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이해-
이제 막 부모가 된 이들이라면 누구든 의미와 행복은 다르다는 점을 안다. 사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에고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맞바꾸고는 뒤도 안돌아보는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내 경우, 젖을 먹일 수는 없으니, 기저귀를 가는 것이 신참 아빠로서의 일이었다. 처음 수년 간, 수천 장은 족히 되는 기저귀를 갈아왔고, 눈만 감으면 그때 그 액체와 고체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더불어 수면 시간은 반 이하로 줄었다. 순간순간 나의 존재는 여러 면에서 명백히 비참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부모가 된다는 것을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생각이 없다. 오직 의미만이 이런 손해나는 거래를, 그것도 고마워하며 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당신 삶에서 충분히 의미 있다면, 당신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
-이해-
해석적이해: 분리된 각각의 것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는지 살피는 것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함이 곧 이해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해는 좌뇌의 일인 것 같다. 나는 이것을 "해석적 이해"라고 부른다.
간단한 기계식 시계를 보면, 몇 개의 톱니바퀴, 동력 전달 장치, 태엽장치 등이 있고 그것들이 합쳐 시계판 위의 시계바늘을 움직인다, 시계를 생전 처음 본 사람이 각 부품의 세부사항과 그것들이 합쳐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했다고 쳐보자. 그럼 시계를 조립할 수도, 분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계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주도 똑같다. -좁은 창문으로 보는 듯한 해석적 의식은 한 번에 하나씩만 이해하며, 전체를 묶는 접착제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깜깜하다. -은유- 은유가 어떤 것을 의미하려면, 선형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보이지 않는 둘 사이의 연결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은유를 듣고 우리가 하는 일은 추상을 지각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은유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연결을 만들어낸다.
지각을 이해로 동일시함은 은유의 핵심이다. 우리는 뭔가 추상적인 개념을 우뇌의 지각적 경험에 연결시키고는, 좌뇌가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뇌가 은유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대한 양의 연구결과가 있다. 우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시, 은유, 풍자 등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은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건 숨겨진 연결점을 놓친다는 뜻이다.
은유로, 뇌는 신경활동의 패턴과 진짜 세상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들어낸다. 시에서도 은유는 심장 그 자체다. 에밀리 디킨슨의 말처럼,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희망이 없다. 하지만 우뇌가 그것을 색다른 방법으로 바라보고는 희망과 날개 사이에 어떤 관계를 찾아낸다. 어떤 의미로는 지각(perception) 그 자체가 시와 비슷하다. 그러니 우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의 경험은 어쩌면 시를 쓰는 것과 같다.
불교를 비롯한 영적 전통에서 은유를 이토록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어쩌면 문지기 역할을 하는 해석적 마음을 돌아서 가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겉으로 보면, 대부분의 은유는 단순하면서도 천진해 보인다. 이 점에서 좌뇌가 방어적이 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이 틈을 타 우뇌가 활동을 하면, 경험은 이미 좌뇌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가 마음에 닿게 된다.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