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캐비닛, 소설의 산해경

컬쳐뉴스에 작년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김언수의 <캐비닛>(문학동네, 2006)에 대한 소설리뷰가 실렸길래 스크랩해놓는다. 필자는 젊은 평론가 복도훈씨이다.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류보선)는 평이 있을 만큼 작품은 지난해에 거둔 한국소설의 수확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케이스이다.

컬쳐뉴스(07. 01. 19) 캐비닛, 소설의 산해경(山海經)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흥미롭고도 진지하며 슬프도록 유쾌한, 지적인 분석과 멜랑콜리한 아포리즘이 결합하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들의 무진장한 꽃다발인『캐비닛』을 읽으면서 내내 품었던 물음이다.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구라’가 장난이 아닌『캐비닛』의 서술자가 들려주는, 한순간에 기억을 상실하고 한참 후가 되어서야 남태평양 섬에서 깨어난 한 타임스키퍼에 관한 13호 캐비닛 보고서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가, 타임스키퍼라는 별종이 백년 묵은 신흥종교인 자본주의라는 제단(祭壇)이 요구하는 불우한 희생양이 아닐까하고 읽던 책을 접고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다가, 13호 캐비닛에서 꺼내어져 마술의 양탄자처럼 펼쳐질 다음 이야기들이 마저 궁금해져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새 몇 쪽 남지 않은 책장의 부피를 못내 원망하며 한편으로는 이게 끝인가, 하고 갸우뚱해가다가, 가까스로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는 소설이 좋은 소설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럼『캐비닛』은 도대체 어떤 소설인가.『캐비닛』의 한 구절처럼, 이 소설은 인간이라는 마지막 종, 그리고 새로운 종의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돌연변이들에 대한 믿거나말거나 “인류학 박물지”인가? 아니면 그 온갖 '심토머'(symptomer)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해부인가. 그들을 만들어낸, 적어도 IMF 이후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생리학에 대한 풍자와 비판? 심토머들마저 관리하고 화폐로 환산하려는 체계들, 군대, 학교, 회사의 규율들에 대한 저항과 거부? 작가가 생각하는 형식주의적 소설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선언적 알레고리? 자본주의적 망딸리떼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 허구의 인물인 아랍의사들의 의학논문과 다윈적 진화론, 블랙유머의 대화들, 갖가지 우화와 기담, “이쑤시개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에세이적 사변과 시적 아포리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곰탕 뚝배기 소설론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작가 특유의 구라와 능청이라는 긴 대꼬챙이에 줄줄이 북어 엮이듯 엮인『캐비닛』은 이채로운 부분들의 총합이되, 부분으로 환산되지 않으면서도 총합을 뚫고나오는 과잉과 혼돈의 마술램프라고 부를 수 있다.

『캐비닛』이전이라면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8, 90년대의 동사무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냄새나는 추리닝과 테니스 양말 한쪽, 바람 빠진 축구공과 기한이 다 된 자료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구겨 넣어져 쾅하고 닫힌,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이 낡아빠진 13호 캐비닛에서 황당무계하면서도 현실적 연관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처럼 마구 쏟아져 나올 줄이야.『캐비닛』을 읽다보면 주(鴸)라는 새가 나타날 때 그 고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지고 비(蜚)라는 짐승이 지나간 자리에 풀과 물이 말라 천하에 큰 돌림병이 생긴다는 식의 수백의 이야기들이 적힌 중국의 기서(奇書)『산해경(山海經)』을 자꾸만 연상하게 된다. 물론『캐비닛』의 심토머들이 해악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고 더군다나 상서로운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들임은 부언해야겠지만.

『캐비닛』, 21세기 한국판『산해경』에 실린 심토머들은, “진료과목이나 상담분류표” 등 합리성의 잣대로는 분류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분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괴물에 가까운 존재들처럼 보인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문방구 사내, 혀에서 붉은 혀를 내미는 도마뱀이 자라는 여자, 신용이 중요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시간을 잃어버린 타임스키퍼들, 자신의 분신을 만나는 '도플갱어'들, “시간이 곧 돈으로 환금되는 21세기”에 긴 잠을 자는 '토포러'들, 불행한 기억 대신 행복한 위장기억을 소유하는 '메모리자이커'들, 일명 어지자지 또는 남녀추니로 불리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외계인 무선통신 회원들, 육체를 마음대로 바꾸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다중소속자들,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들, 침대 밑에 악어가 숨어있다고 호소하다가 악어에게 실제로 잡아먹힌 망상증적 '블러퍼'들.

