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당시 그 무한한 애정의 증거가 오로지 발목에 달린 이름표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 사랑과 애정은, 그냥 막연한 ‘믿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지녔다고 믿어지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물론 나는 지금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런 특별한 감정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런 감정들이나 특별한 끌림이 임신 단계부터 내재되어 있거나, 처음부터 특별하게 각인되어 있었다기보다는, 기르면서 조금씩 쌓였다고 믿는 쪽이다. 밤을 새워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열이 올라 보채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수십 바퀴 돌고,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조심스레 안고 비누거품으로 씻기고, 30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아이의 체온을 재보고, 하루 종일 기저귀를 갈고 하는 그 매일매일이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한편으로는 ‘천륜’이라거나 혈육의 이끌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해외에 입양을 갔는데 ‘진짜’ 엄마를 찾고 싶다고 고국을 찾는 2세들의 모습이라든가,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기를 기를 수 없었거나, 혹은 아예 의도적으로 아기를 포기했던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문득 성인이 된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나 인간 또한 생물의 한 종류로서 번식의 욕구가 남아있고,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존재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모성애’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오래된 솔로몬의 판결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아기를 버렸던 사람이 다시 아기를 되찾겠다고 나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난한 중국인 노동자 베베는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왔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지만 그는 임신한 그녀를 두고 중국으로 돌아가버리고, 혼자서 아이를 낳은 베베는 소방서 앞에 두 달 된 아기를 두고 온다.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잣집 가정에 입양되었고,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자라는 듯했지만, 어느 날 베베가 다시 아기 앞에 나타난다. 그때는 아기를 기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직장도 구했고, 먹고 살 수도 있으므로 아기를 돌볼 수 있다고. 그러므로 아기를 돌려달라고.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진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고 어떤 사람이 자신이 입양 보낸 아기를 되찾으려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몹시 혀를 찼을 것이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자기가 선택해놓고선 너무 이기적인 것 아냐? 그럼 10개월간 고생 고생한 그 부부는 어쩌라고. 태어나서부터 첫 돌까지의, 가장 귀엽지만 그 이상으로 힘겨운 시기를 이미 두 번이나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를 잘 알기 때문에, 아마도 저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사람에 어떠한 공감도 동조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상식이고, 규칙이고, 세상의 이치이므로. 그러나, 소설을 읽는 것의 묘미는, 상식으로 생각해왔던,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의 이면을 알게되는 데 있지 않겠는가.

사실 이 베베는 메인 캐릭터도 아닐뿐더러, 베베의 재판이 중요한 분기점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소설의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요 인물들은 별도로 존재하며 그 인물들에 얽힌 중요한 이야기들 또한 따로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추리소설의 트릭에 버금가는 책의 핵심 열쇠이므로 이 글에서는 따로 밝히지 않기로 하고. 다만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저 베베의 사건을 비롯하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대부분의 사람이 확고한 결론을 내릴 만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이 질문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어머니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요인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굉장히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읽는 이를 얼마나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가 역시 좋은 소설의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다층적인 방향으로, 계급, 성별, 인종, 유전자 등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며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처럼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많은 소설들과 다른 점은, 이야기 자체가 몹시 재미있다는 것이다. 페이지가 매우 빠르게 넘어간다. 이처럼 재미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작품은 확실히 드물다.

생물학적 요인과 사랑의 대결 외에 인상 깊은 점은 ‘불씨’의 이미지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씨’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끌고 나간다.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혹은 “걔는 그럴 애가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불씨가 남아 있는 한 불은 언제든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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