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책은 많지만 실제로 다시 읽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소장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읽겠다는 의미이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두 번 연달아 읽은 책.

1900년대 초 런던으로 이주한 서인도제도 소수자 출신 가난한 어린 여성이 우연히 부유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의 정부가 되고, 그러다 버림을 받고, 그러면서 또 다른 유사한 관계 - 연애라고 하기도, 매춘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런 관계 - 들을 맺고, 그러면서 망가져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왜 두 번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거나, 마음을 울렸다거나, 고통스러웠다거나, 감정이입을 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어디서고 한 두 번쯤 들어봤을 법한 흔해빠진 서사를 이렇게 생생하고 훌륭하게 써낼 수 있었던 것과 작가의 인물에 대한 객관화가 감탄스러웠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있는 그대로. 심리적인 압박감을 풀어낸 표현들 역시 굉장히 독특하면서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매우 수동적이고 남성의 시선을 엄청나게 의식하는 주인공의 내면은 이런 방식으로 그려진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나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괜찮게 보일지 아닐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나의 4분의 3은 감옥에 갇혀 그 안을 맴돌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내게 괜찮아 보인다든가 예쁘다는 말을 했더라면 나는 자유롭게 풀려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미소 지었을 뿐이다.”(94쪽)

작가 진 리스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진 리스 역시 서인도제도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런던으로 이주한 뒤 부유한 남자를 만나 경제적으로 원조를 받으며 그의 정부가 되고, 버림받고, 그의 아이를 낙태한 경험이 있는데, 그것을 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여냈다.

소수자라고 하니 대체 뭔 소수자냐 싶지만, 진 리스는 겉모습이 백인임에도 할머니가 흑인(흑백 쿼터 혼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따돌림과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디테일을 통해 당대의 인종 차별이 얼마나 공고했는지를 느끼게 되는 동시에, 빈부격차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던 당대의 시대상, 당시나 지금이나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결국 대등할 수 없다는 것, 남자들 대다수가 여성을-심지어 사랑하는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인형이나 애완견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된다.

주로 코러스걸이 직업인 극 중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은 부유한 남자 한 명 잡아 한 밑천 뜯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꽃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주인공의 선배인 로리는 대놓고 “남자랑은 말이지, 네가 얻어낼 수 있는 걸 다 얻어내고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제대로 아는 여자들이라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서.

‘꽃뱀’이라는 단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법한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이 그렇게 남자를 ‘벗겨 먹으려고’ 드니 성적으로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실은 닭과 달걀의 관계 같은 것이다. 당시 가난한 여성들 대부분은 부유한 애인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 외에는 생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결국은 그런 과정에서 대부분은 중간에 버림받거나, 그의 아이를 낳고 미혼모가 되거나,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이제는 없어진 옛 기록일 수도 있고, 여전히 누군가들에게는 현실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 그럼에도 ‘변명’이나 ‘한탄’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진 리스의 다른 책들도 전부 읽어보고 싶어 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