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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여자들
설재인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7월
평점 :
독특한 이력의 작가라 책을 읽기 전부터 관심이 갔다. 서울대를 졸업했고 교사를 하다가 몇 년만에 그만두고 낮에는 복싱을 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라니? 단편마다 페미니즘의 진한 향기가 나고 소재도 참으로 다양하다. SF요소가 섞인 '내가 만든 여자들', 성소수자인 두 엄마 아래서 자란 '나'가 주인공인 엔드 오브 더 로드웨이, 요즘 유행인 주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나는 '회송'도 있다. 어떤 단편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이라 추측되고 어떤 단편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분명히 섞였을 거 같은 내용도 있다. 또한 게 중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을 때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삼백칠십오 년의 라벤더, 그리고 남아프리카 원산지의 크크크'같은 실험적인 단편도 있다. 무려 12편의 단편소설이다.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초콜릿 상자를 여는 것처럼 다양한 소설을 실컷 읽는 기분에 신이 난다.

제목으로 선택된 '내가 만든 여자들'도 그렇고 몇몇 작품은 단편이라는 틀에 갖혀있기엔 아쉬운 분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거 같은데 급하게 끝을 내버린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 좋은 소재이기도 한데 짧아도 너무 짧다. 왜 부장의 D데이는 나오질 않는지, 어떻게 그 인조 인간들이 감쪽같이 살인을 하고 법망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안 그린 건지, 좋은 커피 한 잔 얻어마셨다고 살인행각에 훌렁 동조해버리는 신입이라니 그저 자세한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만 하다.
'회송'이란 단편의 지하철 소재도 참으로 자세하고 신선했으며 혁진과 진아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작품이다. 이들은 다음에 중편이상의 분량으로 재탄생하면 좋겠다. 신붓감 일순위라는 한 줄로 대변되는 여교사와 대기업 남직원의 지겨운 연애는 마치 교사란 직업이 상징하는 것처럼 안정적이지만 지루한 현실을 상징하고 독특한 취미를 가진 혁진과의 대학시절 연애는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너무나 소중한 꿈과 이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동대문역사공원역, 노원역, 홍대입구역은 다 내가 가 본 역이자 익숙한 곳이라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또 '바지락 봉지' 에 나오는 음식묘사는 얼마나 찰지고 맛있던가? 이 작가는 음식에 보통 조예가 깊은 것이 아니다. 맛있는 녀석들의 김준현만큼이나 제대로 먹고 맛을 아는 게 분명하다. 이 작품 외에도 거의 모든 단편에 음식이 나오는데 내용에 관계없이 침이 고인다. 코코넛 냄새가 나는 알록달록한 떡, 끈끈하고 달달한 육수에 말아낸 갈비국수, 팔뚝만한 러시아 양꼬치에 발티카 맥주, 꽃향기가 나고 초콜릿 맛을 품고 볶은 견과류의 고소함이 감도는 커피, 너무 추운 날에 먹는 바지락 칼국수에 소주 한 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 맛있는 음식 속에 묻어있는 추억을 못 잊어서 웃고 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