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없어 그림책은 내 친구 68
키티 크라우더 지음, 이주희 옮김 / 논장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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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네이버 카페 '제이 그림책 포럼'. 이곳에는 다양한 책읽기 소모임들이 있답니다. 그중 <유럽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북클럽 '유그작 사부작'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달의 작가가 이 책에 두 번째로 소개된 '키티 크라우더' 작가였어요.




키티 크라우더 작가는 '상상을 만드는 질문'이란 주제로 인터뷰를 이어갔는데, <유럽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 소개된 키티 크라우더 작가의 작품들을 보다가 <Moi et Rien>와 <La visite de petite mort>, <Le petit homme et dieu>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아서 무척 아쉬워 했답니다. 

2016년 출간된 <유럽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안에서 원서로 소개된 <메두사 엄마>나 <포카와 민> 시리즈가 그사이 국내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터라 다른 책도 언젠가 번역되겠지 기대감을 갖던 차에 '유그작 사부작' 클럽장 슬책님의 발빠른 정보력 덕분에 논장에서 <Moi en Rien>이 나오게 된 걸 알게 됐고 운이 좋게 서평단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슬책님, 논장 출판사 관계자님 감사해요!)





뒤표지를 보시면 파란 꽃이 피어 있고 나무 사이로 눈사람 같은 캐릭터가 하나 보입니다. 독자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글이 적혀 있어요. 


"다른 아이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없어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없어’랑 '함께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원서에 등장하는 Rien(없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아무것도, 무'라고 나옵니다. 

작가 키티 크라우더는 <나와 없어> 이야기를 쓰고 이틀 만에 스케치를 했다고 해요. 처음에는 무를 의미하는 ‘Rien’으로 말장난을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유럽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안의 인터뷰에서 말한것 처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주인공들이었고 그렇게 이 그림책이 만들어 졌데요.

아이들과 까꿍 놀이를 할 때, '없다'와 '보이지 않다'가 같은 의미로 쓰이잖아요. <나와 없어> 속에 '없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처음 <나와 없어> 앞표지 그림을 봤을 땐 사람 혼자 덩그러니 있다고 생각했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주인공 ‘나’가 오버핏 자켓을 걸치고 어색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한 후에 다시 표지를 보니 저도 주인공 나( 라일라)처럼 ‘없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키티 크라우더 작가에게 형이 자살한 친구가 있었데요. 형의 죽음으로 공허함을 느끼는 친구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고 해요. 2015년 작 <La visite de petite mort>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입장을 다루었다면, 2000년에 출간된 <Moi et Rien(나와 없어)>는 죽음의 결과적 측면,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의 삶과 감정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나와 없어>에서는 엄마를 떠나보낸 아이와 아빠 모두 큰 아픔을 겪습니다. 특히 아이는 아빠와의 소통 단절과 엄마의 부재로 더욱 더 괴로워합니다. 외로움에 아이는 아버지의 재킷을 입고 아버지의 온기를 느끼려 하고,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맑은 날에도 장화를 꺼내 신어요. 표지 그림의 오버핏 자켓이 다 사연이 있었던 거였어요.


"왜 나는 엄마와 함께

하늘나라로 떠나지 않았을까요?"


가족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남은 이들의 마음이 저 문장에 다 담겨 있습니다. 아이 뿐만 아니라 아빠 역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궜습니다. 근근이 일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아이의 외로움, 상실감은 전혀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야기 속 '창살이 쳐져 있는 버려진 정원'은 누구의 접근도, 위로도 통하지 않는 상실감에 빠진 아이와 아버지의 마음 같습니다.



이 아픔을과 상실감을 치료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간 이와 함께 한 추억입니다. 아빠가 엄마와의 추억들과 물건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때, 아이는 헛간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히말라야푸른양귀비’ 꽃씨를 발견합니다. 엄마가 히말라야에 간 모습을 상상하는 라일라의 모습에서 영혼이 되어 가는 저 너머의 세상을 떠올렸던 건 저 뿐이었을까요? 


그리고 무력했던 ‘나’는 혼자서 ‘없어’가 남긴 말,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를 버려진 정원에 '히말라야푸른양귀비' 꽃씨를 심으며 실현시킵니다. 


황량했던 정원은 엄마가 좋아하던 히말라야푸른양귀비꽃으로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엄마와의 추억이 상실의 아픔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게 하는 에너지가 된 것이죠. 아이에게도, 아빠에게도 말입니다. 히말라야푸른양귀비꽃은 아빠와 나의 소통 회복과 엄마 영혼의 귀환이었습니다.



