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분명 노래와 언어로 하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한 형태로 보았지만 제사라는 비유적 언어는 서로를 향한 섬김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는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라고 언급한다(히 13:16).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인들이 보내 준 도움과 지원의 선물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그는 이러한 선물(짐작건대 음식, 연고와 기름, 의복, 담요, 필기도구 등)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빌 4:18). 이러한 예들을 통해 산 제물이 된다는 것, 즉 주님께 드리는 제물로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 P-1
하나님을 본받는 예배. 하나님을 본받거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있어 정상적인 부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겐 익숙하고 편안한 일이지만(엡 5:1; 살전 1:6), 고대 세계에서 이것은 매우 이상하고 위험한 생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신처럼 행동하려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다. 사실, 예배의 핵심 요점은 인간 자신이 신이 아닌 단순한 인간일 뿐임을 상기하는 데 있다 - P-1
바로 ‘팍스 데오룸’(pax deorum), 즉 ‘신들과의 평화’다. 고대 숭배자들은 보통 열반이나 내적 평화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천국이나 사후 세계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개인, 가정, 문명의 안녕이 올림포스산의 호의와 은총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신들에게 제물, 기도, 존경, 헌신을 바치면, 신들이 그 답례로 건강, 안전, 때로는 부를 내려 준다는 것이다 - P-1
어리석음은 그 자신을 향한 것이고, 인색함은 그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것이리라. 그런데 예수는 그를, 그의 가난한 이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색하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웃에게 보인 그의 인색한 어리석음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인색하게 쌓아 올린 곳간은 ‘오늘 밤’이라 불릴 수 있는 어느 때에든 자신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즐거움을 보장할 수 없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구원은 아마도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수많은 ‘끼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끼리’의 관계를 넓혀 가면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 그래서 예수는 성전이 아니라 집에서 구원을 선포한 것이 아닐까? 성전에는 늘 변하지 않는 ‘끼리’들만 있으니 말이다.구원은 끼리의 변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끼리의 변주는 결국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너는 안 돼!"라고 했던 야멸찬 절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를 넘어설 수 없어!"라는 냉정한 금지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함께할 일 없었던 이들이 함께 둘러앉은 상이 얼마나 복된 구원의 징표인지를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