그러나『캐비닛』에서 이 돌연변이들, 저마다 증상(symptom)을 호소하는 그들은 괴물처럼 보이지만, 시장이나 체계에 위협적인 존재들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도심에서 외롭게 앓고 미쳐가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지극히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우선 ‘앓는’ 자들이다. 소설 후반부의 키메라 파일을 둘러싼 납치와 감금, 탈출의 에피소드가 암시하듯, 심토머들 중 일부는 관리되고 교환되는 최신유전자정보를 소유한 값비싼 상품이지만, 대부분의 심토머들은 상품가치조차 없는, 버려진 존재들이다.『캐비닛』의 서술자이자 주인공 공덕근이 앓는 그들과 직접 만나거나 상담전화를 받고 충고해주는, 그 역시 증상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더러 우뚝 서서 혼잣말을 내뱉거나 흥미롭고도 솔깃한 사례들만 소개하거나 둔탁한 사변을 늘어놓는, 다소 아슬아슬하고도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유사분석가의 캐릭터로 설정된 것은 그 때문이리라.

무엇보다도『캐비닛』의 장점은 활달하게 말할 줄 알면서도 동시에 잘 귀 기울이고 세심히 듣는 소설이라는 특질에 있을 것이다.『캐비닛』은 시장과 체계에 대한, 시장과 체계가 낳은 돌연변이들의 반란을 그린 원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장의 잉여생산물들, 체계의 폐기물들인 돌연변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억지와 하소연”을 듣고 (샴쌍둥이였지만 지금은 혼자 살아가는 “안개꽃 같은 여자”인 안(眼)과의 만남에서처럼) 때론 안아주며 (“먼지 날리는 환풍기 아래에서 밥을 먹는” 거구의 독신녀 손정은과의 관계에서처럼) 때론 안기기도 하는, 위무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심토머들의 애환과 울혈, 외로움과 비존재감이 환기시키는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산해경』이 고대 중국의 한 시대에 대한 우언(寓言)인 것처럼,『캐비닛』은 21세기, 구체적으로는 IMF 이후, ‘주’와 ‘비’가 활개치고 활보하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종신고용제가 무너지고 비정규직과 실업에 잠식당한 IMF 이후의 한국의 경제적 현실에서 산업예비군이나 임노동자에게 명백하게 드러난 가장 큰 증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불안일 것이다. 특별히 고용불안만은 아닌 이 불안은 일찌감치 발터 벤야민이 성찰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앓고 있는 증상 중 하나다.

『캐비닛』에서 타임스키퍼들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는 자본주의가 불안과 걱정을 회피하려는 종교적 강박증과 연결되어 있다는 성찰과 탁월하게 결합한다. 타임스키퍼들은 그들이 시간을 전부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최상의 인간들이지만, 실제로는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특정하게 반복되는 의례와 규칙에 종속시키려 매순간 긴장하고 애쓴다는 점에서 강박증자들과 흡사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의례와 규칙을 수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소설에서 타임스키퍼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가 어느 날, 전혀 상이한 시공간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비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자본주의에는 휴일(holiday)이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특정 교리도 신학도 모르며 십자가조차 없는 자본주의라는 신흥종교에는 평일이란 없으며, 매일매일은 강박증적 신도들이 극도의 긴장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축제일(holiday)뿐이다. 서술자의 말을 빌면, “에브리데이가 할리데이”인 것이다.

이쯤 되면,『캐비닛』을 자본주의의 증상학으로서의 소설로 정의해도 무방하다.『캐비닛』의 첫 부분, 상피에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상피에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둑 루저 실바리스의 일화와 마지막 부분과의 연결은 다소 무리하다싶다. 그렇지만,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 먹고 싶은 지독한 무료함으로” 가득 찬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자발적으로 망명, 13호 캐비닛의 자료들을 옮겨 적는 서술자를 묘사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로부터 유폐된 자리에서 선언된,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적 자의식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예컨대, 작가와 더불어 이렇게.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 바야흐로 독자들은『캐비닛』과 더불어 새로운 소설 종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07. 0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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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제정 러시아와 대한제국

인터넷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띈 글을 옮겨놓는다. '한겨레 필진'인 박노자 교수의 '만감: 일기' 한 꼭지이며 '박노자 글방'에 올려져 있다. 제목은 좀 길어서 축약해놓았다.

박노자 글방(07. 10. 19) 제정 러시아 ㅡ 대한제국을 식민화할 구체적인 계획은 있었는가?

오늘 모스크바에 있는 한 선배로부터 새해 선물 (?)로 러시아의 한국학 원로 보리스 박 선생의 역작, (<러시아와 조선>, 증보판, 모스크보, 2004)를 즐겁게 받았습니다(*'모스크보'는 '모스크바'의 오타이겠다? 한데, 제목을 굳이 <러시아와 한국> 대신에 <러시아와 조선>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대한제국'만 하더라도 '조선'은 아니지 않나? ). 1970년대에 나온 제1판이야 저희들의 교과서이었지만 증보판을 거의 처음으로 봤어요(*520쪽의 두툼한 책이다. 2004년이면 나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인데,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Россия и Корея

저는 이 책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을 풀려고 했어요. 요즘 한국 보수의 일각에서는, "러시아도 대한제국을 식민화하려 했으니 일본이 러일 전쟁을 발발시켜 한반도 점령한 것이 일종의 자위권 행사"니 "일본에게 먹힌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 대신에 러시아에게 먹혔으면 결국 공산화됐을 것"이니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 의도" 관련의 발언들이 많고, 대체로 일본과 동격으로 보려 하더랍니다.