색을 다채롭게 쓰기로 유명한 키티 크라우더 작가가 이 책 <나와 없어>에는 유난히 흰색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색을 넣을 수 있는 '흰 색'이 쓰인 이유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러다 ‘없어’와 ‘흰색’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부재는 백지처럼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떠나간 이를 기리며 떠올리다보면 삶 속에서 그 빈 공간도 다시 채워지잖아요. 빈 정원에 파란꽃을 피어난것 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흰색이 다시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워질 가능성! 그렇게 삶이 채워지고 이어지는 것을 키티 크라우더 작가가 색을 통해 표현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와 없어>에 사용된 글꼴이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수동 타자기에서 찍혀 나온듯한 글자체인데, 덤덤하게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말하는 ‘나’의 이야기와 저 글자체가 참 잘 어울린답니다.



남은 자들의 아픔과 상실, 회복 과정이 아이의 시점에서 담백하게 녹아있는 <나와 없어>. 

담은 이야기도, 그림도… 엄마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확인할 때의 놀라움까지..!!

20년이 훨쩍 넘은 작품이지만 (2000년작, 한글 번역판이 2022년) ‘역시 키티 크라우더 작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책이었어요.


키티 크라우더 작가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은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본 서평글은 논장 출판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모집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해당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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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정화진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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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상상력과 그녀만의 그림 스타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그녀의 작품에는 남과 달라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자기 자리를 찾고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는 구조가 작품 속에 자주 반복됩니다. 2022년 미디어창비에서 출간된 이 책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에서도 이런 특징을 찾아볼 수 있어요.



2018년 프랑스에서 <Le Fabuleux Desastre D'Harold Snipperpott> (출판사 Albin Michel)이라는 제목으로, 2019년에 미국에서 <Harold Snipperpot's Best Disaster Ever> 영어판(출판사 Harper Collins)이, 2022년 올해에 미디어창비 출판사에서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국내 에 출간되었습니다. 

'Fabuleux Desastre(엄청난 재앙)’이라는 프랑스어 제목이나, 'Best Disaster Ever(역대급, 최고의 재난, 참사)'라는 제목이 국내에서는 ‘뒤죽박죽'과 '대소동’으로 살짝 순화되어 표현되었고 해롤드 스니퍼팟이라는 주인공의 긴 이름이 빠지고 '생일 파티'라는 단어가 들어갔어요.


코끼리의 귀를 잡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아이 보이시죠? 이 친구가 바로 주인공 해럴드 필립 스니퍼팟입니다. 그의 오른쪽 신발 한 짝은 이미 날아갔고, 거대한 코끼리는 긴박하게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습니다. 표지 그림만 봐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작가’를 단번에 떠올릴 수 있는데 구아슈, 오일, 왁스 연필, 그리고 콜라주를 이용해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해요.




단정한 2대 8 가르마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해럴드. 얌전할 것 같은 이 아이에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진짜’ 생일 파티를 해보는 것이에요. 7살 생일을 앞두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파티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부모님이 파티를 너무 싫어해서”입니다. 마음이 메말라있는 엄마와 아빠는 서로 안아 주지도 않고, 웃지도 않아요. 서로 대화도 거의 하지 않는 해럴드의 부모. 그래서일까요? 부모와 함께 있는 아늑한 공간이 되어야하는 해럴드의 집은 톤다운된 그림 때문인지, 모든것이 각잡혀 정돈된 물건들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어두워 보입니다. 홀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끄는 해럴드의 모습이 많이 외로워 보여요. 



7살 아이가 사는 집인데 둘러보면 '아이 키우는 집이 맞아??' 라는 질문을 절로 떠올리게 됩니다. 그 흔한 장난감 자동차도 없어요. 아이가 그린 그림을 벽에 붙여놓거나 한글이나 숫자 벽보 같은게 붙어 있는게 당연한데, 책 한권, 장난감 하나 없이 어른들의 취향에 맞게 우아하고 고상하게 정리정돈되어 있습니다.인테리어 잡지 속 모델들처럼 양복 차려입은 아빠와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투피스를 착장한 엄마,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소파에 기대 앉은 해럴드의 모습이 해럴드 가족의 일상 풍경이에요.

이번에도 생일 파티를 못할까봐 우울해 하는 해럴드를 위해 엄마는 동네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폰죠' 아저씨를 찾게 되고 해럴드의 첫 번째 생일 파티를 부탁하게 됩니다.


