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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조련사와의 하룻밤 - 어른들을 위한 이상하고 부조리한 동화
김도언 지음, 하재욱 그림 / 문학세계사 / 2019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 느낌은 서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소설 같은데 중간부터 읽다가 화들짝 놀랄 만큼 수위가 세다. 누가 볼새라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읽게 되는 소설이다. 총 7편의 단편 동화가 실린 이 책은 가히 문제작이라 할만하다. 여성과 사회 변두리 인물들, 성과 폭력을 다루고 있다. 수위가 세지만 그림은 마치 패션화보의 삽화같이 세련되고 또 크로키처럼 간결하게 정제된 묘사라 아주 야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자세히 봐야 어떤 장면인지 알 수 있어서 어른을 위한 동화가 맞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글도 중언부언 설명도 없고 간결하다. 한 페이지에 한 줄, 혹은 두 세 줄이 서사의 전부이다.

응축된 그림과 글 너머에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난이 담겨있기도 하고 일부 여성의 비틀어진 욕망의 해소방법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심한다. 과연 어떤 여자가 오늘밤 같이 잘 남자를 골랐다고 마치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성을 사듯이 여성도 그럴 수 있는 여성우위라고 볼 수 있을까? 코끼리 조련사의 정혜가 맞이하는 충격적 결말을 보고 나면 애초에 기울어진 균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변두리 인생들에게 동정심을 가졌든, 본인의 해방을 위해서였든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결과는 파멸이다. 어쩌면 정혜처럼 그런 결말을 예상하고 자기 파괴적 시도로써 도전한 거였다면 할말은 없다.
사실 '코끼리 조련사와의 하룻밤'은 그 앞에 나온 '불결한 천국의 노래'가 던진 쇼킹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나는 단편을 순서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어서 '불결한'의 중간부터 페이지를 보다가 너무 재밌어서 끝까지 다 읽고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봤는데 이 단편집의 재밌는 점은 어떤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의 경우에는 어떻게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시작 전에 출처를 밝힌다는 것이다. 100% 작가의 상상, 즉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은 소설이 알고보니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아마 나같은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므로 차라리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출처를 밝히는 페이지를 해당 단편 맨 뒤로 뺐으면 어땠을까 싶다. 더 충격적이게!)

1990년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쓴 동화라니 그럼 진짜 공기업 임원인 40대 독신녀가 매춘을 했다는 말인가? 보통 여대생의 매춘이네 뭐네 해도 알고 보면 명문대생은 순 거짓말이고 어디 이름도 못 들어본 변두리 지방대생이 명문대생으로 둔갑한 경우는 많이 봤다. 그만큼 매춘여성은 사회의 밑바닥, 못 배우고 가난한 여성들이 비자발적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실제로 남부러울 것 없는 명문대 법대 출신에 공기업 임원인 여자가 성매매를 했다니? 그 여자의 말로가 비참했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런 일이 이미 근 30년전에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그 사건을 바탕으로 작가가 재구성한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 여자의 심리상태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게 두 번째 충격이다. 매춘이라는 방식에 공감한 게 아니라 "회사 일은 너무나 재미가 없어서 그래서 해볼 만해요. 재미없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 훌륭한 연극은 없으니까." 라든가, "나는(중략) 비루해지면서 위선으로 가득한 세계를 조롱해요. 고급 승용차와 높은 연봉에 취해있는, 생명이 정지된 나의 세속을 가라앉히고, 나는 지상에서 바닥으로 황홀하게 몰락합니다." 같은 우울하고 권태로운 일상과 그 속에서 느끼는 자기파괴적 충동 말이다.

이 단편집에 나오는 고위직 여성 매춘이나 여교사의 남고생 추행사건, 혹은 외도 같은 자극적인 소재의 이면에는 자기 욕망에 대담해지다못해 파괴적 성향까지 보이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부와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여성의 성을 사는 일은 너무 흔해서 새로울 것도 없고 그 자신에게는 어떤 피해도 없다. 그들에게 남아도는 돈을 좀 썼다고 가계가 휘청이는 것도 아니고, 남아도는 힘을 썼다고 자기가 임신하는 것 같은 심각한 피해도 없다. 남자들은 그렇게 손쉽게 욕망을 해소하는데 반해 여자는 성욕에 충실한 대가로 목숨이나 직업, 명예을 잃어야 하는게 웃기다. 작가는 후기에서 "나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공기업 임원이라는 세속적 지위를 버리고 밤에는 창녀의 영혼을 갖기로 한 그 여자의 정신적 모험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거기엔 기성 세대의 뻔한 위선을 자기조롱의 형식으로 풍자하는 정직한 자의 결기가 틀림없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라고 정직한 자의 결기라는 표현을 썼다.
육체적으로 아주 나약한 존재에게 결기가 있으면 뭐하냐는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인가? 고위직 여성이 스스로를 조롱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성매매를 하는 것이 감히 평상시 말도 붙일 수 없는 하층민 남자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그래서 그 여자가 결국 차지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욕망의 해소라기에는 매 금요일마다 반복되니 해소되긴커녕 위험과 섹스에 중독된 것 같고 구태여 자기와 비슷한 동급도 아니고 밑바닥 인생 중에서만 손님을 찾아서 스스로를 거칠게 다뤄주길 바란 것은 사회에서 받는 존중과 대우에 진력이 난 반작용인가 싶어 쓴웃음이 났다. 그런 가식적인 대우라도 받고 싶지만 내내 하찮은 취급만 받는 여성들이 읽는다면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다. 그 다양한 의미를 신문기사처럼 어떤 하나의 틀에서만 해석한다면 의미가 없다. 작가가 여교사와 남고생의 사랑을 성별에 차이없는 시선을 바라봤듯이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색다른 시각, 새로운 시도로 만들어진 성인 동화책이라 평범한 애들 만화는 싫은 독자들, 애들 동화책 읽어주다가 지겨워진 부모들이 읽으면 더욱 재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