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에 담긴 기독교 진리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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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것처럼 바르트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냈다. 하지만 정작 보수신학은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며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보수신학은 바르트를 읽지 않는다. 읽더라도 배우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 읽는다. 당연히 바르트의 신학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적했듯이 교의학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고와 연구와 서술에 그칠’(13)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피조물 곧 불충분한 자의 공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는 일을 기뻐하셨다(35)’ 그렇다면 바르트 신학의 비판적 수용은 합당하다.

 

그렇다면 그를 읽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그의 대표작인 <교회교의학>은 무려 13권이나 된다. 한국말로 모두 번역된 것도 아니다. 번역된 한국말로 읽기에도 숨이 찰 지경이다. 한자 한자 꼭 씹어 읽어야 그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다. 물론 시간을 들여 <교회 교의학>에 도전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이 힘에 부친다면 이번에 새롭게 번역 출판된 <교의학개요>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도입명제만 준비하고 강의록 없이 강의한 것으로 유명한 이 책은 바르트의 신학의 면모를 살피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우선 주목하는 것은 <교의학개요>의 줄기가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의 <교회 교의학>도 이 구조를 견지한다. 이것은 그가 교의학을 더 나아가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도신경을 교의학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교의학이 사변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고 교의학이 교회를 위해 더 나아가 예배를 위해 섬길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그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공성을 향하지 않는 어떤 믿음, 그러한 어려움을 회피하는 어떤 믿음은 그 자체가 이미 불신앙, 잘못된 믿음, 미신이다(42)’고 하면서 교회가 울타리를 깨고 밖으로 나오기를 촉구한다. 또한 ‘(교회의 신앙)고백은 일반인의 언어 곧 남자와 여자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47)’며 교회가 세상을 더 적극적으로 섬길 것을 요구한다. 교회 안에 갇혀 있으면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오늘 한국의 교회가 바르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신학적 사유의 근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목회현장은 아무래도 이런 근력을 키우는데 적합하지 않다. 손에 쉽게 잡히는 목회방법론을 쫒아가다 보면 이내 신학적 사유의 근력이 시들해버린다. 이는 신학의 빈곤으로 이어지는데 그 불이익은 고스란이 교회와 성도의 몫이다. 바르트는 사도신경의 모든 단어와 문장에 집중한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달한다. 그를 따라 한 문장 한 단어를 꼭 씹어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공감하며 무릎을 치기도 한다. 이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번 만 읽을 것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책이다. 그렇게 읽는다면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어쩌면 이 책으로 충분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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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논쟁 -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2
마이클 호튼 외 지음, 문현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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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촉발점은 칭의론이다. 루터는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회는 분열되었고 지금의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의 근간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안에서 이런 전통적인 루터의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칭의 논쟁>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 개혁(루터),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관점, 정교회(신성화), 로마 가톨릭 이렇게 다섯이다. 이들 다섯 신학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한 첫 번째 칭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한 발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다섯 관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와 이 개혁파와 입장을 달리하는 넷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이 공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난 전통적 개혁파의 속한 장로교 목사로서 마이클 호튼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삶의 변화와 상관없이 내려진 무죄 판결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호튼의 말대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성화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는 여기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전 9:27).

 

바울의 새관점이나 진보적 개혁파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신성화는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약점을 파고든다. 이들은 결국 선행이 구원과 결부되며 칭의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의를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성령과 함께 한 우리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중요한 요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희미해지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신학적 관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신학의 한계는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책에 소개된 신학자들은 칭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철회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짜피 중요한 교의학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이것이 개신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던 것을 개인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교파의 다양성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바를 고백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서로 대화하지 않고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런 논쟁을 통해 결국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배우며 자신이 가진 견해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속한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가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네 가지 견해들을 읽으면서 특히 바울신학의 새관점과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칭의에 대한 다섯 관점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다. 개혁파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를 통해 이루어가든 나머지 네 관점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라고 하든 결국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칭의론에 대한 이런 균열은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두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연구한 열매들이지 않는가! 인간과 신학의 한계 때문에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의 논쟁을 통해서 합일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논쟁을 통해서 신학은 서로 배우며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런 대화와 논쟁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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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과 용서 -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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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고난주간이 되면 예수님이 담당하셨던 십자가의 고난을 재현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뜻은 가상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왜곡이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실 때 두 명의 죄수 역시 십자가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훨씬 더 깊고 풍요로운 뜻이 담겨있다.

