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 딜레마 - 가룟 유다에 비추어 본 진짜 기독교
김기현 지음 / IVP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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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박영선 목사님은 로고스 서원에서 주최한 그의 북토크에서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역사라고 하는 드라마에 우리가 맡은 배역이 있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 자신의 처지를 팔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목사님은 여자의 위치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하셨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것에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자가 맡은 배역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충실한 것이 역사라고 하는 드라마에 꼭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런 그의 역할론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악인들의 등장도 필연이다. 그들에게도 역사를 위해 주어진 배역이 있고 그들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 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의 중심에 가룟 유다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다. 그의 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을 누리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갸롯 유다의 배반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도 일정한 역할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가룟 유다가 실제 그런 역할을 했다고 답변한 것이 바로 이 책에 소개된 '유다복음'이다. '가룟 유다 딜레마'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유다복음'에 대한 응답으로 쓰였다.

'유다복음'은 최근에 발굴된 1700년 전의 문서다. 그렇게 오래된 문서가, 그것도 '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발견되었으니 이 문서가 발견되었을 당시 신학계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그리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한 일등 공신으로 소개한 내용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도대체 '유다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소상하게 알 수 없는 일반 성도들을 위해서 저자는 영어로 번역된 유다복음을 단숨에 읽고 친절하게 펜을 들었다. 그는 '유다복음'은 아주 엉성하게 쓰인 영지주의 작품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영지주의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고, 또 영지주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있기에 저자는 영지주의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말한다.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에 소개된 대표적인 이단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다. 그런데 예수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그리고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적용되는 아주 무서운 이단이다. 탈육체가 탈역사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가 보이고 있는 탈역사적인 모습은 영락없는 영지주의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눈에 보이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만 집중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무섭게 우리 가운데 침투해 들어왔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후반부 '성서 밖의 유다'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결국 '유다복음'은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며 '유다 변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유다복음'이 긍정한 유다의 행위는 부정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만큼 그의 행동은 악하다. 그리고 그의 배반이 사용되긴 했지만 그의 행위가 십자가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의 싸늘한 키스가 없었어도 주님은 구원의 길을 넉넉히 완성하셨을 것이다. 즉 그의 배반이 필연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가 필연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필연 앞에 그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예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미리 정해 놓은 생각대로 행동했고 하나님은 그의 행동에 책임을 물으신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우리는 매사에 선과 악, 죽음과 생명을 구별하는 신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지금도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다. 하지만 용서가 그에게 열려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자살이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처럼 이 책은 당시 이슈가 된 '유다복음'이 영지주의 작품인 것을 밝히면서 가룟 유다로 촉발된 자살, 예정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아우르면서 기독교 신앙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운행해 가시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여자로 태어날 것인지 남자로 태어날 것인지, 아프리카에서 태어날 것인지 미국에서 태어날 것인지 장애인으로 태어날 것인지 정상인으로 태어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맡은 배역은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박영선 목사님이 하신 말의 의도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결정적이지 않다. 내가 여자로 어떤 일을 할지,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된 것은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지만 그런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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