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공간, 없는 공간
유정수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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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공간, 없는 공간"은 상업 공간, 즉 마케팅에 관한 책이다. 





어떤 곳은 살아남아 시장을 선도하고 어떤 곳은 트렌드를 따라하려 하지만 오래 못 견디고 죽는다. 



온라인 컨텐츠를 많이 소비하고 있지만 어쩌다 휴일에는 집을 떠나 오프라인 공간에서 휴식을 찾는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처음에는 '만약 내가 오프라인 매장을 낸다면 어떤 공간을 연출하면 좋을까?' 그런 가정에서 출발해서 읽기 시작했다. 원래 책이라는 게 나랑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흥미가 뚝 떨어지게 마련이다.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런 시대도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는 매장을 기획하려면 요즘에는 어떤 식으로 만들면 좋을지 그 점에 중점을 두고 읽기 시작했다. 



저자 유정수 님는 "글로우서울"이라고 상업공간을 기획, 설계하는 회사의 대표다. 이력이 좀 특이한데 경제, 경영이 아니라 천문우주학을 전공했다. 



공간 디자인 트렌드란 무엇인지 대한민국 핫플레이스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지 목차를 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정보제공에 목적을 둔 실용서인만큼 소설이나 에세이와 달리 요점 파악이 필요하다. 



"있는 공간, 없는 공간"은 총 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 6:4의 법칙 : 40%의 유휴 공간이 있는 매장이 살아남는다



2. 선택과 집중의 법칙: 사람들을 오게 만들 시설물이나 특이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3. 차원 진화의 법칙: 공간의 차원이 올라갈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부조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눈길을 끌만한 조형물을 만들 것 



4. 최대 부피의 법칙: 높고 큰 공간이 사람을 매혹시킨다 -> 층고가 높아야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 



5. 경계 지우기의 법칙: 경계가 지워질 때 공간은 자연스러워진다 -> 가짜도 진짜처럼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허물라는 말. 



6. 세계관 구현의 법칙: 끝까지 밀어붙인 공간이 경쟁력을 갖는다 -> 대충 흉내만 내지 말고 철저히 구현할 것. 대나무를 심으면 몇 그루 꼽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숲처럼 보일 만큼 그렇게 심어야 한다! 



제목만 읽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의외로 책은 어렵지 않다. 



6:4의 법칙은 상업공간이라고 장사할 물건만 쫙 펼쳐놔서는 매력이 없다는 거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부러 찾아올 만한 포인트를 만들어야 하고 장사는 그 다음이라는 뜻. 



즉 10이라는 공간이 있으면 10을 다 영업공간으로 쓸 게 아니라 손님들의 눈과 몸이 쉴 만한 4의 유휴공간을 할애해야 오래간다. 



그리고 그 40%의 유휴공간을 왜 가장 중요한 중앙에 배치해야 성공하는지 그 이유도 풀어준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그 가치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백화점에도 물건만 사러 가는 게 아니다. 



쇼핑이 주목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카페에서 차마시고 수다 떨려고 가는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백화점의 중심에 어찌보면 객단가가 떨어져보이는 카페가 점점 늘고 있다. 일단 머무르는 시간이 길면 지갑은 열리게 마련이니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기획한 상업공간의 성공예시가 나와있다. 청수당, 온천집, 우물집 등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지우고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대형 볼거리를 집어넣은 "원더"라는 것도 포인트이다. 





부조가 아니라 3D, 4D로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인 형태여야 한다는 것. 



인테리어를 할 때도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이유도 알려준다. 



일반인들이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상업공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왜 가게를 집처럼 꾸며서는 안 되는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오래 한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과 길어야 10분~1시간 이내 잠깐 머무는 공간은 기획단계부터 달라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상업공간은 꾸미는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디에 어떤 식으로 힘을 실을지 서비스 역시 1부터 10까지 다 할 수 없다면 어떤 점은 가격대비 남보다 낫게 하고 어떤 점은 생략할 지 정하는 게 필요하다. 



