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하루 - 두려움이라는 병을 이겨내면 선명해지는 것들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를 먹으니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진다. 이건 마치 재미없는 드라마보다 일반인이 나오는 다큐를 더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파리에서 사는 이화열 작가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암 3기라는 진단을 받는다.

"암이란 단어가 여전히 생소하다. 나는 모르는 범죄 조직에 가담한 것처럼. 나는 모범시민이다"

이 문장처럼 암이란 진단명에 대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잘 표현한 말을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건강하다는 건 질병에 저항해서 몸이 이기고 있는 일시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50년 동안 그 저항에서 이겼다고 오늘 혹은 내일도 이길 거라는 건 어리석은 믿음이다"

세상에.. 이 문장을 읽은 40대 이상은 절대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자면서도!! 나는 이렇게 섬뜩함과 문장이 주는 묘한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한 페이지씩 읽어내려갔다.

세상 심각한 병이자 누구라도 그 단어만 들으면 몸서리치는 게 암이다. 아무리 셋 중 하나가 걸릴 정도로 흔한 병이 되었다지만 진단명을 듣고 절망하지 않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작가는 작전상 병과 거리를 둔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마치 아버지 자동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어딜 가는 느낌이다. 절대 부모의 허락없이 떼어놓을 수 없는 불편한 친구같은 존재.

책 표지에 "오늘도 절망과 싸우는 이들에게 이화열 작가가 전하는 영리한 행복"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행복의 수식어가 영리함이 될 수 있다니.. 기발한데 좀처럼 매치가 안 된다. 나는 철학적인 말에 약하다.



안타깝지만 이 홍보 문구보다 작가 글재주가 훨씬 좋아서 내내 깜짝 놀란다. 어휘력이 좋다는 건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지 않는 하루" 에세이를 읽으며 느낀 건 작가의 병은 어찌보면 그저 하나의 좋은 소재에 불과할 뿐, 원래 엄청난 글재주를 갖고 있다. 단어의 조합이 예사로운 게 하나도 없었다.



제목의 뜻이 뭘까 책을 다 읽고 퍼뜩 생각해본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는 뜻일수도 있겠다. 영원한 상태는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는 뜻일까? 중의적인 제목과 유화같은 표지, 석양을 닮은 자주색 박을 입힌 제목 글씨까지 아름답다.



작가 같은 사람이 암이라니 어째 운명의 장난 같기도 하다. 마치 '이렇게 심각하고 불행한 일이 바로 너에게 닥쳤는데 아직 웃을 수 있겠니?'라고 놀리는 것만 같다.



"저녁 식탁에서 구역질 때문에 식사를 멈추는 걸 보고 올비(작가의 남편)가 말한다. "6개월 뒤에 출산하는 거야. 이번에는 아기가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



아.. 항암제 부작용으로 식사 중 구토를 하는 부인을 보고 하는 남편의 말도 새롭지만 병에 걸렸다고 병적일 필요는 없다는 작가의 씩씩함은 그저 멋있다. 왜 우리는 문병을 가거나 환자를 대할 때 늘 어둡고 진지한 얼굴로 쾌유를 빈다느니 하는 식상한 말만 하다 오는 걸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싱싱한 생명력과 큰 웃음인데...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고 병이란 본체와 한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지켜보는 작가의 영혼이 있다. 이건 마치 적군에게 사로잡혀간 특공대원이 고문을 견디는 것과 흡사하다. 그녀는 그렇게 암에게 잡혀먹히지 않도록 살짝 거리를 둔다.



이 책은 작가가 암환자이기 때문에 투병생활을 주제로 쓴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하나의 선택지를 엿보는 기분이다.



물론 프랑스에서 암에 걸리면 어떤 의료 서비스를 받는지, 프랑스 사람들은 어떤지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소한 미국에서처럼 치과 치료 하나 못 받아서 거리를 떠돌지는 않을 듯한 묘한 기대감마저 든다. 예를 들어 암환자에게 의사가 가발 처방전을 써주는 대목을 읽자면 그렇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여기 작가의 시누이 안느처럼 이혼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거의 모든 에세이가 그렇듯이 책장을 덮고나면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하긴 어렵지만 안느의 우울증이 사라진 건 암에 걸린 뒤라는 말을 듣고 이것이 진짜 블랙 코미디라며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우리의 자잘한 병을 고치는 건 더 큰 병이라고!!

이 말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마이크 타이슨이 그랬지. "누구나 그럴 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친구의 카톡 프사에 오래 걸려있던 말인데 으흠..하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 읽은 후로 잊지 않고 있다. 부디 우리 모두 쳐맞은 후에도 계획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