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때의 이야기이지만, 도둑질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어귀에 문방구와 서점을 겸하는 가게가 있었는데, 일반적인 문방구들보다는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1층은 문구, 지하는 서점. 책을 좋아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이 곳에 들러 일차적으로는 일층에 있는 동물 샤프 및 각종 스티커를 구경했다. 개당 일만이천원씩 하던 동물 모양 샤프는 아이들 사이에 잇템이었지만,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세뱃돈을 받으면 꼭 하나 살 텐데 그때 무엇을 고를지 한참 동안 망설이지 않으려면 미리 봐 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랫동안 진열장에 들러붙어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 질리면 지하에 있는 서점에 서서 책을 읽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랬다.

어느 날인가는 샤프를 구경하고 지하로 내려가려고 가는 길에, 계단 입구에 주르륵 걸려있는 연예인 스티커를 보았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던지라, 차인표가 환한 미소를 짓고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한 채 동그라미, 네모, 하트, 별표 모양의 스티커에 인쇄되어 천 원에서 3천 원의 가격표를 달고 주르륵 걸려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것을, 그날따라 괜히 한 번 꺼내서 만져봤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고, 카운터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스티커를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도 않았고, 차인표를 전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스티커는 전혀 갖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스티커를 옷 속에 감춘 채로 지하의 서점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둑질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사실 뭐 대단한 것을 훔치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 엽서, 편지지, 스티커 같은 자잘한 것들.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계속해서 가져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고, 초등학생의 수상쩍은 행동이야 빤한지라,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인가는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몇 시간을 구석에 무릎 꿇고 손들고 앉아 벌을 받다가, 집으로 돌려보내 졌는데, 다음날까지 반성문과 벌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벌금은 물건 값의 10배였다. 3천 원짜리 편지지를 훔치다가 걸린 나는 다음날까지 3만 원을 마련해야 했다. 부모님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고민하다가 몰래 아빠의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냈다. 지갑에는 그날따라 돈이 두둑이 들어 있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았을 것인데, 이게 사실은 더 큰 불행이었다.

다음날 서점에 돈과 반성문을 제출한 뒤, 이번에는 부모님의 지갑에서 야금야금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처음 한두 번이야 어라?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반복되면 그건 누군가의 소행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 역시 걸리지 않을 턱이 없다. 결국 부모님에게 발각되고, 정말로 엄청나게 혼이 나고, 매우 많이 맞았다. 너무나도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민망하고, 부끄러운데,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 이젠 정말 멈출 수 있겠구나. 이제 도둑질을 그만둘 수 있겠구나 하고 왠지 모르게 어느 한쪽 구석에 안도하는 마음이 있었다.

<종이달>은 도둑질을 소재로 한다.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계약직 은행원으로, 부유한 고객의 집을 돌며 수금도 하고, 예금 등의 계약도 따내고, 간혹 고객이 요청하면 현금을 인출해 가져다주는 등의 일을 한다. 본래 알뜰한 성품으로 신용카드조차 없었던 그녀는, 어느 날 고객의 집에서 은행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휴식을 취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백화점에 들르는데, 거기에서 화장품 가게 직원의 권유에 자기도 모르게 가게에 발을 들이고,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5만 엔어치의 화장품을 사기에 이른다. 문제는 그때 그녀의 지갑에는 3만 엔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직원에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던 리카는 그날 수금한 고객의 돈봉투에서 2만 엔을 꺼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가서 자신의 계좌에서 인출해서 돌려놓으면 되지 하는 가벼운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지만, 그날의 작은 사건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줄줄이 점점 더 큰 사고를 불러온다.

리카는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남편에게 주눅 들어 지내다가 우연히 고객의 손자인 연하의 애인을 만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애인의 빚을 갚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애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꾸미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쓰고, 그 과정에서 고객의 돈까지 손대게 된다. 그렇게 한 번 시작된 횡령은 멈출 줄 모르고 점점 규모가 커진다. 리카는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차근차근 갚으면 된다는 다짐을 하며 성실하게 장부까지 기입하지만, 한 번 물처럼 빠져나가게 된 돈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심지어 한 고객의 요청으로 인출해서 가지고 갔다가 해당 고객이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자신의 가방에 넣고 돌아와 버린 5백만 엔은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흥청망청 하는 사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국돈 5천만 원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정말 거짓말 같이.

누가 봐도 바보 같고, 어리석고, 멍청하고, 비도덕적인 그런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보고 있자니 어렸을 때의 그 경험이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그다음부터는 습관이 되어버리고, 이후에는 마치 중독처럼 계속해서 빠져들다 보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강제로라도 발각되면 좋겠다 싶은 그런 행위를 하는 마음. 이는 사실 세간에서 말하는 비윤리적인 행위 모두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마약, 도박, 성범죄, 애인 몰래 바람을 피우는 행위 등등. 그러한 경험들도 대부분 처음에는 딱 한 번 만이라고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계속 이어지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허무한 다짐이 소용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살면서 종종 ‘나쁜 짓’ 불법은 아니지만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무언가를 쉽게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종이달>은 인간의 나약함, 연약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는데, 플롯이며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쪽이 훨씬 더 많이 공감이 되었다. 주인공 리카의 심리는 책에서 더 많이 드러나긴 하지만 리카의 비도덕적인 행위의 정당성(결혼생활의 공허함과 인정 욕구의 부재 등)을 입증하기 위해 남편 캐릭터가 지나치게 이상하게 그려져 있다. 리카가 선물을 해주면 일부러 더 비싼 선물을 사서 기를 죽이려 든다든지, 어떤 식당에 데려가면 다음날 더 비싼 식당에 데려간 뒤 “어제 간 곳보다는 훨씬 먹을만하지?” 하는 식으로 부인을 기죽이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양 행동하는데,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으니 이런 사람이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전반적으로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이 설정이 다소 과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사실 인간이란 딱히 엄청난 계기가 없더라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이유로, 무심결에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생이 허무해서, 혹은 뭔가 커다란 결핍이 있는데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또는 어떤 강렬한 욕구가 있지 않더라도, ‘어쩌다 보니’ 그런 일들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어쩌다 보니 돈을 횡령하고, 어쩌다 보니 바람을 피우고, 어쩌다 보니 도박을 하고, 어쩌다 보니 살인을 하고, 어쩌다 보니 도둑질을 하고 등등. 혹시나 오해할까 봐 적어두지만, 저런 행위가 모두 동급이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정당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인생이란 어떤 순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심결에 한 선택으로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돌멩이처럼 그렇게 상황에 떠밀리고, 그러다가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간이란, 그리고 인생이란 그렇게 나약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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