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오피아, 버마, 수단,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티베트, 볼리비아, 페루, 중국, 라오스. 박노해 시인이 둘러보며 사진을 담아 온 지역들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일상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도 ‘하루’가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그 하루의 순간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아 일상에 깃든 감동을 전합니다.
아침마다 꽃을 꺾어 불전에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는 버마의 소녀, 씨감자를 심는 인도네시아의 농부들, 지하 갱도에서 일하고 나와 햇빛에 눈이 부신 볼리비아의 광부, 한자리에 모여 앉아 우애와 환대를 전수하는 파키스탄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 햇살과 바람이 젤 좋을 땐 길게 놀자며 참교육을 하는 선생님, 황야에 서서 책 한 권에 깊이 빠져 있는 한 소녀.
너무나도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의 여러 하루를 마주하며 내 하루의 순간들을 비춰봅니다. 참 바쁘고 분주한 하루, 그럼에도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 하루, 함께 있는 동료의 얼굴 표정도 기억나지 않는 하루.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지만 왠지 나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하루들. 책 <하루>를 보다 박노해 시인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가 나 자신의 하루를 살지 않는다면 무언가 내 하루를 앗아가고 만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간다. 모든 악의 세력이 지배하려는 최후의 목적지, 세계화된 자본권력이 점령하고자 하는 최후의 영토는 나 개인들의 내면과 하루 일과가 아닌가.”(12쪽)
이렇게 빼앗긴 하루를 살아가다보면 껍데기만 남아버릴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이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는 전혀 새로운 하루임을 박노해 시인이 담아온 사진과 글귀들을 보며 다시 확인합니다. 하루를 진정한 나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버리는 세상에서 알맹이로 살아가지 못하리라는 점도 기억합니다.
삶에 가득한 불안을 채우려고 자극적인 것을 찾고, 소비하고, 소유하려고 하기보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뿐입니다. 이럴 때 박노해 시인이 모아온 사진과 글을 보면 힘이 납니다. 그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듯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감동할 줄 아는 힘과 감사하는 힘 그리고 감내하는 힘”이.
오늘도 가방에 넣어 온 박노해 사진에세이 <하루>를 꺼내들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선물로 주어진 하루의 삶을 마음껏 누렸는가? 하루를 남김없이 살았는가? 진정한 나로 하루를 살았는가? 연말연시 뿐만 아니라 매일 같이 곁에 두고 하루를 곱씹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묵상집입니다. 우리는 긴 호흡으로 삶을 살아내야 하니까요.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오크 나무를 심었어요.
스무 살이 되면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자고.
100년이 지나면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300년이 흐르면 푸른 숲을 이룰 거라고.
그러니 대를 이어 가꿔가도록 잘 일러야 한다구요.”
소중한 것들은 그만큼의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법.
우리 삶은 긴 호흡으로 푸른 나무를 심어가는 것.”
- 나무를 키우는 소녀(85쪽)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