 

사순절 동안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날 위해 피 흘리며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죄송스러워하고 눈물짓는 것으로 사순절을 보내는 것 또한 십자가를 호도할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고난당해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의미가 중요하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것을 베풂과 용서로 명명한다. ‘베풂과 용서야 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말이다. 십자가를 통해 베풂과 용서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우리와 흥정하시는 분혹은 산타클로스와 같이 우리를 한없이 안아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흥정해야 하는 분도, 산타클로스처럼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더라도 용서에 대한 우리의 왜곡 역시 존재한다. 흔히 우리는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볼프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죄를 잊어버리셨으며 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그의 설명은 복음의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왜 풍성히 누리지 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회개와 뉘우침은 용서에 대한 반응이고 뉘우침이 없는 것은 용서의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이다.

 

계속해서 볼프는 용서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용서의 참된 의미를 주지시킨다. 예를 들어 용서는 용서하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는 용서가 자신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해를 끼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때 교정되어야 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구호도 용서가 잊는 것이고 죄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용서의 완성이라는 것에 비추어보면 용서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심어주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고 감사하기가 어렵다. 여기에는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땅의 문화가 한 몫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프가 베풂과 용서에 대한 공동체의 역할을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 것은 매우 중요하다. 베풂과 용서를 왜곡시키고 베풂과 용서가 설 곳이 없도록 만드는 이 땅의 문화에 저항하는 새로운 공동체와 문화 즉 교회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을 보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다.

 

볼프가 이 책에서 루터를 많이 인용한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다. 루터가 십자가의 은혜를 그 누구보다도 더 깊게 깨달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바로 여기로부터 왔다.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우리는 루터에서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루터의 말이 생소한 것을 보면 루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그렇게 잘 전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책을 덮으면서 루터를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뿐 아닐 것 같다.

 

십자가는 베풂과 용서의 결정체다. 교회는 그 어는 곳보다 베풂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묵상하면서 우리가 깨닫고 품어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사순절 묵상용으로 기획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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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경 -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스캇 맥나이트 지음, 김창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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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약간 어색했다. ‘예수신경이라. ‘신경하면 사도신경이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사도신경은 공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아주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신경은 왠지 사도신경에 딴지를 거는 것 같았고 그만큼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경은 우리가 받아드려야 할 무엇으로 알고 있다. 사도신경을 보라. 거기에는 우리가 지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드려야 할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예수신경이라 했을 때 사도신경처럼 예수님이 동의하고 받아드렸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신경은 실제 사도신경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신경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신경은 우리가 지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드려야 할 무엇이 아니란 행하고 따라야 할 무엇이다. 얼마 전 작고하신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기도교의 심장>(한국기독교연구소, 2014)에서 믿음의 잘못된 정의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어떤 주장을 참된 것으로 믿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킬 힘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것을 믿으면서도 노예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드(creed) 혹은 크레도(credo)라고 불리는 신경의 원래의 의미는 나의 심장을 바칩니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믿는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이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맥나이트 역시 이런 관점에서 믿음을 이해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예수신경은 예수님이 지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드린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이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신경믿음사랑이라는 말이다. 엠마우스 운동을 펼친 피에르 신부가 <단순한 기쁨>(마음산책, 2001)에서 믿음은 사랑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믿음은 곧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넘어선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였다. 예수신경이 무엇인지 잔뜩 기대하고 책을 읽어 나갔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을 들려준 것이다. 이런 맥빠짐은 내가 믿음과 사랑을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성도의 우선적인 사명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랑이 없어도 우리가 동의하고 받아드리는 그 무엇이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믿음과 사랑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더 쉬운 믿음의 영역에 서 있으면서 사랑이 없어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맥나이트는 이런 나의 생각을 무너뜨렸다.

 

사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예수님이 믿고 따랐던 신경이었다는 것을 밝힌 것은 놀라운 통찰이다. 이것은 그가 역사적 예수 연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당시 유대교의 신경이었었고 이웃 사랑은 이런 신경의 중심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것을 포함해서 맥나이트는 예수님이 사셨던 1세기 유대인의 입장에서 복음서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그러나 쉽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제대로 배우는 기쁨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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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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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의 화두는 복지였다. 아쉽게도 보수정당이 복지라고 하는 진보가치를 선점에서 선거에 이겼다. 복지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함께 대두되었던 말이 경제민주화이다.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민주화를 통해 결실을 얻는다. 생경한 이 말은 곧 국민들 사이에 회자되었고 사람들은 대통령 후보가 약속한 경제민주화가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미덕임을 강조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이 단어는 지금 잊혀졌다. 지금은 아무도 경제민주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속은 것이다.

