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가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상황을 굉장히 기피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도박, 도전, 모험 등의 단어와 거의 생리적으로 맞지 않고, 인간관계에서도 이 사람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곧장 백스텝으로 멀어진다. 그야말로 안전지향.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할 만큼 허술하게 행동한 경험 역시 적지 않다. 예전에 유럽 여행할 때는 돈을 아낀다는 핑계로 히치하이킹도 많이 하고, 모르는 사람 집에서 즉흥적으로 잔 적(에어비앤비나 카우치서핑 아님)도 여러 번인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는지 아찔해진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다행히 별로 위험했던 적은 없었지만.

다만 이런 일들은 있었다. 한 번은 독일 시골마을에서 포츠담까지 나를 선뜻 자기 차에 태워주겠다던 사람(남자)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잘 곳이 없으면 자기네 집에서 자라고 하길래 결국 그날 밤은 그 집 거실 소파에서 묵게 되었다. 문제는 그날 새벽 곤히 자는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어나, 일어나, 귀에 속삭이면서.

잠결임에도 눈을 뜨기 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이 남자!!! 강간범인가!! 어떡하지?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모르는 사람 집에서 잔다고 했을까! 아씨, 모르는 척 일어나서 가방에 들어있는 주머니칼 꺼내와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 온갖 망상을 하다가 일단 일어나기는 해야겠어서 눈을 살짝 떠봤더니, 앞에 남자가 아주 태평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남자는 나에게 물었다. 너 대마초 피울래?

알고 봤더니 그냥 흔한(?) 히피 한 명이었을 뿐, 전혀 해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마초는 어디서 났냐니까 마당에서 재배했다고(...).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와서 ‘대접’하는 차원에서 꺼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통편도 제공하고, 숙소도 제공하고, 대마초까지 제공할 뻔(!) 했던 매우 친절하고 관대한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잠깐이지만 강간범으로 오인하고. 미안합니다.

이와 비슷하진 않지만 2000년대 초, 도쿄에 처음 놀러 갔을 때도 위험할 ‘뻔’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뭐 핸드폰 어플이 있기를 하나, 안내판이 상세하길 하나 말 그대로 여행 중에는 지도만 주구장창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기에 나 같은 길치들은 무척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 붙들고 길을 물어보는 결말로 끝나곤 했다.

한 번은 그렇게 길을 물어봤던 사람 중 한 명이 친절하게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가는 도중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이 처음이라 신기했는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며 괜찮으면 그날 밤 다시 만나자고 청했다. 내가 묵는 호텔 이름과 방 호수를 물어본 뒤, 저녁에 자기가 연락하겠다고 했다.

외국인 친구를 사귈지도 모른다는 흥분에 더해 뭔가 전반적으로 어리바리했던 스무 살의 나는 별생각 없이 숙소를 알려줬고 밤에 전화가 걸려온 뒤 근처에 있던 이자까야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까지는 사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 가면 있을 수 있는 흔한 일화이고, 위험할 뻔했던 그 사건 자체는 아니다. 그날은 재밌게 잘 놀고 잘 들어갔다.

문제는 숙소가 이케부쿠로 공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왔다 갔다 하면서 오밤중에 그 공원을 혼자서 가로질러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마음에 들어서 일정 마치고 숙소 들어가기 전에도 공연히 공원에 들러 밤에 혼자 벤치에 앉아있고.

나중에 I.W.G.P(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이케부쿠로 공원)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알고 봤더니 이 이케부쿠로 공원이 매우 오싹한 곳이었다. 폭력배와 불량 청소년이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대. 왜 그런 곳들 있지 않나. 청소년들이 모여서 본드 불고, 막 집단 폭력 저지르고, 아무튼 온갖 비행을 일삼는 곳. 그런 곳을 아무도 없는 새벽에 룰루랄라 하면서 태평하게 걸어 다녔던 것이다.

훗날 일본인 친구들도 이 이야기를 듣더니 엄청 깜짝 놀라면서 너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지역을 막 다녔어! 하고 다들 혀를 끌끌 찼다. 나 또한 이 일화를 생각할 때마다 헐,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싶으면서 무슨 지뢰밭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서 통과한 사람같이 느껴져서 오싹해지고.

뜬금없이 이 이야기들이 생각난 까닭은 쿠도 칸쿠로의 에세이 <지금 뭐라고 했지?>를 읽으면서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각본을 집필하고 배우, 감독으로도 활동할 뿐만 아니라 밴드까지 하는, 일본에서는 천재로 통하는 작가인데, 특유의 개그코드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지만 일단 나는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이케부쿠로 공원이 범죄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드라마 I.W.G.P가 바로 쿠도 칸쿠로의 작품이다.

<지금 뭐라고 했지?>는 어딘가에 등장했던 ‘대사’를 테마로 쓴 짧은 에세이 모음집으로, 쿠도칸 특유의 입담이 어우러져, 아주 사소하지만 깨알같이 공감 가면서 읽다가 쿡쿡 웃게 되는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짬날 때마다 틈틈이 부담 없이 읽기 좋다. 다만 대사라는 테마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일본 드라마, 영화, 배우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므로, 이런 배경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다소 어안이 벙벙할 수 있다. 쿠도칸의 팬 및 ‘시시하지만 웃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지만.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생각난 사실 하나. 예전에 나에게 이케부쿠로 공원같이 위험한 곳에 왜 갔냐며 혀를 내두르던 일본 친구들이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토야마 지역 토박이로 도쿄에 가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원주쯤 살면서 서울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당시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케부쿠로 공원은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아이들도 그곳을 실제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냥 I.W.G.P 드라마 보고 그랬구나 싶다. 나처럼.

그러니까 마치 대림에 가서 양꼬치 먹고 왔다는 외국인에게 영화 <무방비도시> 보고 감명받았던, 그러나 정작 대림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중요) 사람들이 헉!! 장첸 같은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 지역에 가다니!!! 하고 덜덜 떠는 것과 비슷한 뭐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고로, 당시 이케부쿠로 지역이 ‘실제로’ 어땠는지는 여전히 모른다는 것. 그때랑 지금은 또 다를지 모르고. 본래는 서평을 쓰려고 했는데 뭔가 옛 추억의 회고담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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