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개정판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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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 봄볕을 받아 만물이 '열심히' 움트는계절에 나는 이 책을 마주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는 학창시절 책상 위 한 편에 붙여 놓고 가슴에 새기던 좌우명의 기본 수식어였다. 열과 성을 다해 힘을 기울여 부지런히 무엇을 해내는 것,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내게 이 책의 제목은 약간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무엇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물음표가 떠올랐다.

작가 이름을 확인하고는 그 궁금증은 더해졌다. 그림책 작가이자 에세이스트로 공저를 포함해 생전에 17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사노 요코가, 첫 아이의 백일 이후부터 치열하게 일하며 살아온 그녀가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니!! 이건 분명 작가가 의도한 '반어'일거라 어설픈 추측을 하며 이 책을 펼쳤다.



띠지에 담긴 홍보문구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 저자 사노 요코의 쓰라린 일상에 바르는 빨간약 같은 이야기들'를 뒤로하고, 간략한 작가 소개가 담긴 책날개를 넘겨 판권 면을 보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022년 4월에 출간된 화이트와 민트색 표지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가 개정판이라는 점과 일본 원서 <がんばりません>은 1985년에 출간됐다는 점이다.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노 요코가 중년인 47살 때 남긴 에세이가 2016년에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을 만났고, 2022년 4월에 산뜻하게 표지를 바꾸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2016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된 초판 책과 2022년 개정된 책을 비교해보면 책의 얼굴격인 표지는 완전히 다르다. 표지 색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기존 책의 내지에 있던 일러스트가 표지 밖으로 나왔다. 판형도 세로로 조금더 길어지고 가로 사이즈가 줄어서 들고 다니며 읽기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 페이지수도 364쪽이었던 것이 개정판은 324쪽으로 줄었다. 내지의 일러스트 페이지들이 빠지면서 가볍고 슬림해졌다.


총 8개의 챕터로 나눠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에는 사노 요코의 삶과 추억이 담겨 있다. 그녀가 남긴 생생한 문장은 그녀가 경험했을 그 순간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고, 일본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사노 요코를 평범한 옆집 언니, 동네 아줌마처럼 느끼게 만든다. 철학적인 문제를 유쾌하고 간결하게 그림책에 녹여낸 사노 요코 답게 에세이집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에도 무덤덤하고 가볍게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그녀가 견딘 묵직한 삶의 무게가 담겨 있다.


모르는 사람은, 그림책 작가는 프릴 달린 분홍색 옷을 입고, 투명하다시피 한 먹을 것을 드시며, 남의 험담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다. 실물인 내가 와하하하 하고 입을 쩍 벌리며 웃고, 글쎄 누가 그렇대! 하는 얘기에 혹하여 끼어드는 모습을 보고, 그림책 작가와 그림책 모두에 환멸을 느꼈다는 착한 사람을 마주칠 때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누가 ‘꿈이 있는 멋진 일을 하고 계시군요.’ 하고 말하면 좀 거북하다.

실상의 나는 흔하디흔한, 지나치리만치 산문적인 인간이며, 이 세상의 괴로운 일들을 충분히 맛보면서 그 현실을 기꺼이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것 없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생활을, 별것 아닌 희로애락에 울고 웃으며, 생각해 보면 창피한 일 쪽을 더 많이 하면서 넉살 좋게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그런 나를 토해 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소곤소곤.

― p. 317, '후기' 중에서


꾸밈없이 자신을 토해낸 사노 요코의 넋두리들이 바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속 이야기들이다. 전쟁으로 인한 빈곤하고 암울한 난민 살이, 두 살 터울 오빠와 아버지의 죽음, 이혼, 홀로 키우는 아이 이야기 등 그녀의 개인사가 책 속에 촘촘히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둡지 않다. 그녀의 남다른 인생관과 자유분방함은 톡소는 사이다처럼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사노 요코가 ‘엄마’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에 특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한공감했다. 


여자가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버리면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남자는 아버지가 되어도 아버지 이외의 것을 계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여자라 남자의 그런 재주가 신기하다. 세상은 무책임하게도 어머니도 인간이며 여자라고 꼬드기지만, 아무리 꼬드김을 당해도 어머니는 어머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이기를 계속한다.

― p.252, .어머니란 평생 하는 여가 생활이다' 중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렵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어렵다.'고 말한 사노 요코는 무르익은 중년의 나이에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독자들과 공유했다. 딸로서, 사회인으로서, 또 어머니로서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왜 그녀가 제목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로 정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과 맥락이 이어진다. 어려서는 부모의 안색을, 결혼하고 나서는 상대의 기분에 맞췄고 애 낳고는 머리 가꿀 새도 없이 어머니 노릇을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해 왔으니, 이제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는 그녀의 다부진 다짐이 아니었을까? 이제 더 이상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남을 위해 나를 열심히 맞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일 수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고 유쾌하며 피식 웃어버리게 되는 부담없는 사노 요코의 에세이집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특유의 매력과 유쾌함이 우리를 포근하게 다독이는 따스한 책이다.


*본 서평글은 을유문화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해당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미지가 조금 깨지는 즐거움이다.

혹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마주치는 즐거움이다. - P228

시시껄렁한 남편한테 20년이나 혹사당하며 부업인 재봉틀을 밟고 있는 분짱, 너의 평생의 믿음직한 아군은 남편이 아니고 재봉틀도 아니야. 이불이야. 매일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맹렬 할배한테 괴롭힘 당하는 미치코, 네 편은 체중 75킬로미터에 신장 170센티의 아들이 아니야. 비행 소년이 되어 버린 아들을 사랑하다가 기진맥진한 노부코, 이불만 있으면 내일 다시 일어날 수 있다니까. 이불 뒤집어쓰고 힘내자.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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