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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솔직해졌다
이수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2월
평점 :
빌 브라이슨의 미국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걷는 여행기를 읽어본 기억이 나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빌 브라이슨은 그 긴긴 트레일을 걷는 내내 친구와 투닥투닥, 불평불만으로 웃음을 짓게 했는데 우리나라 20대 처자라는 글쓴이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에 계속 나오는 PCT라는 말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의 약자로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무려 4300km를 걷는 장거리 하이킹을 뜻한다고 한다. 주로 산길을 걷는 이 험난하고 지난한 코스를 2016년 5월부터 10월까지 총 6개월간 걸은 기록이다. 4키로를 40분 걸려 걷는 나는 내가 꽤 빠르게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글쓴이는 하루에 무려 30키로~50키로까지도 걸었다니 입이 딱 벌어진다.

사실 트레일 여행기이다보니 내용이 막 재밌지는 않다. 산티에고 순례길처럼 이 PCT하이커들도 죽어라 걷는 게 일과이므로 애초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없었다. 그러나 20대 중반의 나이, 여성, 혼자 미국 여행이라는 남과 구별되는 키워드가 있었고 그 긴 여행에서 어떤 것을 느꼈고 왜 떠났는지가 궁금했다. 남의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남의 경험을 내 경험처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녀의 여행기는 책 제목처럼 참 솔직했다. 어느 20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처럼 그 당시 겪은 날 것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길에서 친구를 만나 함께 여행하다가 헤어져서 혼자 다니기도 하고, 여행중 같이 자자는 이상한 프랑스 남자를 만나 질겁하기도 하고 혼자 산속에서 곰을 만나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등 마치 인생의 축소판처럼 걷기 여행의 대부분은 지루하고 비슷하지만 간간히 등골이 오싹한 위기도 있었다.

그녀는 책 초반에 인간이라는 단어는 티벳어로 '걷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인간이 가진 숙명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비록 저자는 트레일을 걷는 이 일이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심지어 이 곳에 오기 전에 2년간의 세계여행을 한 후이지만 뭔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낭만적이라는 게 그 이유로 등장하지만 아마 저자도 딱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의 어떤 강렬한 끌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일상이 지루해서 여행을 선택했지만 혼자 산길을 걷는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자기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시간과 추억과 계절과 길을 걷는다는 말이 멋있게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긴여행을 하다가 여행이 일상처럼 지루하고 평범해지는 순간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는 또 일상으로 돌아오면 될 일이다. 아마 그렇게 우리는 여행과 일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아내는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삶이 지겨워지면 홀린듯이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막상 떠나면 집이 그리워지고 그런 게 아닐까?

후반부에는 긴여행에서 돌아와 복학을 한 저자의 시선이 등장한다. 3년을 세계여행으로 떠나있는 동안 학교의 후배들은 까마득히 어려지고, 친구들은 진작에 복학해서 토익이나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 힘든 여행보다도 현실이 더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여행에서 돌아온 저자의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 궁금했는데 또 100km 워싱턴 구간을 걸으려고 미국행 비행기를 끊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또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그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려 한다는 첫 소개글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경험이 나중에 어떠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기대된다. 아마도 미래에 저자는 전문 산악 여행가가 될 수도 있고, 여행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아무 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어떤 젊은 시절의 경험도 헛된 것은 없으니 나중에 나이 들어서 더 이상 몇 년씩 장거리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순간이 온다해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고 있지 않을까? 여행을 떠나본 사람만이 여행의 가치를 안다. 혹한의 날씨에 씻지도 잘 먹지도 못하고 거지꼴로 죽어라 걸어야 하는데 무슨 좋은 이유가 필요할까? 마치 그곳에 산이 있어서 산을 오른다는 산악가들의 얘기처럼 딱히 거창한 이유는 필요없을 것이다. 그저 광활한 자연 속에서 젊은 시절 돈 주고 사서 한 멋진 고생기라는 생각을 했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훌쩍 떠나는 용기가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