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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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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나 전쟁이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곤 했다. 나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위협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일수록 상상은 더욱 리얼해졌다. 대부분은 고개를 흔들며 아, 난 못해, 그냥 자살할 거야, 라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살이 최선일 것 같았다. 일단 굶주림 등 육체적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강간, 살인, 약탈과 같은 인간성의 말살과 함께 따라오기 마련인 폭력을 나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멘탈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상상의 끝은 항상 똑같이 흘러가곤 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자살하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7살과 3살, 아직 혼자 살 수 없는 아이들.

가끔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가족 동반 자살이 근본적으로는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앞으로 그 아이가 살아갈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 그냥 두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전쟁이나 세기말 상황에서는 어떨까.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너무나도 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다. 강간, 살인, 착취. 그런 상황이라면 부모는 아주 쉽게 같이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옳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 죽을 수 없다면,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 없다면, 결국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아무리 죽고 싶더라도 끝까지.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아들을 데리고 유랑하는 내용이다. 세계는 멸망했고, 사방은 암흑뿐. 모든 것은 다 타버렸거나 사라져 버렸다. 날씨는 춥고, 먹을 것은 없고, 언제 누가 공격해 올지 모른다.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목적지가 없는 유랑을 계속한다. 목표는 오직 살아남는 것. 더 정확하게는 아이를 지켜내는 것이다. 남자는 계속된 위기 속에서 여러 번 죽고 싶은 상황을 맞이하지만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고, 결국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만 아이를 위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남자는 아이를 위해 살아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남자를 위해 살아있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결혼해서 직접 아이를 낳아보기 전에,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유전자를 보존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책임이 따르고, 돈도 들고, 귀찮고, 힘들고, 그런데 왜? 이것은 아이를 둘이나 낳은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낳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을 뿐 왜 그런지 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번에 매카시의 <로드>를 읽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세상은 너무 절망적이고,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필요하고, 결국 그것은 사랑이라고. 물론 그 대상이 반드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사람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사랑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주 죽고 싶어 지니까. 책임감이든, 집착이든, 행복이든, 미안함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으니까.

매카시는 70살 때 늦둥이인 10살짜리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이미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강연이나 기고 요청 등을 거절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로 평생을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는데,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인 때마다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로 간신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너무 자주 절망스럽고 죽고 싶지만, 아이 때문에 결국 죽을 수 없는, 혹은 아이로 인해 계속 살게 되는 그 마음이 읽혀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또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조건 힘겹고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작품 속 인물들은 엄청나게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아빠가 거의 절망한 상황에서도 소년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도와주고 싶어 하고, 남의 것을 빼앗을 때 미안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과 극적인 상황 속의 선량함으로 받아들이는 해석도 많다. 실제로 남자는 아이에게 좋은 사람들이 어딘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비록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몰라 숨어서 지켜보고 있지만, 어딘가에 반드시 있기는 있다고. 재미있는 사실은 그 말을 한 남자 자신은 스스로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희망적으로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 정말로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믿으려고 한다.

나는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악해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버티는 인물들을 좋아한다. 왜 이런 이야기들에 유독 끌리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것은 결국 나 스스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은 아주 나쁘고, 세상에는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인 세상이지만 어쨌든 악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용기를 얻게 된다. 더 악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있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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