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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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페스트>에서 얻는 교훈들


예기치 않은 곳에서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됨에 따라 우리 나라 상황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생겨나고 그들에게서 확진자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비난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입니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에서 이단이라 규정하는 단체인 신천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몰상식한 일부 기독교 목사들에게 좋은 설교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해 확산되고 있을 때에도 한국의 일부 기독교 목사들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혐오하는 설교를 배설했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집단에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증가하고 있으니 앞으로 또 어떤 혐오와 저주가 담긴 설교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떠다니게 될 지 걱정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이용해 엉뚱한 주장을 해대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오마이뉴스 기사(“총리가 ‘세균’이라 코로나가 들어왔다”는 목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목사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김민수 기자는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도대체 어떤 징벌을 받아야 당신들의 혀를 끊어 버리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에게 김민수 시민기자의 기사와 함께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함께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발생한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폐쇄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소설입니다. 이번 코로나19 확산에 반응하는 목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설 속 다양한 인물 등 중 파늘루 신부에 초점을 맞춰 읽어보았습니다.

원인모를 전염병의 확산을 바라보며 파늘루 신부가 대중들에게 했던 설교는 요즘 한국 기독교 일부 목사들의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물론 파늘루 신부는 전염병을 계기로 신자들의 믿음을 성찰해보자는 제안이니 한국 기독교 일부 목사들의 혐오와 저주와는 결이 다릅니다.) 파늘루 신부도 설교에서 불행을 겪고 있는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 앉혔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오.”(128쪽)


파늘루 신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통해 뜨뜨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보다 열정적으로 나아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신자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에, 더 오래 보고 싶기에 전염병으로 심판하는 것이니 하느님을 드문드문 찾아오지 말고 더 열심히 하느님을 찾으라고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만이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이 찾아뵙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재앙이 죄 많은 모든 도시를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132쪽)


한편 전염병으로 인해 점점 더 열악해지는 도시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의사 리유와 시민 타루는 파늘루 신부와는 다른 관점으로 대응합니다. 의사 리유는 “그 병으로 해서 겪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라 말합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들은 다른 시민 타루 역시 신부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골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169쪽)


일부(일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한국 기독교 목사들이 소설에서지만 전염병에 맞서 싸우며 환자들을 돌보는 이들의 말과 태도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파늘루 신부는 전염병이라는 비극 앞에서 자비심 없이 설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전염병에 맞서는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아무 자비심 없었던 자신의 첫 번째 설교를 후회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끝내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에는 언제나 취할 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여기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득이며, 그 이득이 어떤 점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 이득을 발견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291쪽)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사건이든 개인이 자신을 성찰하는데 계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공적인 자리에서 게다가 사사로운 정치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유익을 취하기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이들은 설교를 하기 전에 전염병이 확산되는 현장에서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힘썼던 의사 리유의 말을 꼽씹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가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292쪽)


일부 ‘거짓 선지자’들이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페스트>를 읽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우리들도 <페스트>는 읽어볼 만합니다. 국내에서도 이번 감염증 확산과 대응은 장기전이 될 것 같습니다. 무한하게 길어질 것 같은 페스트에 무디어져 가고 지쳐가던 오랑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스스로를 환기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중략) 그처럼 그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위생 규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들 몸에 실시하기로 했던 수많은 소독 규칙을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조차도 취하지 않고 폐장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253쪽)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예상하지 못한 정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 사회에도 두려움과 불안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있는 이 사태를 정치에, 종교에, 돈벌이에 이용하는 이들도 많아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민들은 알베르 카뮈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전하려 했던 ‘인류애’를 기억하고 대처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 앉혔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오."(128쪽) - P128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만이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이 찾아뵙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재앙이 죄 많은 모든 도시를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132쪽) - P132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골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169쪽) - P169

"그래도 모든 일에는 언제나 취할 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여기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득이며, 그 이득이 어떤 점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 이득을 발견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291쪽) - P291