프렌차이즈를 한다면 본사에서 다 꾸며주니 이런 고민이 필요없겠지만 본인이 사장이 되어 개인사업을 하거나, 뭔가를 처음 시작하는 입장이라면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트랜드를 따라갈 게 아니라 트랜드를 만들어가려면 시대를 읽어야 하는데 플랜테리어에 대한 이해와 그 적용 예시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 교외의 어느 멋진 곳을 찾아간다면 자연이 어우러진 넓고 층고가 높은 곳을 선호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풀어준 게 좋았다. 



다만 예시로 나온 더현대서울은 막상 가보고 실망한 케이스인데 결국이 천장이 막혀있는 건물이라 답답함을 느꼈고 실제로 돌아다녀보고 그렇게 넓은 면적은 아니구나 금새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고 뭐 한 가지라도 먹으려고 하면 줄을 엄청 서야 하는 것도 마이너스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비교군으로 나온 스타필드 하남이 훨씬 더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크고 시원해보이는 첫인상은 실제로 큰 것을 이길 수는 없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즉 기획자의 의도는 훌륭하지만 어떤 공간의 본질을 속일 수는 없다는 거. 그럼에도 이보다 100배는 작은 소규모 업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라면 효과는 충분할 것 같다. 



똑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층고가 높으면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테니까. 



특히 마지막 챕터가 흥미로웠는데 왜 상업공간에는 과할 정도로 콘셉트를 강조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나와있다. 짧게 머무르는 만큼 다소 질릴 정도로 충분히 강조해야 그곳에 잠깐 머무르는 손님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렇게 맥시멀리즘을 강조한 매장에는 소품이 많았고, 대나무는 20~30그루가 아니라 100그루이상 빽빽히 심어야 하는구나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상업적 공간에 대해 책 한권 읽지 않고 감에 의지해 인테리어를 하고 매장을 낸다는 건 참 위험한 일이다. 



자신의 전재산을 쏟아부어 시작하는 일이라면 공간연출을 직접 하진 않을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는 쌓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수없이 망하고, 흥하는 개인업장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상업공간에 관해 대중적으로 풀어준 책이라 그 점이 좋았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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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 우린 애초에 고장 난 적이 없기에
알리사 지음 / RISE(떠오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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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라는 신인작가의 자기경험을 기반으로 한 에세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를 읽었다. 




저자는 10년간의 회사생활 속에서 직장 상사에게 극심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공황장애까지 겪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과 거기서 얻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담았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아마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 자체는 생소해도 저자 알리사가 겪었던 직장 내 괴롭힘이 어떤 것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무슨 괴물 같은 인간만 직장 내 괴롭힘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작가가 지적했듯이 가스라이팅은 전세계, 모든 관계에 뿌리깊게 만연해있다. 원시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세계는 원래 정글이고 불평등했으며, 상하관계가 기본 베이스다. 위에서 까라면 까는 문화는 노예제를 비롯 인간사 전반에 걸쳐져있으니까. 



잘 깨닫지 못해서그렇지 부모 자식 간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연인 사이나 친구관계, 그리고 상하 질서가 매우 뚜렷한 직장내에서는 더욱 집요하고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상대방을 내 의도에 맞춰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려는 모든 불순한 시도가 가스라이팅이라고 정의내렸다. 



그럼 좀 더 자세히 리뷰해볼까 한다. 



원래 한 권의 책은 목차로 그 내용이 압축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는 총 5가지 챕터와 에필로그로 이뤄져있다. 



챕터 1의 내용은 "가스라이터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저자가 직접 겪은 회사 내 가스라이팅 사례이고 챕터2는 결국 퇴사를 선택한 저자가 학대로부터 스스로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챕터3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가스라이팅에서 회복한 저자가 오히려 가스라이팅을 역이용해 본인을 작가이자 컨텐츠 제작 전문가로 발전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챕터4는 해외에서도 이와 같이 성공한 유명인들의 사례(켈리 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등)하며, 챕터5에서는 이 모든 내용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내용으로 이뤄져있다. 