 

이미 뭔가를 가진 사람들은 그 뭔가를 얻기 위해 자신이 땀 흘리고 수고한 것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자신은 그것을 누릴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렇게 된다. 어떤 사람이 지금 뭔가를 가지지 못한 것은 그 뭔가를 얻기 위해 땀 흘리고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뭔가를 누릴 권리가 없게 되는 셈이다. 참으로 무서운 논리다. 뭔가를 가진 이들은 자기 혼자의 힘을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한다. 정말 혼자의 힘으로 그것을 얻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홀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땀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지금의 부를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정부로부터 받은 법률적 제도적 혜택은 별도다.

 

부자들에 대한 증세는 빼앗는 것이 아니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받았던 여러 가지 혜택을 세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들은 이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증세를 말하는 자들을 사회주의자 더 나아가서 빨갱이라고 몰아세운다. 오히려 낙수효과를 내세우며 더 많은 혜택을 달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빈곤의 책임을 개인의 무책임과 게으름에만 돌릴 수 없다. 일자리가 문제의 핵심인데 그렇다면 빈곤은 구조의 문제고 법의 문제가 된다. 복지는 빈곤한 자들이 경제적인 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경제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이 책은 영국에서 벌어지는 노동계급 혐오 현상에 대한 고발이다. 영국주류 사회가 의도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혐오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노동계급 전반에 대해 불신을 조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의 결과는 극심한 경제적인 차별이다. 대처가 총리를 맡고 난 다음이 이런 현상이 더 심화되었고 영국은 황폐해져 갔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26세의 젊은 나이의 저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렇게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그가 소개하는 영국사회는 한국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에 더 놀랐다.

 

우선 노동자에 대한 혐오라고 하면 우리나라도 저리 가라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가 아직도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천문학적인 급여를 받는 사장들에 대해서는 당연시 하면서도 노동자들이 급여를 많이 받으면 귀족이라는 말을 붙이며 못마땅해 한다. 문제는 노동자들 역시 이런 현상을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존엄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노동에 대한 가치가 굴절되어 있는 것이다. 높은 교육열은 이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대학의 서열화는 이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가난한 노동자들이 부자를 위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나 보수정권이 노동조합을 탄압하며 노동자들이 연대하지 못하게 막고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것도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가 대처리즘의 특징을 개인화라고 진단한 것에 백번 공감한다. 공동체를 무산시키고 개별화시키면 결국 힘 있는 놈만 살아남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사회를 동물의 왕국, 정글이라고 부른다. 사회와 역사를 이처럼 퇴보시킨 사람을 좋아하고 롤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개탄스럽다. 개별화되면 힘없는 노동자들이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실제 대처의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의 공동체는 와해되었고 가정이 파괴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그 예를 쌍용 자동차 사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오언 존스의 해법은 좌파에 뿌리를 둔 운동이다. 노동자들을 대변한다고 하면서 맥 빠진 중도정치를 벌이는 노동당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더욱 선명한 정치적 좌파가 노동운동의 미래라고 진단한다. 이런 그의 해법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동 운동의 미래는 매우 암울하다. 좌파라는 말이 주홍글씨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좌파의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야당은 점점 오른 쪽으로 기울고 있는 실정이다. 집권을 위해서란다. 이런 정당은 결국 집권을 해도 노동자들과 빈곤한 자들을 위해 용기있게 나서지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우석훈과 박권일은 <88만원 세대>에서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하지만 지금의 정치상황과 시민들의 의식 수준으로 봤을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존스가 제시한대로 비정규직으로 개별화된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카트>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비정규직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노동자들이 연대하며 바리게이트를 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힘겹게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을 돕자고 하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에게 합당한 급여를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다. 정치적 민주화와 아울러서 경제 민주화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우리가 사람이기에 추구해야 할 가치다. 사람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물론이고 좋은 번역으로 영국을 알게 해준 번역자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책을 통해 노동과 경제와 사회에 대해 참 많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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