폰죠아저씨는 엄마와의 통화에서 '파티에 초대할 어린이 친구는 없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생일 파티'를 만들어 주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친구 없는 생일 파티가 가능하긴 할까?'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해럴드에게는 생애 처음 해보는 생일 파티나까 파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불안감이 엄습하죠. 엄마는 이때 '대소동'의 전조를 눈치 챘어야 했는데!!!

해럴드의 일곱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생일 파티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폰죠 아저씨가 해결책으로 내세운 생일파티에 과연 누가 왔길래 해럴드 가족이 저런 표정으로 손님을 맞고 있는걸까요? 해럴드는 진정으로 자신의 생일 파티를 즐길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생일 파티에 벌어진 사건을 1인칭으로 실감나게 들려주는 해럴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이도, 어른도 이야기 속에 빠져들고 맙니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작가가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 속에 담아낸 파리의 풍경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특히 이야기의 하일라이트 장면에 등장하는 뤽상부르 공원(Luxembourg Gardens)과 연못 은 폴더 페이지로 표현되어 보는 즐거움을 더하고 있어요. 저처럼 파리를 배경으로 한 그림책 모는 그림책 덕후분들이 계시다면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도 꼭 소장하시기 바랍니다. 뤽상부르 공원과 함께 에펠탑이 잠시 등장한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또 다른 작품인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이 떠오릅니다. 아빠의 부재로 실의에 빠진 아이가 비오는 숲을 누비며 변화했듯,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은 생일 파티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을 겪으면서 변하는 아이와 가족의 모습이 겹쳐져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굳어 있던 해럴드의 표정과 모습은 이야기 끝에 가서야 7살 아이답게 보이죠. 친구 없이 생일 파티를 열어야 했던 해럴드 필립 스니퍼팟은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을 통해 진짜 원했던 걸 찾게 되고 해럴드의 엄마 아빠 역시 생일 파티를 통해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변화된 가족의 모습이 얼마나 훈훈한지 한참을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까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작가의 이런 위트!! 애정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건 비싸고 커다란 물질적인 선물이 아니라 '엄마 아빠의 사랑과 애정표현'이라는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최악의 생일이 최고의 날로 변하는 가족!'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작가의 마법같은 그림과 이야기를 여러분도 꼭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미디어창비에서 <뒤죽박죽 생일 파티 대소동> 활동지도 함께 보내주셔서, 방학 때 '뭘 해야하나' 고민하는 부모님들의 시름을 덜어주시네요!! 활동지 뒷면은 면지 무늬를 담고 있어서 더 좋으네요. (이런 디테일은 그림책 덕후들이 더더욱 애정하지요.)

면지 무늬도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데, 아이들과 함께 어떤 장면에서 나왔을까 찾아보는 것도 재미날 것 같아요. ^^ 꼭 함께 찾아보세요~


* 본 서평글은 미디어 창비에서 진행한 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해당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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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비움 J 롤리팝 - 그림책 잡지 라키비움 J
전은주 외 지음 / 제이포럼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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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찐 독자라면, 무조건!! 구입해야하는 Must have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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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개정판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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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 봄볕을 받아 만물이 '열심히' 움트는계절에 나는 이 책을 마주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는 학창시절 책상 위 한 편에 붙여 놓고 가슴에 새기던 좌우명의 기본 수식어였다. 열과 성을 다해 힘을 기울여 부지런히 무엇을 해내는 것,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내게 이 책의 제목은 약간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무엇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물음표가 떠올랐다.

작가 이름을 확인하고는 그 궁금증은 더해졌다. 그림책 작가이자 에세이스트로 공저를 포함해 생전에 17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사노 요코가, 첫 아이의 백일 이후부터 치열하게 일하며 살아온 그녀가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니!! 이건 분명 작가가 의도한 '반어'일거라 어설픈 추측을 하며 이 책을 펼쳤다.



띠지에 담긴 홍보문구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 저자 사노 요코의 쓰라린 일상에 바르는 빨간약 같은 이야기들'를 뒤로하고, 간략한 작가 소개가 담긴 책날개를 넘겨 판권 면을 보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022년 4월에 출간된 화이트와 민트색 표지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가 개정판이라는 점과 일본 원서 <がんばりません>은 1985년에 출간됐다는 점이다.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노 요코가 중년인 47살 때 남긴 에세이가 2016년에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을 만났고, 2022년 4월에 산뜻하게 표지를 바꾸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2016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된 초판 책과 2022년 개정된 책을 비교해보면 책의 얼굴격인 표지는 완전히 다르다. 표지 색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기존 책의 내지에 있던 일러스트가 표지 밖으로 나왔다. 판형도 세로로 조금더 길어지고 가로 사이즈가 줄어서 들고 다니며 읽기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 페이지수도 364쪽이었던 것이 개정판은 324쪽으로 줄었다. 내지의 일러스트 페이지들이 빠지면서 가볍고 슬림해졌다.