"그 어린애를 기다리는 영생의 환희가 능히 그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로서는 쉬운 일이겠으나,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 자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가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292쪽) - P292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중략) 그처럼 그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위생 규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들 몸에 실시하기로 했던 수많은 소독 규칙을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조차도 취하지 않고 폐장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253쪽)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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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2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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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0년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된 <동물농장>과 <1984>를 쓴 조지 오웰(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1903.6.25~1950.1.21)이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조지 오웰이지만 그는 다양한 영역에서 글을 썼습니다. 기일을 맞아 그의 유명한 소설들을 다시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조지 오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책도 읽어볼 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이 저널리스트로서 쓴 기사와 칼럼을 선별해 담은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또 다른 조지 오웰을 소개합니다. 조지 오웰의 기사들을 엮어 책을 만든 김영진씨는 조지 오웰이 다루는 다양한 관심사들을 평등, 진실, 전쟁, 미래, 삶, 표현의 자유라는 여섯 가지 주제 아래 모았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조지 오웰의 생각들을 맥락 있게 읽을 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특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지금 우리 사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상당히 밀접하게 닿아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난민 등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사와 진실의 문제, 특정한 이념에 대한 광신적 추종,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 노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마치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칼럼을 쓴 건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조지 오웰은 여러 사회 문제와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에 그의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밝혔듯 그는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우물 밖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신경 쓰도록" 만들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혐오와 역사왜곡은 무지의 소산

지난해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막연한 반감으로 그들을 거부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조지 오웰 당시 유태인 난민을 거부했던 영국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는데 마치 지난 해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우리 사회에 하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 사회 시민들은 더 악랄해지지 않도록 이제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난민들에게 '돌아가라'며 쫓아낼 때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 이해하도록 설명해 줄 수는 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고 나면 사람들이 조금은 덜 악랄하게 굴지도 모른다."(51쪽)


몇 년 전 국정교과서 문제로 우리 사회는 역사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뿌리가 언제 어디에 있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좀 더 최근에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책으로 논란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대중이 믿는 진실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조지 오웰이 역사와 진실 문제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 집니다.
 

"나치 버전으로 쓰인 전쟁과 나치가 아닌 이들이 묘사하는 전쟁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 중 어느 쪽이 역사로 남겨질지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전투의 결과가 결정할 것이다.(93쪽)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중략)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96쪽)"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과 역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동 혹은 노동자라는 말을 이상하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이면서도 말입니다. 게다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 프리랜서,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으로 분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이 연대할 때 만들어지는 힘에 대한 인식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듯 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연대할 때 함께 생존할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이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사보타주'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 노동자들이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에 대해서도 조언합니다. 노동자들이 가진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전쟁과 같은 반인륜적인 일에 맞서 할 수 있는 방식도 제안합니다.
 

"사보타주는 원래 프랑스어다.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 지방의 사람들 중 주로 농민과 노동자가 신는 묵직한 나무 신발이 있다. 그게 바로 '사봇 sabots'이다. 오래 전에 고용주에게 불만을 품은 노동자 여럿이 돌고 있는 기계에 사봇을 던져 기계를 고장 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행위에 사보타주라는 이름이 붙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보타주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값나가는 재물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141-142쪽)
"기계를 향해 사봇을 던진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한 가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노동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곧잘 간과하는 사실이다. 사회의 원동력은 육체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사회의 작동을 멈춰버릴 힘이 있다."(143-144쪽)
"기계를 망가뜨릴 만한 기회나 용기는 없어도 기계가 더디 작동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를테면 가능한 제일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꾀병을 부리고, 원자재를 헤프게 쓰면 된다. 이럴 땐 게슈타포 입장에서도 책임을 따져 묻는 게 쉽지 않다. 소극적 사보타주는 전쟁 물자 생산에 끊임없이 잡음을 만들어낸다."(145쪽)


