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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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예수가 기독교의 교주인 줄 안다. 그래서 기독교에 관심없는 사람은 예수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를 기독교라는 종교 울타리 안에

있는 자기들만의 구세주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들은 공자를 유교라는 종교의 교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자는 우리에게 좋은 윤리적

교훈을 준 현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도 성리학를 절대 교리로 여기는 조선인들에게는 유교라는

종교의 교주일 뿐이다. 한국인이 명절이나 자기 조상에 제사지내는 것은 분명히 유교라는 종교의 제식이다.

제사는 유교식 종교행위다. 그런데 한국인은 제사를 자기 전통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종교행위라고 여기지 않는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카톨릭교인이 제사를 하는 것은 타락해서 그렇다.

 

예수는 기독교의 교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기독교인 외의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의 종교인이 될 뿐이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원인은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전도방식 때문이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수는 인류 전체에게, 모든 인간에게 메세지를 던진 자이지 기독교만의 구세주가 아니다.

예수를 정확하게 알려면 우선 기독교가 만들어 놓은 교리체계 밖으로 나와야 한다. 기독교를 신봉하던 유럽에

요즘 교회에 출석하는 인구는 10%도 안 된다. 유럽인이 믿는 예수는 기독교의 교주였을 뿐이기 때문에 그 교주의

매력, 천당을 보장해주는 메시아로서의 매력이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예수에게 등을 돌렸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선전한 기독교가 허구임이 밝혀지자 예수까지 버린 것이다.

 

기독교를 예수와 동일시한 결과다. 예수와 기독교는 전혀 별개다. 기독교가 예수를 전혀 몰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이는 물론 성경을 통해 아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독교야말로 성경을 자기들의 바이블로

여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이 하늘에게 그대로 떨어진 줄 안다. 성경이 글로 되어있고 그 글은 누군가에

의해 써진 것이다. 성령의 감화로 썼다고 해도 글은 인간의 글이다. 한글성경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로 써져있다.

 

인간의 글로 써져 있는 한 성경은 또한 하나의 글로 된 작품이다. 바울서신은 바울이 쓴 편지다. 사복음서도 어떤

한 인간이 인간의 글로 쓴 문서다. 그 글에 표현된 예수를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

사복음서는 똑같지만 이를 해석하는 이천년동안의 신학자, 목사들의 입장이 다 다르다. 예수를 보는 시각이 다 다르다.

누구의 해석이 옳바른 예수의 모습인가? 결론으로 말하면 영원히 알 수 없다. 해석의 지평은 무한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알기 위해서는 사복음서를 봐야 하고 사복음서를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텍스트비평, 양식비평이라는 방식을

통해 치고들어가야 한다. 이는 신학자들이나 하는 작업이므로 평신도는 이 신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하면 된다.

신학자들의 이런 학문방법을 통해 성경을 본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알고 체험하는 예수님의 은혜를 버리는 게 아니다.

그 은헤가 더욱 깊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한복음을 강해하면서 시간에 쫓겨 하고자하는 말은 다 못했다. 아쉽다. 2장까지는 자세하게 했는데

그 이후는 시간, 지면의 제약을 받아 중요한 주제를 다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담은 해설을 통해 요한복음의

예수를 이해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이런 책을 많이 참고해야 한다. 이 책의 서문격인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필독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의 말씀은 '로고스'다. 요한의 로고스를 이해하려면 저자의 말대로 그리스철학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정도도 모르고 예수를 알려고 드는 무모함을 기독교인은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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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책들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21
오쇼 지음, 박형진 옮김 / 젠토피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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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판사에서 오쇼책을 독점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잘못이다. 춣판의 자유를 막는 것은 오쇼의 뜻이 아니다.

 

너무 비싸다.

요쇼책은 전문서적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쉬운듯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깨달음이 담겨있다.

그러나 어떤 전문분야의 사람들만 보는 전문서는 아니다.

오쇼책은 쉽지 않지만 대중서에 속한다. 대중서라고 보고, 보통 자기계발서 수준의 가격으로

폭넓은 독자들이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경영전략에도 맞을 거라 본다.

 

책값만 올려놓아서 오쇼를 좋아하는 독자도 못사보게 만들었다. 요즘은 시립도서관 공공도서관에

새책구입 신청만 하면 거의 다 사다놓는다. 이것 신청하고 빌려보면 된다. 이렇게 비싼데 누가

돈주고 사서 볼 것인가? 시험서도 아닌데.

 

오쇼책을 독점하면서 가격만 높게 붙여서, 책 디자인도 좋지 않은데, 오쇼의 한글번역서를 아예

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출판사의 착각이다. 아주 싸게 할 것은 없지만 적당한 가격으로

판매부수를 올리는 게 좋을 듯하다. 이는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쇼의 설법을 많은 사람이

읽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오쇼의 영향력은 거의 죽어버렸다. 이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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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학 - 서양의 숨겨진 붓다, 디오니시우스를 말하다
오쇼 라즈니쉬 지음, 김석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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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우스 ; 아주 낮선 이름이다. 이 신학자를 아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이 책에 의하면 디오니시우스는 아주 뛰어나면서 신비로운 신학자다.