총 8개의 챕터로 나눠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에는 사노 요코의 삶과 추억이 담겨 있다. 그녀가 남긴 생생한 문장은 그녀가 경험했을 그 순간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고, 일본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사노 요코를 평범한 옆집 언니, 동네 아줌마처럼 느끼게 만든다. 철학적인 문제를 유쾌하고 간결하게 그림책에 녹여낸 사노 요코 답게 에세이집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에도 무덤덤하고 가볍게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그녀가 견딘 묵직한 삶의 무게가 담겨 있다.


모르는 사람은, 그림책 작가는 프릴 달린 분홍색 옷을 입고, 투명하다시피 한 먹을 것을 드시며, 남의 험담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다. 실물인 내가 와하하하 하고 입을 쩍 벌리며 웃고, 글쎄 누가 그렇대! 하는 얘기에 혹하여 끼어드는 모습을 보고, 그림책 작가와 그림책 모두에 환멸을 느꼈다는 착한 사람을 마주칠 때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누가 ‘꿈이 있는 멋진 일을 하고 계시군요.’ 하고 말하면 좀 거북하다.

실상의 나는 흔하디흔한, 지나치리만치 산문적인 인간이며, 이 세상의 괴로운 일들을 충분히 맛보면서 그 현실을 기꺼이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것 없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생활을, 별것 아닌 희로애락에 울고 웃으며, 생각해 보면 창피한 일 쪽을 더 많이 하면서 넉살 좋게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그런 나를 토해 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소곤소곤.

― p. 317, '후기' 중에서


꾸밈없이 자신을 토해낸 사노 요코의 넋두리들이 바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속 이야기들이다. 전쟁으로 인한 빈곤하고 암울한 난민 살이, 두 살 터울 오빠와 아버지의 죽음, 이혼, 홀로 키우는 아이 이야기 등 그녀의 개인사가 책 속에 촘촘히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둡지 않다. 그녀의 남다른 인생관과 자유분방함은 톡소는 사이다처럼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사노 요코가 ‘엄마’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에 특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한공감했다. 


여자가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버리면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남자는 아버지가 되어도 아버지 이외의 것을 계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여자라 남자의 그런 재주가 신기하다. 세상은 무책임하게도 어머니도 인간이며 여자라고 꼬드기지만, 아무리 꼬드김을 당해도 어머니는 어머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이기를 계속한다.

― p.252, .어머니란 평생 하는 여가 생활이다' 중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렵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어렵다.'고 말한 사노 요코는 무르익은 중년의 나이에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독자들과 공유했다. 딸로서, 사회인으로서, 또 어머니로서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왜 그녀가 제목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로 정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과 맥락이 이어진다. 어려서는 부모의 안색을, 결혼하고 나서는 상대의 기분에 맞췄고 애 낳고는 머리 가꿀 새도 없이 어머니 노릇을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해 왔으니, 이제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는 그녀의 다부진 다짐이 아니었을까? 이제 더 이상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남을 위해 나를 열심히 맞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일 수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고 유쾌하며 피식 웃어버리게 되는 부담없는 사노 요코의 에세이집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특유의 매력과 유쾌함이 우리를 포근하게 다독이는 따스한 책이다.


*본 서평글은 을유문화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해당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미지가 조금 깨지는 즐거움이다.

혹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마주치는 즐거움이다. - P228

시시껄렁한 남편한테 20년이나 혹사당하며 부업인 재봉틀을 밟고 있는 분짱, 너의 평생의 믿음직한 아군은 남편이 아니고 재봉틀도 아니야. 이불이야. 매일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맹렬 할배한테 괴롭힘 당하는 미치코, 네 편은 체중 75킬로미터에 신장 170센티의 아들이 아니야. 비행 소년이 되어 버린 아들을 사랑하다가 기진맥진한 노부코, 이불만 있으면 내일 다시 일어날 수 있다니까. 이불 뒤집어쓰고 힘내자.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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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베멀먼즈 일러스트레이터 4
퀜틴 블레이크.로리 브리튼 뉴웰 지음, 황유진 옮김 / 북극곰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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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고 있는 더 일러스트레이터(The Illustrator) 시리즈 네 번째 책, “루드비히 베멀먼즈”. 상큼한 민트색 앞표지 속에는 그의 대표작이자 80년 넘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마들린느 시리즈 속 한 장면이 그려져 있고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사인이 각인되어 있어요. 표지를 넘기면 아이보리빛 색지에 펜과 잉크로 그린 스케치가 담겨있고 속표지를 넘기면 차례가 나옵니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 제법 두꺼운 112페이지 양장본 책 속에는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삶과 그의 일러스트 106컷이 가득 담겨 있어요.




