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의효능 작가가 그린 <아 지갑놓고 나왔다> 웹툰에는 철이 없는 엄마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원숙한 어린 딸이 등장한다. 9살 노루는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뒤에도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무구한 엄마가 걱정되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다. 귀신이 된 노루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라고 놀이터 모래를 뒤져 동전을 찾아낸 다음 몰래 저금통에 넣어놓거나, 음식이 떨어지면 식료품을 사다 채워놓는 등, 오로지 엄마를 위한 것들 뿐이다. (귀신이 어떻게 쇼핑을 하냐는 질문은 패스하자. 만화다.)

그러나 그렇게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침착했던 노루는 후반부로 갈수록 분열한다. 특히나 엄마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할 정도로 폭발한다.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을, 그러나 단 한 번도 충분히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엄마가 다른 아이에게 주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루는 자의로 어른스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너무나도 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돌봐주기는커녕 자신이 되려 돌봐주어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찍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 부끄러운 말이지만 만화를 보던 초반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머, 저 엄마는 너무 편하겠다. 나도 나중에 이런 딸 낳고 싶다. 혹은 우리 애들도 이렇게 키워야지. 알아서 할 일 척척 다 하고, 이것 저것 걱정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호자처럼 엄마를 돌봐주는 모습이 정말이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노루의 속마음을 알고서 참으로 미안했다. 너무나 외로웠던, 너무나 두려웠던, 너무나 위태로웠던 그 마음을 알게 되니, 성숙한 모습에 감탄하고, 어른스러움을 치켜세우고, 어느 순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우리 애들에게 내심 그런 것을 기대했었다는 것도 다시금 미안해지고.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주변에 한 두 명씩 유난히 철이 일찍 든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쟤는 나랑 같은 나이이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어른스러울까? 하고 신기한 마음 반, 존경하는 마음 반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다시금 그 애들에 대해 생각해보니 꽤나 복잡한 마음이 든다. 물론 모두가 다 노루 같지는 않았을 것이고, 각자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일찍 철이 든 아이들, 아이인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은 분명 평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서희 작가의 에세이 <구체적 사랑>을 읽으면서 어린 나이에 유난히 성숙했던 친구들과, 엄마를 위해 고사리 손으로 살림을 하고 놀이터 모래를 뒤져 돈을 모으는 9살 노루가 떠올랐다. 2016년 경, 페이스북의 여러 글을 타고 타고 우연히 그의 계정에 도달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 정말 놀랐다. 예쁜 사람은 많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느낌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렇게나 아름다운 글을 써내는 사람이라니. 물 흐르듯 유려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서 간혹 갸우뚱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글 속에 숨어있는 외로움, 두려움, 고통, 고독감, 자기혐오 등등,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이렇게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지 잘 와 닿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숨겨둔 어두운 공간이 있고, 각자가 진 십자가가 있으므로. 다만, 내가 볼 때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 같은 사람에게,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저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추위와 우울의 근원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의 이전 책들 모두 잘 읽었지만, <구체적 사랑>에 와서야 그 마음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자유분방한, 발랄한, 멋있는, 아름다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어린 딸. 그러나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만큼 옆에서 온전한 사랑을 줄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던 엄마, 그리고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린 딸의 마음.

엄마가 자다 말고 등을 돌리면 가슴이 무너질 듯 슬펐지만, 그런 엄마를 깨울 수 없어 밤새 여러 번 자리를 바꿔가며 끝내 엄마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던 그 마음. 누구에게도 어리광을 부릴 수 없고 스스로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어린 시절, 그런 시절을 겪은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고독과 불안함. 자라서도 계속해서 사고를 치는 엄마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너무나 밉지만 동시에 너무나 사랑해서 끊어내기 어려웠던 그 마음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한쪽이 저릿해왔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철이 없는’ 엄마와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그 역시도 아이들에게 종종 비난을 듣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딸은 대놓고 “엄마는 나쁜 엄마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던가.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이 생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받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 뒤늦은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의 전작들처럼, 이 책 역시 근본적으로는 ‘관계’에 대한 글들이다. 엄마와의 관계, 아빠와의 관계, 언니와의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 딸들과의 관계, 친구 관계. 타인과의 관계는 결국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전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훨씬 긍정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와 같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서희 작가는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사랑에 있어서건, 관계에 있어서건, 자신을 있는 힘껏 내던지고, 그런 와중에 부서지고, 무너지고, 쓰러져도, 또 한 번 일어나 매번 새롭게 도전한다.

누군가의 딸인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며, 스스로와의 관계에 있어서 번민과 고통을 자주 겪는 내 입장에서는 마음에 와 닿고 공감이 가는 글이 참으로 많았다.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에서 단말기를 통해 텍스트를 읽는 것과 종이를 통해 습득하는 정보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을 보면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내용도 물론 좋았지만, 작가를 닮아 너무나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물성이 주는 기쁨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