저널리즘의 역할


마지막으로 저널리스트로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언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가짜 뉴스를 생산해내는 언론이 여전히 주류에 있고, 진짜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대중들을 호도하는 일에 열심인 신문과 방송도 없어지지 않는 우리 사회입니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고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려는 소수의 언론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조지 오웰은 '저널리즘의 역할'이라는 글에서 한 저널리즘 교육기관 학과 부소장의 편지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저널리즘의 목적은 피곤한 사업가의 주머니에서 돈을 터는 것, 사회의 나쁜 면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 독자가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엔 "이 세상은 변할 리가 없고, 대중은 언제나 속아왔으며 앞으로도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얼간이들일 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시민들은 결코 얼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고 진실을 스스로 찾아가며 혁명을 이뤄왔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시민들에 더해 언론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진실을 알리는 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시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국민의 머슴들이 제 주인 위에 군림하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저널리스트로서 조지 오웰이 남긴 글들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언론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시대에 조지 오웰은 언론인으로서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지 오웰을 추억하며 그가 가진 언론인으로서의 매력을 느껴보시죠.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난민들에게 ‘돌아가라‘며 쫓아낼 때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 이해하도록 설명해 줄 수는 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고 나면 사람들이 조금은 덜 악랄하게 굴지도 모른다."(51쪽)
- P51

"나치 버전으로 쓰인 전쟁과 나치가 아닌 이들이 묘사하는 전쟁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 중 어느 쪽이 역사로 남겨질지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전투의 결과가 결정할 것이다.(93쪽)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중략)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96쪽)" - P96

"사보타주는 원래 프랑스어다.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 지방의 사람들 중 주로 농민과 노동자가 신는 묵직한 나무 신발이 있다. 그게 바로 ‘사봇 sabots‘이다. 오래 전에 고용주에게 불만을 품은 노동자 여럿이 돌고 있는 기계에 사봇을 던져 기계를 고장 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행위에 사보타주라는 이름이 붙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보타주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값나가는 재물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141-142쪽) - P141

"기계를 향해 사봇을 던진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한 가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노동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곧잘 간과하는 사실이다. 사회의 원동력은 육체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사회의 작동을 멈춰버릴 힘이 있다."(143-144쪽) - P143

"기계를 망가뜨릴 만한 기회나 용기는 없어도 기계가 더디 작동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를테면 가능한 제일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꾀병을 부리고, 원자재를 헤프게 쓰면 된다. 이럴 땐 게슈타포 입장에서도 책임을 따져 묻는 게 쉽지 않다. 소극적 사보타주는 전쟁 물자 생산에 끊임없이 잡음을 만들어낸다."(145쪽)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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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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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12월 31일과 다음 해 1월 1일이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 아침이라고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참 이상하다 생각하곤 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새로운 느낌은 해뜬 후 아침이슬처럼 금새 사라져 버리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과는 모순되게도 저 역시 연말연시엔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살아갈 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봤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합니다. 까페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에 끊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들의 인생은 어떨까 궁금해 하고, 텔레비전에서 보는 유명인들의 삶을 동경하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부분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의 나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그 삶에 호기심이 생긴다 해도 선뜻 그 길로 발걸음을 내딛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책임들에 묶여 있으니까요. 뭐라도 해보려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이내 마음을 접곤 합니다. 

어짜피 바꿀 수도 없는 인생인데 다른 인생을 상상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생 혹은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는 건 일단 재미있습니다. 또 과거의 선택들은 바꿀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내가 마주치게 될 상황에서 하게 될 선택에는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와 유익은 소설을 읽으면서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는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테니까요.”(33쪽)

 

 



언젠가는 이런 편지를 남기고 충동적으로 일상을 떠나는 상상을 해 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제 상상을 실현하는 모델입니다. 그는 평범한 어느 아침에 만난 한 외국여인, 그로 인해 찾아가게 된 책방, 책방에서 만나게 된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일상이라는 강력한 중력에서 빠져나와 책을 쓴 이의 인생을 찾아 나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한 문장은 소설 속 주인공뿐만 아니라 제 마음에도 파장을 일으킵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수만 가지 선택지를 생각하면 내가 경험한 부분은 잠재적인 내 존재에 정말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항공권 구매 사이트를 열고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비행기표를 검색해 봅니다.

