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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밖에 난 자들
성은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5월
평점 :
'나의 외할머니인 유정 씨는 '할머니'라는 호칭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이 일찍 죽었다고 혼자 키운 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줬다.' (14p)
'내가 그녀의 애간장을 녹이면서까지 굳이 간판을 바꿔달았던 건 누구의 며느리나 아내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137p)
책을 잡고 슬슬 읽으려다 어쩌다보니 꼼짝않고 다 읽었다.
중간에 끊기엔 화자인 '귀랑'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를, 제대로 사과하기를 혹은 벌을 받기를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이다. '꼭지'의 말처럼 능력있는 '유정'의 손자인게 큰 벼슬인 귀랑은 건강한 남자들의 본능이니까라며 죄의식 따윈 느끼지 않고 여자들을 괴롭히는 악행을 하며 자라난 남성이다.
네가 이뻐서 그러는거야.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거다라는 변명을 하면 그저 넘어갔기 때문에, 혹은 여자애가 겁도 없이 어울려 다녀서 남자애들이 충동적으로 실수를 한 거라고 말하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평범하고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뻔뻔함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여성 폭력 사건에 달리는 많은 수의 댓글은 남성의 본능과 피해자의 행실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귀랑은 끝의 끝까지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 지금 무지 반성하고 있어."
알았어,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말만큼 모욕적인 말도 없다.
진짜 피해자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말은 나올 수 없다. 그런 말은 아무런 변화도 원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회구조나 제도, 그 어떤 것의 변화도 전혀 담보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저 피해자에게 계속 조용히 아파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화자가 악행을 저지르는 귀랑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귀랑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며 남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듣지 않아도 되니 그렇게 사는 것이겠지. 아마 조금이라도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자신이 빠진 상황을 더 빨리 눈치챌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오로지 인터넷 카페의 글로만 존재했다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소설의 마지막 화자는 역시 귀랑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억울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에 바쁘다.
인생의 주인이 자기자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유정'은 외모도 나이 든 모습도 상당히 아름답게 묘사된다. 그저 손자의 눈에는 곱상하고 날씬한 할머니지만 그녀는 자신을 억압하는 것과 언제나 싸웠고 누구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 전투도 불사하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유정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라 머리속으로 윤여정 님이나 문숙 님 등 여러 배우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글을 읽었다. 이런 매력적인 유정이 소설속에서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 조금 아쉽다. 속편이라도 바랄만큼. 하얀 색 옷을 좋아하는 유정씨, 그래 아름답게 살려면 그냥 꼬처럼 웃기만 해서는 안된다. 열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출판사가 이런 소설을 내는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다들 많은 격려와 지지를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