 

5,6세기에 아테네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서양의 붓다임에 틀림없다. 신비신학이란 제목을 붙인 이 글은

디오니시우스가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남긴 아주 짧은 신학서다.

글은 짧지만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신론은 지금의 기독교도 받아들일 수없다. 기존의 신학에서는

신은 존재 자체다. 그러나 그에게 신은 존재가 아니라 무, 없음이다. 불가의 공이고 도가의 허, 비움이다.

이는 기독교가 인정할 수 없다. 신이 있는 게 아니라 없다니!

 

그는 신학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게 그의 한계인데 신학자이니 할 수 없다. 그래서 개념, 범주가 중요하다.

선불교나 도가철학에서라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없다. 그는 신학개념으로 기존의 기독교 신론을 완전히 뒤엎는다.

니체는 단지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기만 했지만 디오니시우스는 신을 자신의 깨달음을 가지고 표현해내고 있다.

 

오쇼가 해설한대로 그는 분명 서양에서 보기 드물게 깨달은 사람인 듯하다. 그래서 동양에서처럼 자신을,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죽기 전까지 이 글은 공개되지 않았다. 자기가 죽으면 공개하라고

제자에 부탁했다. 이제는 오히려 그의 글을 현대신학자들이 연구 중이다.

기독교가 그의 깨달음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면 기독교 자체가 바뀔 것이고 예수를 완전히 다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있는 그 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이천년 지속해 온 기독교는 무너진다.

하지만 예수가 다시 부활할 것이고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 새 복음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디오니시우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독교는 전혀 눈치 못채고 있다.

 

머리 나쁜 교황이 그 글의 의미를 몰랐으니 다행이지, 알았다면 그는 바로 화형당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는 공개를 안 했고, 표현도 신학개념으로 교묘하게 포장해 놓았다. 그래서 아테네 주교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는 신은 신도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했다. 노자의 무지, 지식 없음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주장을 단번에 깨버린다. 신은 인격신은 물론 아니고 영도 아니라고 한다.

 

독자가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책도 잘 만들었고 번역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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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중국어 문법 강의 - 한문과 언어학의 만남
에드윈 풀리블랭크 지음, 양세욱 옮김 / 궁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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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서양의 학자이지만 중국어 문법, 고전 문법을 평생 강의하고 연구한 사람이다.

고전의 한문을 원전으로 볼 사람은 이 책을 통해 문법을 정확하게 익힐 수 있다.

 

중요한 허사들의 고대 문법을 아는데 필독서다.

나온지 오래되었는데 이 책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 

책 편집이나 디지인도 잘 되었다. 내용도 좋고 책도 잘 만들어서 만족이다.

 

역자가 영어와 비교하여 설명하는 게 이 책의 단점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반대다.

영어와 한문은 문법이 비슷한데가 많아서 같은 같다, 다르면 다르다고 비교해 설명을

해주면 오히려 한문 문법을 이해하는 데 무지하게 도움을 받는다.

이 책의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영어분법과 비교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 그래서, 한문과 한글 번역 아래 영작을 함께 실었다는 게 너무 좋다.

영어로 번역을 해 놓으면 한문 해석이 명확하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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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서 - 오쇼, 선의 일화를 말하다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11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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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의 책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현실적으로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이 모두 가격이 비싼데 왜 그럴까? 그건 출판사 자유고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비싸다고 생각하면 안 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에서 오쇼책은 이 출판사가 독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 이 출판사가 말했다. 또 이 책의 역자에게 번역 독점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원서의 번역은 그 원서의 저자와 출판사의 결정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들이 주기 싫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 오쇼책을 한 역자에게 독점시킨 이유가 번역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번역은 해석이다. 해석은 그 역자가 이해한 의미이다. 그 이해는 역자마다 전혀 다를 수 있다.

이는 학문의 자유요 해석의 자유다. 질이 떨어지는가 아닌가는 독자가 판단할 문제다. 어떤 한 원서에 대해 여러 명의 역자의 번역서가 있을 수 있다. 해석을 독점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자유를 봉쇄하는 거나 다름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수없이 많다.

오쇼의 책을 어떤 한 사람이 번역을 독점하는 것은 오쇼의 뜻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류시화가 할 수도 있고 김석환이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있다. 번역이 다양해야 오히려 오쇼의 설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독점을 하고 있는 역자가 번역을 완벽하게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지금 우리나라에 영어번역에 능숙하면서 오쇼의 책을 애독해서 오쇼책을 번역하고자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오쇼책 번역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한다. 번역, 해석의 독점을 철폐하라, 출판의 독점을 철회하라!

독점하면서 책값만 오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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