첫책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현재 직장 내 괴롭힘이나 따돌림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가스라이팅의 저자 사례가 여러 차례 반복되긴 하지만 그만큼 본인이 겪은 고통이 크고, 또 읽다보면 이런 류의 상사를 많이 봤기에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 충분히 흥미로웠다. 



p.60 "그렇다면 왜 이렇게 뺑뺑이를 돌리는 걸까? 단지 건망증 때문일까? 이건 가스라이터의 특징 중 하나다. 가스라이터는 특별한 이유없이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이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라고 자신을 의심하게끔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이 부분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내가 겪었던 어떤 망할 팀장도 딱 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빨간색으로 칠하라고 들어서 그렇게 해갔는데 본인은 파란색을 지시했다고 우겨댄다. 그럼 당할 때는 '그런가?' 하고 순간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일이 반복되면 내가 들었고 판단했던 모든 게 희미해진다.  



마치 지록위마처럼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거지. 



물론 이 사자성어는 외려 윗사람을 농락할 때 쓰는 말이지만 가스라이팅을 오래 당하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내 잘못인가? 하고 자신만을 돌아보게 되어 있다. 그만큼 자존감이 떨어지고 상황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아름다운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야 마땅한데 가스라이터에게 대항할 때는 우리 모두 니 탓이오, 니 탓이오를 잊지 말자.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계속 별 것도 아닌 걸로 지적질을 당하면 그 누구나 자기 판단력에 확신을 잃게 된다. 또한 뺑뺑이! 내 경우에는 이미 끝나고도 남을 하찮은 일조차 자꾸 퇴짜를 맞아서 하고 또 하고 컨펌이 나질 않은 적이 있다. 



결국 10번 이상 반복되어 나가 떨어질 때쯤 제일 허접해보이는 안이 통과되었는데 ok 사인을 받고도 기분이 나빴다. 처음에 제시했던 아이디어가 훨씬 나았기 때문. 



이 책을 읽고 그게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적 학대, 꼭 때려야 학대가 아니다. 



다행히 이 책의 저자는 일을 꽤 잘 하는 타입이었나본데 이게 권력자가 가스라이터가 되면 부하직원이 일잘러이건 아니건은 크게 관계가 없다.



그 사람이 승인을 해야 일이 끝나는 입장이라면 아무리 자기 선에서 잘했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10번 이상 퇴짜맞고 그 사람이 집에 갈 때 즈음 최악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혼란스럽다. 업무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점수를 줄 리 만무하고 승진이나 연봉협상 등에서 전부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직장 다니면서 미친 상사 만나면 답이 없는 거다. 본인의 노력만으로는 일잘러로 인정받을 수도 없거니와 주위 동료들은 권력관계에 예민하기 때문에 왕따에 동참하기 십상이다. 



모두들 상사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팀장이건 부장이건 윗선에게 미움받는 사람과 한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정글의 무리생활이라는 거다. 



나는 알리사 님이 퇴사를 한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빨리 했어야 했다. 10년씩 버텨가면서 싫은 사람 얼굴 볼 필요가 없다. 



끈기가 없다는 둥, 공황장애 왔다고 그만두면 다른 회사는 어떻게 다닐 거냐는 둥 굳이 남의 의견에 휘둘려가면서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돈이 웬수지만. 



마치 남들의 조언은 나를 위하는 것인척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당해보면 이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으며, 설사 내가 돈 안 벌어서 가족의 생계가 더 어려워진다고 해도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한번쯤 해봐야 한다. 



비행기에서 극한 상황에서 탈출할 때도 보호자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게 되어있다. 그래야 자식이나 돌볼 사람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넉다운이 되면 가족을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전반부가 가스라이터(가해자)에 대한 분노였다면 후반부는 이를 극복하고 독서모임을 지도하는 등 사회적으로 성공해가는 모습을 그려서 속이 시원하다. 



