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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씨, 홀로 죽다 ㅣ 매그레 시리즈 2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평점 :
(스포일러 있음)
매그레 시리즈의 2편. 두권을 연달아 읽고나니(그러니까 지금까지 총 여섯 권을 읽은 셈인데.) 이 시리즈가 다른 고전 추리 소설들에 비해서 뭐가 재밌는 것인지 확실하게 보인다. 서사의 속도가 당시의 추리소설과는 비교도 안되게 빠르다는 것. 매그레 시리즈의 분량은 200페이지 내외로 짧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아가사 크리스티나 존 딕슨 카와 비교하면 서사의 양이 많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과 같은 하드보일드 소설들의 속도에 비하면 비슷하거나 조금 느린 편이지만, 그만큼 플롯이 복잡하지 않고 직관적이다.
서사의 속도와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히 '묘사'인데, 매그레 시리즈를 보면 아주 단순한 묘사에 깜짝 놀랄 것이다. 이것은 비단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캐릭터의 묘사 역시도 굉장히 단순하다. 매그레 시리즈가 매력적인 캐릭터로 인기를 끄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희한한 일이다. 사실 매그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과 관련된 이슈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고작해봐야 독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100킬로 그램이 넘는 거구이고 술과 담배를 사랑하는 남자라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들, 그러니까 매그레의 인생역정이라던가 아니면 연애 이야기같은 잡설들은 존재하지 않는다.(서브 플롯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분석력과 통찰력, 그리고 그 저변에 깔려있는 휴머니즘일 것이다.
매그레 시리즈의 플롯은 보면, 항상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시작한다. 질문은 대게 꽤 복잡해 보이는 난제이다. <타인의 목>에서는 매그레와 판사가 사형수의 탈옥을 방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편인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는 피에트르라는 라트비아인이 열차 안에서 살해되는데, 매그레는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역사에서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이 시리즈는 초반에 이런 식의 후킹을 제공하면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그에 비해 <갈레 씨, 홀로 죽다>의 경우, 제공되는 질문이 그렇게 강력한 편은 아니다. 단순히 에밀 갈레라는 남성이 죽었고, 그의 죽음의 원인을 쫓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니 지금까지 봐왔던 작품들에 비해서 호기심의 유발도가 가장 적은 편이다. 심농은 이 평범한 상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런 서술을 한다.
거리에서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도 그 모습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매그레가 에밀 갈레에게서 본 것은 다만 사진 한 장, 반쪽만 남은 얼굴, 그리고 창백한 몸뚱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진은 그의 머릿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매그레는 바로 이 사진 속의 인물을 되살려 보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p28~29
매그레는 죽은 갈레씨의 모습에서 다른 시신들과는 다른 어떤 느낌을 감지한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은 플롯에서 제공되는 특별함에 비하면 얕은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이 작품이 내가 읽은 다른 심농의 작품들에 비하면 떨어질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플롯이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질문은 확장되어 간다. '에밀 갈레는 왜 직업을 버리고 왕당파의 이름을 빌려서 사기를 쳐왔는가?", "그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우편물을 주고받던 자코브라는 남자는 누구인가?" "7미터의 거리에서 총을 쏜 남자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연속되는 것이다. 즉, 추리 소설에서 던지는 장르적인 지점의 질문(총을 쏜 남자는 누구이며 그 방법은 무엇인가?)과 문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질문들(전자 두가지.)이 제시되면서 부터 사건은 본격적으로 탄력이 붙어서 진행된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잇고 살이 붙어가며 점점 질문은 난제가 되어간다. 즉, 단순히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질문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해답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그레는 결론에 점점 다가가기 시작한다.
매그레는 갈레의 죽음이 여러가지 상황에서 기인한 문제로 인한 자살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총을 쏜 것은 타살로 보이기 위해 위장한 트릭이었으며, 가슴에 칼을 꽂은 사람 역시 갈레 씨 본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다소 본격추리적인 트릭인데, 심농은 이 재미있는 트릭을 그 자체로만 소비되지 않게 한다. 즉, 트릭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혼징 살인사건>과 비교하면 재미있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은 '자살을 타살로 위장하는 트릭'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후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오락적 소비를 위한 트릭(게다가 개연성도 없는!)에서 그친다면 <갈레 씨, 홀로 죽다>는 트릭에 의미를 부여한다. 트릭의 개연성과 더불어 문학적인 지점에서의 의미까지 확실하게 트릭에서 구축한다. 또한 본격추리적인 트릭키한 반전 이외에도 플롯에서 환기되는 반전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교환 신분이다.
사실, 이 작품이 좋은 것은 단순히 빠른 전개와 좋은 트릭 때문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확실한 의미를 구축해낸다. 매그레는 이렇게 말한다.
"생틸레르 씨, 당신이 '놀랍다'고 말했던가? ...그렇고,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거요! 여기에 범죄가 없다니!... 여기에 살인범도 없고, 죄인도 없다니! 감옥에 쳐넣어야 할 놈이 하나도 없다니... 아니, 처넣어야 할 사람이 딱 하나 있었겠지. 현명하게도 그 알량한 법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생파르조 공동묘지의 '너무 비싸지도 않으면서도 품위 있는 묘석 밑에' 죽어 누워 있는 그 자삼은 감옥에 갇혔겠지..." p 245
비록 에밀 갈레가 자살을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죽음으로 내몬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법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에 매그레는 좌절한다. 외려 고통스럽게 죽은 평범한 사기꾼 에밀 갈레야 말로 범죄자라는 사실에 그는 좌절한다. 즉, 법이란 도덕이 아님을 그는 깨달으면서 씁쓸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리고 매그레는 자신이 알아낸 이 사실을 서에 보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한다. 즉, 직업(보고를 해야한다는 것.)과 인간(보고를 하지 않고 사실을 묻어두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것이다. 직업 자체가 인간이 되어버린 매그레에게는 꽤나 어려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후자에 손을 들어준다. 그렇게 하는 편이 인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열린책들의 매그레 시리즈의 캐치 프레이즈가 '메그레, 삶을 수사하다.'이다. 내 생각에는 이만큼 그 말이 잘 어울리는 작품은 앞으로 없을 것 같다. (또 모르지, 다른 작품으로 이만큼 놀라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