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와 야생란
이장욱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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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

“정희 중에서 제일 유명한 정희는?
물론 박정희다. 유신시대의 저 유명한 박정희 말이다. 두번째는 추사체의 김정희고 세번째는 배우 윤정희다. 그뿐인가. 소설가 오정희도 있고 시인 문정희 고정희도 있고 통진당 이정희에서 아이돌 그룹 페이버릿의 멤버 정희까지.....그리고 세상에는 또 수많은 정희들이...
하지만 열서너번째쯤에는 분명히 내 친구 곽정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나는, 곽정희의 오랜 친구다.

오랜 친구.
그렇다. 정희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절친....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한 사이였다. 우리 집은 주인집에 딸린 단칸 셋방이었고 정희는 주인집 아들이었다. 셋방에는 밖으로 난 쪽문이 따로 있어서 나는 아침마다 쪽문을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고, 정희는 자기 집 철제 대문을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다.”

- 이장욱, 「유명한 정희」, 『트로츠키와 야생란』, 창비, 2022
ㅋㅋㅋㅋ 미치겠다. 일단 테라 한 모금 마시고.. 기억이 정확하게 겹친다. 1979-1992년 사이, 그러니까 정읍 오거리시장통 살던 시절과 정확하게 겹친다. 주인집은 영학이네였고 영학이가 학교를 오갈 때 호랑이손잡이가 달린 철제문을 박찼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내가 당시 살고 있던 셋집 양철문을 박차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살며시 밀치고 학교를 오갔던 건 사실이다.(양철문은 박찰만한 건덕지가 없었으니...) 영학이는 나보다 어린 아이였고 영학이 아버지는 심요섭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아니다, 노동자는 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영학이 아버지는 변호사에게 월급을 고정적으로 받아먹던 화이트칼라였다. 「유명한 정희」 도입부에서 이장욱이 철제문 운운하는데 나는 4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을 지남철처럼 떠올리고 기억은 징글징글하게도..그래 징글..징글벨 종소리를 떠올리면 내 고향 정읍 영락교회의 12월이, ‘영락의 메아리’가 어김없이 나타나시고 나는 그 앞에서 무장해제될 수밖에.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세월 흘러 영학이 할머니도 죽고 내 아버지도 죽고 영학이 아버지는 풍을 맞아 그 고고하던 양반이 내 어머니 호떡가게에도 등장하시고 그래서 뭐 어쨌다고, 세월은 공평하고 그런데 정작 나는 영학이네 단칸방 살 동안, 무려 13년, 영학이 아버지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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