그리고 무척 짧은 시간 안에도 이렇게 사람이 극복할 수 있구나, 독서란 사람에게 이런 힘을 주는 구나 알게 되어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지금 직장 내 가스라이팅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직접 경험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협찬받아 직접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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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 우린 애초에 고장 난 적이 없기에
알리사 지음 / RISE(떠오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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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가스라이팅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과 직업을 개척한 저자의 경험이 큰 울림을 주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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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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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소설은 "달려라, 메로스", "인간실격", "사양" 이 세 가지가 먼저 떠오르는데 "사양"은 작가의 실제 삶이 소설 속 주인공들과 절묘하게 어우려져 이게 픽션인지 아니면 개인사를 바탕으로 쓴 사소설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 





아마도 그 두 가지의 경계선에 있는 듯하다. 



"사양" 책 날개에는 작가의 일생이 짧게 압축되어 있다. 







부유한 집안의 11남매 중 열째로 태어나 유모 손에서 자라다 숙모에게 맡겨져 학교를 나오고 자라서는 작문에 재능을 보이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끊임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맨 뒤에 작가 연보가 나와있어서 세어보니 총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연인과 함께 사망했다. 당시에도 아내가 있고 자식들도 있었던 것 같다. 39살 생일인 6월 19일 아침 시신이 발견되었다. 



작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기억하고 있었는데 십수년만에 다시 자세히 작가연보를 읽고 다시 놀랐다. 



어째서 끊임없이 죽으려고 했을까? 이 양반은.. 그것도 사귀던 여자들이랑? 



사실 다자이 오사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문학을 읽어보면 수어사이드(좀 흉하니 단어 좀 대체하겠음)에 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사죄만으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을 때도 주인공들이 목숨으로 사죄한다며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하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생을 달리하는 '무리신주((無理心中))'라는 단어 역시 일본어 어휘집에서 처음 봤었다. 



그 때 교수님 말로는 우리나라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고 했다. 오래전 일이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같이 죽는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란 나라가 놀라웠다. 사람은 오는 것도 혼자, 가는 것도 혼자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양"에서는 일본 전후에 몰락한 귀족집안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병약하지만 아름다운 어머니는 뼛속까지 귀족이자 귀부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를 제대로 지켜낼 다른 가족이 없다. 



외삼촌이 있으나 큰 도움은 안 되고, 아이를 사산한 딸은 남편과 이혼해서 집으로 돌아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하나 뿐인 남동생은 마약중독에 알콜 중독자로 나온다. 



그나마도 전쟁에 차출되어 나가 소식도 끊겼는데 진짜 불행은 군을 제대하고 그 문제투성이 남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그 아이가 없을 때는 두 모녀가 도쿄의 집을 팔아 한적한 시골 산장으로 이사오고, 갖고 있는 물건을 파는 것으로 억지로 생활을 꾸릴 정도였지만 남동생이 돌아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가세는 더욱 빠른 속도로 기울어진다. 



빚을 갚아주고 갚아줘도 끝이 없고 남동생은 방탕한 생활에서 전혀 돌아올 기미가 없다. 



그래서 책 제목도 "사양"이다. 이미 세상은 바뀌어 더 이상 귀족이니 평민이니 이런 게 통하지도 않는데 바뀐 세상에 적응도 못하고, 일자리도 못 찾은 몰락 귀족의 자제들이 살아남을 길은 없다. 



그저 끝없는 내리막길, 빛이 사그러져가는 불행을 묵묵히 감내하는 가즈코(사양의 주인공이자 몰락 귀족 집안의 딸)가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이어서 남동생이 세상을 등진 후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싸우는 내용이 담겨있다. 