‘그래서 저도 비행기를 타고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 리스본으로 떠났습니다.’라고 이 글을 급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전 그레고리우스처럼 훌쩍 떠날 수는 없습니다. 주인공은 이혼을 해서 가족도 없고, 오랜 시간 돈도 쓸 줄 몰라서 여유자금도 많았답니다. 그렇지 않은 전 책을 읽으며 그레고리우스의 충동적 여행에만 동승해 봅니다.

처음엔 책 한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문장 하나에 매력을 느껴 일상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책을 쓴 이를 만나서 그가 저자와 저자의 삶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주인공이 책의 저자의 삶을 추적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인물들 하나하나에 제 자신을 이입해보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은 기본적으로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데우 프라두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을 찾아가며 그에 대해 알아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레고리우스 본인의 인생 여정도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지점들에서 소설은 독자를 자신,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이끕니다.

소설 속에 소개되는 또 하나의 책을 쓴 저자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 어린 시절부터 무척 똑똑했던 사람. 포르투갈 독재 시대 판사로 일했던 아버지 아래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의사가 된 그. 그가 마주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 독재에 충실히 부역하던 경찰 간부 멩지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그의 앞에 놓였을 때 그가 했던 고민과 선택. 그로 인해 펼쳐지는 복잡한 삶...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249)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252)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소설은 저를 다양한 삶의 상황으로 이끕니다. 소설에는 중심 인물인 프라두의 인생 뿐만 아니라 그와 엮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준 오빠에게 강박적인 사랑을 품고 살아온 여동생 아드리아나, 아마데우 프라두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만났던 동료들, 그의 오랜 친구, 그가 사랑했던 여인...

소설을 읽어가면서 만나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인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을 알고나면 모두가 특별한 인생입니다. 스쳐가는 모든 인생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등장 인물 하나 하나의 삶과 선택의 순간들에 나를 이입해 생각하기에 딱 좋은 소설입니다. 이런 상상들은 아마도 제가 살아갈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와 더해 이 소설의 매력이 또 있습니다.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소설 속에서 창조된 작가의 인상깊은 문장들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쓴 페터 비에리는 소설 속에서 제3의 작가가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소위 문장 수집가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책이 될 것입니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55쪽)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77쪽)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116쪽)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141쪽)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218쪽)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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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570쪽)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는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테니까요."(33쪽) - P33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249)
- P249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252) - P252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55쪽)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77쪽)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116쪽)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141쪽)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218쪽)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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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570쪽) - P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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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보급판)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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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마다 1명, 하루 38명, 한해에 1만4천명이 자살하는 나라” 얼마 전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가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언급한 이 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연말이다 크리스마스다 한창 들뜬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속수무책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서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없다

신영전 교수는 2018년 대한민국 자살 사망자 수를 보면서 “자살은 없다”고 썼습니다. 신 교수는 칼럼에서 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가해자들을 하나하나 지목합니다. 타인의 자살을 함부로 비난하는 자들, 대책 없는 정부, “대학을 못 가면 살 가치가 없다”고 내뱉은 부모와 선생들, 민생을 외면한 국회의원들, 악한 검찰과 기업인들, 돈과 권력의 편이 된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가해자라고 했습니다.

신 교수는 “그런 정치인, 기업인,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자, 이런 폭력에 “나는 몰랐다”고 말하는 자, 쉽게 잊는 자, 무엇보다 아파하지 않는 자가 공범”이라고도 썼습니다. 속절없이 살기를 그만두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기는 커녕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저 역시 공범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다 자살률 1위 사회를 다시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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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개인의 문제로만 보던 자살을 사회적 관점에서 분석한 에밀 뒤르켐의 오래된 책 <자살론>을 읽고 우리 사회의 자살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에밀 뒤르켐이 오래 전 분석했듯이 자살률은 사회 집단의 특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고유한 것이기에 우리 나라가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드물게 2위)의 오명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자살론>에서 에밀 뒤르켐은 다양한 통계자료를 활용해 자살의 주된 원인이 정신질환에 있지도, 생물학적 요인에 있지도, 환경적 요인에 있지도 않다고 설득력 있게 논증했습니다. 사회적 환경과 자살이 연관되어 있음을 증명하면서 “사회적 묵인과 무관심”이 취약한 조건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을 자살로 이끈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자살의 유형을 크게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성 자살(아노미: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상태)로 구분하고 자살을 억제하는 데 사회공동체의 통합 혹은 결속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가족, 종교, 정치 사회의 통합 정도에 따라 자살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살률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개인이 사소한 충격 상황에서도 자살하는 것은 사회가 그를 자살의 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269쪽)


