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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로맹 가리는 그의 작품들 만큼이나 자살로도 유명한 작가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살자들이 사용하는 음독이나 동맥절단과는 달리 그는 권총자살을 택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사람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몹시 끌리고 있었다. 자살에 대해 호기심섞인 동경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지식인, 그것도 여러차례나 콩쿠르 상을 수상한 유명한 작가의 권총자살에 대단한 흥미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접하게 된 이책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보고 '그는 더할나위 없이 내취향의 작가다' 라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를 동경하는 마음이 눈덩이 처럼 커져서 급기야 (말하기엔 조금 쑥스럽고 유치하긴 하지만)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나는 그를 열정적으로, 전생애를 바쳐 사랑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로맹 가리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구입에 들어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각 텍스트들을 마치 폭식증 환자처럼 밤새 정신없이 먹어치워(읽어)버린 그날밤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에 나오는 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푸른바다 저 멀리서 들려우는 파도소리, 작품 '류트' 에 나오는 악기 류트의 영혼을 울리는 가락. '어떤 휴머니스트' 에 나오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이시대의 진짜 휴머니스트 칼 뢰비. '지상의 주민들'의 주인공이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장님처녀 등 작품들의 배경풍경과 등장인물, 사건 들의 이미지들이 한데 뒤엉켜서 내 정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이미지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그날밤을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밤에는 처음부터 다시 읽었기 때문에 또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폭식증 환자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이 아니라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의 최고급 식사를 하고있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처럼 글자 하나 하나를 천천히 그리고 꼭꼭 씹으면서 여유있게 텍스트 들을 삼켰다. 그래서 첫날 읽었을 때 이미지들만이 거대하게 떠오른 반면 정독했을 때는 뭔가 느낌이 더욱 마음 속에 와닿았고 급히 읽는 바람에 놓쳐버렸던, 마음에 쏙드는 문장들도 알아차릴수가 있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에서는 한두작품만 빼놓고는 거의 상류층 사회나 그러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했다. 또 대부분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건 남자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건 은연중 자기자신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 처럼.
때문에 너무나 그를 닮았단 느낌이 드는 작품들, 그중에서도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의 주인공과 작품 '류트' 의 주인공이 너무나 그와 닮은 느낌이어서 그 두작품을 읽는 내내 계속 그들의 얼굴이 로맹 가리의 얼굴과 겹쳐져서 나타났다. 그래서 로맹 가리라는 옛 배우가 보여주는 엄숙한 연극을 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이제껏 없었던 특별한 경험 이었다. 그 두편의 연극은 아마도 평생동안 내 머릿속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독한 비극이었다 해도.
지금도 가끔씩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풍경들이 생각이난다. 넓게 펼쳐진, 끝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모래인지 죽은 새들인지 구별이 안가는 하얀 모래사장, 그위에 마치 환영처럼 서있는 작은 카페, 카페의 테라스에서 시가를 입에 물고 고독하고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죽어가는 새들을, 어쩌면 자기 자신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주인공 남자. 그는 아마도 로맹 가리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