책 줄거리만 보면 꽤나 어두워보이지만 실상 이 책의 문체는 상당히 아름답고 그래서 더 퇴폐적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생산적인 이야기도 없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허무와 좌절만이 진하게 남아있다. "누나. 난 귀족이야."로 유서를 끝맺음한 동생의 고통과 이 책에 나온 저 전쟁시처럼 말이다. 



p. 44


"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밌는 시가 종전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일이 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도 된다. 전쟁의 추억이란 말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





이런 구절이 책에 나와있다. 이 시 한 편으로도 <사양>이란 어떤 소설인지 느낌이 온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석같은 어머니는 아름답지만 병약하다. 남매는 그나마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나쁜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쓴 것 같다. 각자의 방식대로.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모든 것은 빠르게 변해버린다. 



p. 10


"닭고기 같은 것을 드실 땐 우리가 보통 접시를 달그락거리지 않고 살을 발라내려고 애쓰지만 어머니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뼈 부분을 잡고 들어올려, 이로 뼈와 살을 발라서 드신다. 



그런 미개한 행동도 어머니가 하시면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에로틱하기까지 해서, 확실히 진정한 귀족은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남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귀족 어머니는 과거 화려해던 시대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결국 죽었다. 지난 시절은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남동생은 어머니가 죽자 유서를 남기고 생을 달리한다. 차마 병약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저지르지 못하고,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도쿄로 올라가자 그 틈을 타서 집안에서 감행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꼭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가족도 없는 누나에게 험한 꼴을 보였어야 하는지는 이해가 안 갔지만 소설이란 그저 아름답고 담담하게 흘러갈 뿐 독자 개개인의 관념이나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누나인 가즈코는 어떤 선택을 했느냐? 그녀는 동생 때문에 알게 된 작가 우에하라라는 늙수룩한 중년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실상은 사랑이라기보다 그녀 혼자만의 착각에 가깝다고 느꼈지만. 




우에하라는 남동생이 도쿄의 술집을 드나들며 빚을 질 때, 누나인 가즈코에게 돈을 받아서 대신 갚아주는 일을 한 것 같은데 어쩌다 가즈코와 우에하라가 엮여서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그의 아이를 갖기를 소망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우에하라는 이미 유부남이고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와 딸도 있는 인물이고 가즈코 역시 그의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다. 



결국 귀족집안 출신인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남자의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겠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우에하라는 그녀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 



​우에하라는 가벼운 인물이어서 그녀가 남몰래 원한대로 소망을 이뤄주지만 이 기묘한 소설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젠 어머니도 동생도 없는 가즈코에게 뱃속의 아이라는 희망이 생긴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 옛날 일본 소설 결말에서 지금 현대 여성들이 결혼 없이 혼자 아이를 낳기로 선택해 키우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저 하룻밤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한 우에하라와 달리, 가즈코는 그를 사랑한다(?). 



물음표를 찍은 건 그녀가 우에하라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남자와 주인공 여인 사이에는 대단한 썸띵이 없었다. 오직 망상과 외로움만 있었을 뿐. 



남자는 그녀의 편지에도 답장조차 하지 않았고 키스도 술 취해서 기습적으로 짧게 한 것 뿐인데 여기 어디 사랑이 있다는 건지..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가족이 없어진 가즈코에게 진짜 가족이 생겼다는 것(뱃속의 아이)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빅픽쳐였다는 것이다. 



동생과 달리 가즈코는 좀 더 현실에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어떤 일이라도 할 의지도 있었다. 이 퇴폐미 가득한 소설에서도 가즈코를 통해 끝내 희망의 끈은 남아있던 셈이다. 




p.188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내 도덕적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날 잊으셔도, 또 당신이 술로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나는 내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의 보잘것없는 인격에 대해 난 얼마 전에도 누군가에게 여러 가지 들었습니다만, 내게 이런 강인함을 준 것은 당신입니다. 살아야 할 목표를 준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남동생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이 녀석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만 상대가 기절초풍할 의외의 대상이었으니(유서에서 누나에게만 밝힘) 당시 일본에서 이 소설이 초판 만여 부가 팔렸고 이후에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이런 흥미로운 남녀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와 맞물려서 말이다. 어머니를 묘사한 문체도 유난히 아름다웠지만 전후 일본 사회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고 생의 유서에도 뜻밖의 사실도 실려있어서 끝까지 재밌게 읽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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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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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손이 안 가서 10년만에 읽었는데 진작 읽어볼 것을 후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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