자살의 근본적 원인

아주 오래된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는 언급들을 보며 놀랍니다. 에밀 뒤르켐은 그 당시에도 산업사회에서는 “위기 상태와 아노미가 항구적이며 정상적”이라고 했습니다. <자살론>이 쓰였을 시대보다 시간이 갈수록 이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에밀 뒤르켐의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상층에서부터 하층에 이르기까지 탐욕은 끝을 모르고 일어난다. 욕구 수준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보다 훨씬 멀리 있기 때문에 안정을 찾을 수 없다. 그와 같이 흥분된 상상에 비하면 현실은 너무나 무가치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현실을 버리게 된다. (중략) 새로운 것과 참신한 쾌락과 알려지지 않은 감각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지만, 이런 것들도 일단 익숙해지면 매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사소한 실패도 견디지 못하게 된다.”(330쪽)


에밀 뒤르켐이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개인들이 점점 더 고립되고, 타인과의 유대가 약해지거나 끊어지고, 사회 조직망 혹은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살이 줄어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국민들을 자살로 이끄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힘으로 이어진다고 뒤르켐은 역설합니다.

<자살론>에선 사람들이 자살하는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1)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성격, 2)개인들이 결합하는 방식, 즉 사회 조직의 성격, 3)사회의 해부학적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집단생활의 기능에 혼란을 일으키는 국가 위기나 경제 위기 같은 일시적 사건들. 우리 사회의 자살률이 여러 해 동안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건 사회의 ‘공존성’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자살에서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뒤르켐은 사회구성원들이 유대감을 가질 때, 사회가 통합되고 결속될 때 자살이 줄어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뒤르켐 당시엔 종교도, 정치도, 가족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들을 구하기 위해 정부에 사회안전망을 요구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는 개인들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확장되고 비대해졌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개인들은 그들을 규제하고 고정시키고 조직할 중심적인 힘을 찾지 못한 채 상호 간의 관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수많은 액체의 미립자들처럼 굴러다닌다.”(526쪽)


뒤르켐은 사회의 결속을 위해 직업 집단을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각 직업 집단에 속한 노동조합이라 할 수 있을텐데 우리 노동 현실을 보면 이 또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에밀 뒤르켐이 제안했던 직업 집단의 요건을 적어보니 이런 공동체가 인간사회에서 가능한 것인지 마음만 더 무거워집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요...?

- 에밀 뒤르켐이 제안한 직업 집단의 요건
1)법적, 정치적으로 공공 생활의 한 기관으로 인정되고 사회적 역할을 하도록 구성될 것
2)보험, 구호, 연금 등 정부가 실패하는 부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
3)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임무를 맡을 것

“지나친 욕망이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조합은 각 부분에 공정하게 돌아가야 할 몫을 결정해 줄 수 있다. 조합은 성원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불가피한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고 명령을 내릴 권위를 가질 것이다. 강자에게 힘의 사용을 절제하게 하고, 약자에게 끊임없는 저항을 자제하게 하면서 양자 모두에게 상호간의 의무와 전체의 이익을 상기시키고 경우에 따라 생산을 억제하여 병적인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규제함으로써 조합은 욕망을 조정하고 나아가서 그 한계를 정해 줄 수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류의 도덕적 규율을 확립할 수 있다. 이것이 없이는 모든 과학적 발견과 경제적 진보는 오직 불만만 낳을 뿐이다.”(516쪽)


"개인이 사소한 충격 상황에서도 자살하는 것은 사회가 그를 자살의 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269쪽)
- P269

