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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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고 난이도 관련하여 논란이 많았다. 특히나 언어영역 31번의 경우 가장 어려웠던 문제로 꼽히면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가 아닌 물리 문제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정도도 읽어내지 못하면 난독증이 있는 것이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실질적 문맹률을 준엄히 꾸짖기도 했다. 물론 많은 한국인이 실질적 문맹인 것은 맞지만(포탈에 실린 기사의 댓글을 보라) 31번 문제를 예시로 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31번 문제의 지문을 보고 상당히 ‘나쁜’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문제의 난이도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는 글쓰기의 본질을 두고 이러한 설명을 한다. “쓰기는 쓰기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행위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도 이와 상통한다. 1) 의미의 전달이 명료하고, 2) 진실성이 있고, 3) 타인이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을 이야기하는가의 여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글쓰기와 읽기에 있어서 ‘소통’이라는 목적이 잊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수능의 목적은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것이고,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변별력을 갖추려면 어렵고 난해한 문제 또한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렵고 난해한 문제가 반드시 배배 꼰 나쁜 문장을 통해서 출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정작 그 본질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괜히 유식하거나 똑똑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고, 글 좀 쓴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러 배배 꼰 이상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본다. 쉽고 단순한 문장은 ‘쉬운 글’로 폄하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쉽고 단순한 문장으로 쓰여졌다고 하여, 읽기 쉽다고 하여, 그것이 ‘쉬운’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황현산 선생의 <사소한 부탁>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부터 돌아가시기 전인 2017년까지 선생이 이곳 저곳에 기고한 칼럼 및 평론을 모아놓은 책이다. 읽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읽기 쉽고 편안한 글을 쓸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문장은 짧고 단순하며, 대부분 아주 쉬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모든 단어가 제각기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해 있어 거슬림이 없다.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은 물 흐르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편의 글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읽기 쉬운 글이라고 쉽게 쓰여진 것은 아니다. 책에 담긴 글들을 읽으며, 피카소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어느날 공원에 있던 피카소에게 한 여성이 다가와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자 피카소는 5분 정도 시간을 들여 초상화를 그려주고는 500만원을 요구했다고. 5분 쓴거 가지고 너무하는거 아니냐고 항의하는 여성에게 피카소는 지금 사용한 것은 5분이지만, 이렇게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50년을 노력했다고 대답했다 한다. 이처럼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되기까지의 사유와 성찰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 깊이가 차마 짐작도 하기 어려울만큼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하여간에 책을 읽을 때는 기억에 남는 좋은 문장을 메모해두곤 하는데, 받아적을 문장이 너무 많아서 괴로웠던, 그런 책이다. 날카롭고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품위가 있는 글. 읽을수록 글쓴이의 부재를 아쉬워하게 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책의 말미에 실린 각종 시집과 소설책에 관한 평론들은 다른 글들보다 조금 어렵기도 하고 평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생소할 수 있지만, 그리고 책 전체적인 느낌과 조금 맞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특히나 어떠한 형태로든 글을 쓰고 있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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