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혜 문학관
박선경 지음 / 아무책방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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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실존 인물 같았던 민족 시인 정명혜. 그녀의 탄생은 다산 선생과 연암 선생의 후손이 교류하면 어땠을까 하는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일제 식민지하의 민족 시인 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어우러져 허구인지 알고도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나 배경을 그리는 문장에서 진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식민지 조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 순종과 가정적, 헌신적- 을 숨기고, 신여성으로 당당하고자 하였으나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에서도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이 시대에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글만 써도 되는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무람없이 산문을 쓰고 시를 쓰고 영어를 가르쳤다. 내가 글을 짓는 행위는 나를 짓는 일이다. 글을 쓰며 나는 나를 찾고 싶었다’.(16면)

순종과 정절과 체면을 위해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상태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는 민족 시인이자, 절개 있는 부인으로 거듭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가진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웅적 예술적 명성은 얻었으나, 현실은 죽은 채로 일본인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정명혜. 친구 윤희진과의 우정과 최우식과의 어지럽게 얽힌 사랑 이야기는 할리우드에서나 볼법한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파격적이기도 하였다. 작가의 상상력은 이렇게까지 멀리 퍼져 생각지 못한 뻔하지 않은 전개로 글의 재미를 주었다. 1부, 2부로 나뉘어 인물별로 구성된 이야기의 전개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주인공인 정명혜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의 꼭지 끝이 서로 이어져 새로운 방향으로 사건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점이 영화의 장면 장면을 넘기는 것 같이 생동감 있었다. 1부와 2부는 정명혜의 죽음 전후로 나어져 있는데, 2부의 사후 정명혜 문학관을 세우는 내용에서 나온 새로운 인물인 현대의 해진과 유림의 등장은 처음엔 다소 개연성이 없는 것 같았지만, 명혜의 진실을 찾고 진실을 묻는. 그래서 과연 진실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진실은 정말 진실인지 혹은 정말 그 진실을 마주하였을 때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데에 적합한 인물들이었다.

기록상의 사람들에게 공개된 명혜는 남편과 함께 글을 쓰고 독립을 염원하며 죽음을 맞이한 민족 시인이었지만, 현실의 명혜는 살아 있음에도 이미 남편의 죽음과 함께 묻힌 사람으로, 제 이름을 가지고 살지 못하고, 한 아이의 어미로 아이를 그리워하며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을 편지로 남기며 생을 쓸쓸히 마무리하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진실에 양심을 들이밀 필요가 있을까. 진짜가 아닌 삶을 제조해내는 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이 되었다.(309면)

진실은 소수의 관계자들에게 은폐된 채 어쩌면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정명혜로 공개되었지만, 명혜를 좇아 찾아다니던 해진만은 빛나지 않고, 가치 없다 여긴 그녀의 진실을 찾아가는 결말을 보여준다.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이기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아와 사회의 고민이기도, 여자로서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여운이 남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연 제대로 된 진실일까? 진실이고 싶은 우리의 허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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