"상층에서부터 하층에 이르기까지 탐욕은 끝을 모르고 일어난다. 욕구 수준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보다 훨씬 멀리 있기 때문에 안정을 찾을 수 없다. 그와 같이 흥분된 상상에 비하면 현실은 너무나 무가치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현실을 버리게 된다. (중략) 새로운 것과 참신한 쾌락과 알려지지 않은 감각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지만, 이런 것들도 일단 익숙해지면 매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사소한 실패도 견디지 못하게 된다."(330쪽) - P330

"국가는 개인들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확장되고 비대해졌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개인들은 그들을 규제하고 고정시키고 조직할 중심적인 힘을 찾지 못한 채 상호 간의 관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수많은 액체의 미립자들처럼 굴러다닌다."(526쪽)
- P526

"지나친 욕망이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조합은 각 부분에 공정하게 돌아가야 할 몫을 결정해 줄 수 있다. 조합은 성원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불가피한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고 명령을 내릴 권위를 가질 것이다. 강자에게 힘의 사용을 절제하게 하고, 약자에게 끊임없는 저항을 자제하게 하면서 양자 모두에게 상호간의 의무와 전체의 이익을 상기시키고 경우에 따라 생산을 억제하여 병적인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규제함으로써 조합은 욕망을 조정하고 나아가서 그 한계를 정해 줄 수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류의 도덕적 규율을 확립할 수 있다. 이것이 없이는 모든 과학적 발견과 경제적 진보는 오직 불만만 낳을 뿐이다."(516쪽)
-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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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박노해 사진에세이 1
박노해 지음, 안선재(안토니 수사) 옮김 / 느린걸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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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곁에 두고 읽는 묵상집, 박노해 사진에세이 <하루>

연말연시. 또 한 해가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나날들을 돌아볼 것이고 또 새롭게 맞이할 한 해를 계획할 것입니다. 연말이 되니 저 역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달력, 다이어리, 스마트폰 메모 등을 찾아보며 지나온 한 달 한 달, 하루 하루를 추적해 봅니다. 자연스레 ‘하루’의 의미도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 참으로 평범하고도 경이롭고, 흔하고도 무서운 말이 ‘하루’다. 하나의 물방울이 온 하늘을 담고 있듯 하루 속에는 영원이 깃들어 있는 일일일생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하루는 저 영원과 신성이 끊어진 물질에 잠긴 시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시대는 돈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돈이 있어도 삶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로부터 인생은 늘 ‘준비’에서 또 다른 ‘준비’로 흘러가고, 지금 여기의 삶은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는 고통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현대의 인간만이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오늘’뿐인 삶을 유보시킨다. 그러나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12쪽)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유랑하며 찍은 사진에 짧은 시를 곁들여 엮은 사진에세이 <하루>의 서문에서 시인 박노해는 ‘하루’를 위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의 멋스러우면서도 정확한 표현에 공감하며 나에게 “평범하고도 경이롭고, 흔하고도 무서운’ 하루들은 어떠했었나 돌아봅니다.

항암치료약을 허리춤에 차고서 일터로 향했던 하루들. 더이상 견디기 힘들어 일터로 향하는 걸음을 몇 달간 멈추고 치료받던 하루들. 이 멈춤으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보냈던 하루들. 감사하게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 일터로 다시 돌아가 지내온 하루들. 암이 재발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하루들. 이런 ‘하루’들이 모여서 나의 한 해가 되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과 그로 인해 느낀 삶의 덧없음이 하루를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말했던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염려하며 오늘 뿐인 삶을 유보하며 사는’ 삶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습니다. 암을 진단받고 수술받고 치료받는 동안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는 선물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늘 주어지는 것 같은 하루였지만 다른 ‘하루’였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일상을 접고 세계여행을 떠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루를 완전히 다르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일터와 집, 병원을 오가며 평범하고 흔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만 그 하루에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 일상에서 지나치던 풍경,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들에 경이로움이 덧입혀졌을 뿐입니다.

에디오피아, 버마, 수단,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티베트, 볼리비아, 페루, 중국, 라오스. 박노해 시인이 둘러보며 사진을 담아 온 지역들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일상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도 ‘하루’가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그 하루의 순간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아 일상에 깃든 감동을 전합니다.