상큼한 민트색 앞표지 속에는 그의 대표작이자 80년 넘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마들린느 시리즈 속 한 장면이 그려져 있고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사인이 각인되어 있어요. 표지를 넘기면 아이보리빛 색지에 펜과 잉크로 그린 스케치가 담겨있고 속표지를 넘기면 차례가 나옵니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 제법 두꺼운 112페이지 양장본 책 속에는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삶과 그의 일러스트 106컷이 가득 담겨 있어요.


세계적인 거장 퀜틴 블레이크가 '더 일러스트레이터' 시리즈 자문을 맡았고 Wellcom Trust의 수석 큐레이션으로 활동 중인 로리 브리튼 뉴웰(Laurie Britton Newell)이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집대성하여 이 책 한 권에 담았습니다. 글을 쓰고 자료를 모은 로리 브리튼 뉴웰은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 미술, 공예, 디자인 전반에 걸쳐 작업하는 큐레이터래요. 예술과 과학 분야를 넘나들며 일러스트레이션, 공예, 그림, 창의적 협력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특기가 이 책 속에 빛을 바랍니다.




부유한 양조업자의 딸인 독일인 어머니 프란치스카와 호텔 가문의 일원이자 화가였던 벨기에인 아버지 램버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898년 이탈리아 티롤 지방의 메란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호텔이 위치한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 지방에서 자랐다고 해요. 베멀먼즈는 부모님 얼굴은 거의 못 보고 프랑스인 가정교사 손에 자라났는데, 가정교사 덕분에 프랑스어를 모어로 배웠고 그를 통해 접한 프랑스문화에 대한 경험은 마드린느가 탄생하게끔 하는 중요 모티브가 되죠.

그가 왜 호텔리어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는지, 유럽인이었던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던 이유도 소상이 담겨 있지만 제가 가장 집중해서 읽었던 부분은 역시 그의 역작 ‘마들린느’가 탄생하게 된 부분이었어요.

뉴욕에 있던 그가 어찌해서 ‘파리’를 배경으로 한 마들린느를 탄생시켰는지, 마들린느라는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작품 속에 담긴 기법적 특징까지... 그림책 덕후라면 알고 싶었던 작품 뒤 이야기와 일러스트 스케치들이 소상히 담겨 있어 읽는 재미, 보는 재미를 제대로 누릴 수 있었습니다.





루드비히 베멀먼즈와 잭클린 케네디와의 인연도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마들린느가 백악관에 방문하는 내용으로 함께 책을 기획했다니...! 역사에 '만약에'라는 명제는 참 무의미하긴 하지만 베멀먼즈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사망하기 전에 백악관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면 마들린느가 세계의 어떤 명소로 또 떠나게 됐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했어요.


잭클린 케네디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루드비히 베멀먼즈는 이런 말을 했다고합니다.



80년 넘게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탄생시킨 루드비히 베멀먼즈. 더 일러스트레이터 시리즈 [루드비피 베멀먼즈]를 찬찬히 읽으며 마들린느는 그의 삶이 녹아난 살아 숨쉬는 캐릭터였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잠자리 그림책 <마들린느> 시리즈는 더 깊은 의미와 다채로운 시각으로 읽혔어요.

1939년에 처음 출판된 Madeline과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또 다른 시리즈 5편은 모두 고전이 되어 장난감, 게임, 인형, 심지어 영화까지 탄생됐고, 할머니가 엄마에게 읽어주었듯 엄마는 자신의 아이에게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다시금 이 책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빨간 머리에 리본이 달린 커다란 노란색 모자를 쓴 마들린느는 여전히 전세계 아이들과 모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더 일러스트레이터 시리즈 [루드비히 베멀먼즈]를 통해 그의 모든 작품에서 녹아든 베멀먼즈가 삶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마들린느가 새롭게 느껴지실거예요



*본 서평글은네이버카페 '책이 있는 마을, 북촌'에서 진행한 서평이벤트를 통해 북극곰 출판사로부터 해당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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