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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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천 개의 파랑을 읽고

 

파랑의 사전적 의미는 잔물결과 큰 물결이다. 이게 SF소설이라고? 2020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고 작가의 이력을 서핑하다 보면 SF소설가로 나오니 당연한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SF소설을 가장한 휴먼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책 제목의 의미는 책을 다 읽고 덮을 시점에 알게 된다. 콜리의 최후의 독백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쨍쨍의 제주방언]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콜리의 독백이자 작가의 주제를 담아낸 넋두리다.

 

작가는 MZ세대답게 랩의 라임과 음률을 아는 것 같다. 천개의 파랑이 파랑파랑의 파랑인지, 청색의 파랑인지, 아니면 사전적 의미의 파랑을 의미하는 건지는 작가의 마음이겠지만 말이다. 파랑이라는 단어에 중의적인 어감을 곁들여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도록 유도하였으니 일단은 성공한 것 같다. 책의 제목을 접하고 이게 무슨 뜻일까 ? 궁금증을 품어가며 읽었다. 깔끔하게 해석은 안 되었지만 나름 미소가 지어진다. 어렴풋이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좀 이해의 걸음을 작가 쪽으로 한 발 내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콜리다.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 기수다. 그런데, 일반적 사이보그 기수와는 달리 우연한 실수로 칩이 잘 못 꽂혀서 주어진 명령대로만 사고하지 않는 그런 사이보그가 됐다. 사색을 하고 좀 더 사람과 닮은 사이보그가 돼버린 그다. 콜리가 투데이와 경마 경기 중에 하늘을 쳐다보다가 낙마하여 하반신이 망신창이가 되는 사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로봇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일자리. 아주 현실감 있게 곧 일어날 것 같은 상상을 더해가며 자연스럽게 묘사했다. 그래서 , 이 소설을 SF소설이라 구분하여 상을 준 것 같다.

 

이 책의 작가가 실제로 직장생활이나 노동을 해 본 것 같지는 않다. 나이로 봐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노동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굉장히 날카롭다. 연재가 아르바이트자리를 잘리는 장면에서 키오스크, 무인카페, 로봇바리스타, 물류창고의 분류로봇 등 현재에도 일상화되는 인간을 대체하는 기계의 노동력에 대한 통찰을 담아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곧 다가올 현실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러한 담론을 꺼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노동과 인간 , 기계에 의해 대치되는 인간의 노동의 가치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작가가 정리한 결말이 개인적으로 불편하다.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다는 것이다. 난 해피엔딩을 아주 좋아하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집중해서 집필한 소설이다. 가족들이 콜리와 투데이를 만나게 되고 콜리와 투데이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치유와 화해를 경험하는 과정을 결과보다 더 심도 있게 그려냈다. 해피엔딩의 결론을 정말 짤막하게 몇 줄로 정리해 버리는 작가의 심술은 어찌 할 수 없겠지만 그저 아쉬움만 남는다. 한 두 페이지 더 할애해 줬다면 좋았을 것을 몇 문장으로 정리해 버리다니 인정머리 없어 보인다.

 

모녀관계와 자매관계의 회복, 꿈을 실현하기 위한 여정, 작가가 정리한 결말의 양은 불편하지만 치유와 화해의 과정은 흥미진진하고 아름답다. 이 소설은 느리게 가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 꾸준히 나아가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인생의 지혜다. 한국인은 속도경쟁에 익숙하다. 빠른 것이 이기는 방법이라 배우며 살고 있다. 책은 빨리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행복한 게 중요하다고 말을 한다. 느림의 미학도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고 있다. 비록 히어로가 나오고 우주 너머로의 여정과 같은 스펙터클한 내용이 없는 SF소설이지만 길게 여운이 남는 잔잔한 파랑처럼 내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이 잔물결이 곧 큰 물결도 되겠지?

 

책 속의 감동 문구 일부 :

천천히 천천히 빨리 달리지 말고 천천히,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경마 연습일거였다.(211p)」「너무 빠르게 달리면 다 놓치고 산대(254p)」「기술의 발달과 멸망의 속도가 같다.(183p)」「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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