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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묵상 - 이블린 언더힐과 함께 하는
이블린 언더힐 지음, 크리스토퍼 L. 웨버 엮음, 김병준 외 옮김 / 비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소설가 공지영은 '창비'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 방송 '라디오 책다방'에 출연했다. 진행자들과 최근에 출간한 그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주인공의 독백에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을 넣었어요. 가장 타락한 종교가 천상의 이야기만을 하고, 가장 건강한 종교가 이 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거죠. 작품에서 그 독백을 가장 좋아해요." 공지영이 말하는 종교란 물론 기독교다. 지상의 이야기, 일상과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직 천상의 이야기만 하는 교회. 우리가 너무 흔하게 보고 있는 교회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은 올바른 영성이 결코 아니다.
<대림절 묵상>의 저자 이블린 언더힐은 공지영의 이 말에 공감할 것 같다. 이블린 언더힐은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로서 신비주의 영성가다. 그녀가 저술한 책들은 한결같이 영성과 신비주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말은 사실 그 뜻이 상당히 모호하다.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교수는 2000년 성경신학회에 발표한 논문 <화란 교회의 영성과 경건>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모호하기에 각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추구하는 영성은 변종길 교수나 공지영이 우려하는 영성이 아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오히려 이분들이 추구하는 영성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참된 영성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참된 영성은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으로 정의하면서 대림절 첫날 묵상을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두렵고 떨리는 '영적'인 사건이다. 성육신을 통해 인간적인 것이 폐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영적인 삶은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교부 아타나시우스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그녀는 영성에 관한 교회의 이런 올바른 전통을 잘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런데 이런 절기가 자칫 우리의 일상과 상관없이 지켜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주님의 초림 즉 성육신을 기리면서 주님의 낮아지심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럴 경우 예수님의 성육신은 겨우 개인의 영성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을 통해 구원받는 것은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포함한 전 우주다. 그녀는 이와 같은 사실을 독자들이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대림절에 고통 중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의 탄식을 들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성은 우리의 일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만일 영성이 우리를 일상에서 도피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올바른 영성이 아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일상과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녀가 신비주의자로 소개하는 사도 요한 역시 예수님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곧 이단이며 적그리스도라고 일갈하지 않았는가! 눈에 보이는 우상이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요한이 경계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지주의 이단이었다. 이와 같은 영지주의의 위협은 오늘에도 늘상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성도의 일상과 그 일상이 모여 의미를 갖는 역사를 터부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교회는 영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성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성이 심지어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고까지 한다. 아니 모든 면에서 영성은 정치와 관련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사실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정파를 초월한 성경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영성에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애써 세상을 외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침묵과 맹종으로 너무 비겁하게 정치에 참여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언더힐은 개인의 영성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비주의 영성가답게 그녀는 기도에 대해 매우 강조한다. 잘못된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신앙의 신비로운 측면은 간관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바로 기도다. 그녀에게 기도는 간구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상태'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기도하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 한다. 문을 닫되 틈을 주지 말고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단 둘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문을 조금 열어 둔 채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기도의 신비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성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물론 한국교회는 기도에 열심이다. 하지만 그 기도의 대부분은 간구이다. 간구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역시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잃어버렸다고 한 나들목 교회 김형국 목사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간구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에 너무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식조차도 지극히 개인을 위한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더힐의 기대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그의 영성의 또 다른 특징은 지극히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영성이 개인의 감정이나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 즉 삼위 하나님에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못 박는다.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적 언어와 생각으로 흡수된다고 한다. 참으로 명쾌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신비주의와 영성 운동이 얼마나 교회를 혼탁하게 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 주된 원인은 성경보다 체험에 더 큰 권위를 두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경은 물론이고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더힐은 성경과 아울러 사도신경과 같은 교회의 신조를 영성의 기초로 확고하게 붙들고 있다. 이것이 그녀의 큰 강점이며 참된 영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영성은 사변적이지 않다. 그녀는 기독교 영성이 이 땅의 악과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악과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르쳐 줄 수는 있다고 한다. 참으로 실천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악과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고심한다. 필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악과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악과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그리 상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악과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게 바로 성육신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악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실천적 영성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완전하게 현존하신다고 한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이는 요한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오해하지 말라. 사랑은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말과 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하게 행함에 사랑이 있다. 성육신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악과 고통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나의 성육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참된 영성이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대림절이 본디 성육신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인데 이 책은 재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전체를 통해 드러난 그의 영성의 색깔을 보자면 굳이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별 것이겠는가! 일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땅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섬기듯이 섬길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신비를 더 깊이 더 풍성하게 경험한다면 이런 참된 영성의 삶을 살아갈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그녀가 직접 쓴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동안 출간한 책 중에 대림절과 관련된 글 혹은 대림절에 읽었으면 좋을 듯한 글들을 크리스토퍼 L. 웨버라는 분이 편집한 책이다. 성탄절 전 4주 28일과 성탄절 이후 13일 총 41일 동안 매일 정해진 주제를 따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글을 통해 주님을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편집자가 매일 글의 마지막에 묵상 요약문을 적어 두고 또 기도문도 따로 실었다. 매일 순서에 따라 읽어 가며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성육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참된 영성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