아침마다 꽃을 꺾어 불전에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는 버마의 소녀, 씨감자를 심는 인도네시아의 농부들, 지하 갱도에서 일하고 나와 햇빛에 눈이 부신 볼리비아의 광부, 한자리에 모여 앉아 우애와 환대를 전수하는 파키스탄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 햇살과 바람이 젤 좋을 땐 길게 놀자며 참교육을 하는 선생님, 황야에 서서 책 한 권에 깊이 빠져 있는 한 소녀.

너무나도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의 여러 하루를 마주하며 내 하루의 순간들을 비춰봅니다. 참 바쁘고 분주한 하루, 그럼에도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 하루, 함께 있는 동료의 얼굴 표정도 기억나지 않는 하루.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지만 왠지 나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하루들. 책 <하루>를 보다 박노해 시인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가 나 자신의 하루를 살지 않는다면 무언가 내 하루를 앗아가고 만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간다. 모든 악의 세력이 지배하려는 최후의 목적지, 세계화된 자본권력이 점령하고자 하는 최후의 영토는 나 개인들의 내면과 하루 일과가 아닌가.”(12쪽)


이렇게 빼앗긴 하루를 살아가다보면 껍데기만 남아버릴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이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는 전혀 새로운 하루임을 박노해 시인이 담아온 사진과 글귀들을 보며 다시 확인합니다. 하루를 진정한 나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버리는 세상에서 알맹이로 살아가지 못하리라는 점도 기억합니다.


삶에 가득한 불안을 채우려고 자극적인 것을 찾고, 소비하고, 소유하려고 하기보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뿐입니다. 이럴 때 박노해 시인이 모아온 사진과 글을 보면 힘이 납니다. 그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듯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감동할 줄 아는 힘과 감사하는 힘 그리고 감내하는 힘”이.


오늘도 가방에 넣어 온 박노해 사진에세이 <하루>를 꺼내들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선물로 주어진 하루의 삶을 마음껏 누렸는가? 하루를 남김없이 살았는가? 진정한 나로 하루를 살았는가? 연말연시 뿐만 아니라 매일 같이 곁에 두고 하루를 곱씹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묵상집입니다. 우리는 긴 호흡으로 삶을 살아내야 하니까요.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오크 나무를 심었어요.

스무 살이 되면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자고.

100년이 지나면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300년이 흐르면 푸른 숲을 이룰 거라고.

그러니 대를 이어 가꿔가도록 잘 일러야 한다구요.”

소중한 것들은 그만큼의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법.

우리 삶은 긴 호흡으로 푸른 나무를 심어가는 것.”


- 나무를 키우는 소녀(85쪽) 중에서 -


‘하루’. 참으로 평범하고도 경이롭고, 흔하고도 무서운 말이 ‘하루’다. 하나의 물방울이 온 하늘을 담고 있듯 하루 속에는 영원이 깃들어 있는 일일일생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하루는 저 영원과 신성이 끊어진 물질에 잠긴 시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시대는 돈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돈이 있어도 삶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로부터 인생은 늘 ‘준비’에서 또 다른 ‘준비’로 흘러가고, 지금 여기의 삶은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는 고통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현대의 인간만이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오늘’뿐인 삶을 유보시킨다. 그러나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12쪽) - P12

내가 나 자신의 하루를 살지 않는다면 무언가 내 하루를 앗아가고 만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간다. 모든 악의 세력이 지배하려는 최후의 목적지, 세계화된 자본권력이 점령하고자 하는 최후의 영토는 나 개인들의 내면과 하루 일과가 아닌가."(12쪽) - P12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오크 나무를 심었어요.

스무 살이 되면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자고.

100년이 지나면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300년이 흐르면 푸른 숲을 이룰 거라고.

그러니 대를 이어 가꿔가도록 잘 일러야 한다구요."

소중한 것들은 그만큼의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법.

우리 삶은 긴 호흡으로 푸른 나무를 심어가는 것."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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