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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있는 풍경
이혜리 지음, 홍현숙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7년 2월
평점 :
절판
100% 미국인으로 살아온 재미교포 1.5세의 작가가 쓴 한국 역사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 한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쓰여진 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뭐, 그 사람은 미국 독자를 대상으로 해서 쓴 소설일 테니까. 우리 문학을 정의내릴 때 '한국 사람이 한국인의 사상과 정서를 우리글로 쓴 것'(맞나?)이라고 한다.
정말 느꼈다. 그녀는 분명한 미국인이었고, 이 소설은 단지 한국이 소재였을 뿐었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는 짜증날 정도로 한국을 미국식으로 표현하였고, 한국의 불교를 무시하였고, 지압이라는 민간요법을 만병통치의 방법으로 설명하였고, 기독교만이 모든 것의 구원이었으며, 미국은 평화의 대지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멸과 스스로 아시아계이면서 아시아에 대한 경멸이 나타나있었다. 그녀는 자부심을 느꼈다는 식으로 글을 시작했지만, 그것에 공감갈 이유가 별로 없었다.그것은 스스로도 확립하지 못한 진실을 억지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펄벅의 대지가 생각났다. 그것을 나는 중국 소설로 읽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펄벅의 생애는 중국과 많이 닿아있었고, 중국을 잘 이해하고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중국인들이 대지를 보면서,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 같은 거북함과 신경질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꽤 찬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이것은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화가 났던 것은 한국을 좀 잘 표현해주기 바란 욕심에서였던 것 같다. 읽으면서, 이것은 한국이 아닌데, 전쟁의 모습이 이것이 아닌데, 나는 그런 생각만 났다. 난 그 미국작가에게 욕심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한국답게, 한국다운 모습을 써주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