여기에서 일단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제가 러시아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제정 러시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할 추호의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나라 제국주의부터 공격하라"는 레닌적인 "혁명적 반제주의" 입장에 있고, 지금도 이라크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한편 체첸의 독립 운동도 동시에 지지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만 제정 러시아는 정말로 대한제국의 식민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는가요?

물론 제정러시아는 대한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침략적 외세이었음은 두말 할 것은 없지요. 그 전에도 별나별 짓거리를 다 했었지만 1900년에 이범진 공사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범진이 원래 친러적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망국을 좌시할 수 없는 애국자이었지요) 압록강 근방에서의 벌목 이권을 억지로 따내고, 1903년부터 용암포에 군인들을 침투시켜 사실상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을 침범한 것은, 역시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지요. 그리고 1903년에 일본과 만한교환을 논했을 때에 "한반도에서 39선 이북에서 중립 지대를 설치해 일본 군대를 주둔하지 말 것"을 조건을 달아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수긍하려 했었지요.

결국 일본은 이 조건을 거부해 전쟁으로 갔었지만 만의 하나에 이토 히로부미 의견대로 러시아와 타협했다면 아마도 39선 이북에서의 러시아의 경제적 침투부터 만만치 않았을 걸요. 이외에는 알렉세에브 총독과 같은 그 당시 러시아의 고관대작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반도까지의 유라시아의 문명화의 사업"을 운운하면서 결국 러시아가 이기기만 한다면 한반도도 마땅히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야 할 것임을 시사했었지요.

그런데,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 요구와 그 지역에의 경제적 침투 계획 (한반도 분단의 아주 거친 청사진이라 할까요?), 마산포와 목포에서의 부동산 사들이기 (해군 기지 때문에), 그리고 모호한 "러시아 영향권에의 한반도 편입" 이야기는 사실이었지만 여태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신뢰한다면 "한반도 식민화"의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러시아의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898년에 주한 러시아 공사의 함경도 병합 관련 의견서, 1899년3월18일의 알렉산드르 미카일로비치 대공의 한반도 이북 지역 "경제적 장악" 관련 의견서 정도는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계획서"의 전부입니다. 물론 연구자들의 의도적인 은폐나 문서 보관의 부실성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일단 1900-1904년간의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정책 흐름으로 봤을 때에 아마도 대일 승리시에도 계속 이용익, 이범진과 같은 친러파 대리인들을 내세워 고종에게 따낼 것 따내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영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서는 식민화는 물론 한반도의 보호국화마저도 제정 러시아로서는 이득에 비해 손실이 너무 많이 가는 무리수이었을 걸요.

물론 러시아가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영국 등의 유럽의 매이저들에 비해 형편없이 약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국제적인 약탈 행위를 벌였을 때에 러시아가 영-불-독에 비해 양심적인 적은 없었지만 일단 산업적 기반과 재정이 약한데다 파리 시장에서 늘 돈을 꾸어 적자를 메꾸는 주제에 눈치 볼 게 하도 많았지요. 그래서 "일본에 안먹혔으면 러시아에 먹혔으리라"와 같은 일부 수구주의자의 주장에는, "러시아가 일본보다 좋은 게 없었지만 일단 패권 국가 영국과 신흥 패권 국가 후보생 미국의 친구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이었기에 러시아의 승산이 어차피 적었으며, 러시아가 이긴다 해도 영국 등의 압력이 계속돼 아마도 계속 고종의 정권을 이용하여 간접적 영향력 행사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리고 구체적인 식민화 계획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방점은 '아직'에 있는 것인가?)

07. 01. 19.

Корея в огне войны

P.S. 내친 김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터넷서점 오존(www.ozon.ru)에서 '한국(корея)'을 검색해봤다. 음반과 DVD까지 다 포함해서 74종의 목록이 뜬다(엉뚱한 책들이 껴 있기 때문에 진짜 관련서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다). 최근에 나온 책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흥미를 느낀 건 '20세기의 역사' 시리즈의 하나인 <전쟁의 포화 속의 한국>(2005)이다. 544쪽의 두툼한 책이고 발행부수는 1,000부. 제목 그대로 1950-53년까지의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 3인이 모두 러시아학자들이다. 그간의 '비밀'에 대해서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소개도 포함돼 있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볼 만한 책이다. 한데, 오존에는 품절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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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오래된 정원' 누가 지켰나

며칠전 '잠적할 때 들고가고픈 책'을 꼽으면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읽은 신문에서 공감하며 읽은 칼럼이 이 '오래된 정원'에 관한 것이어서 옮겨놓는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씨가 쓴 기명 칼럼이다.

경향신문(07. 01. 19) '오래된 정원’ 누가 지켰나

마흔 살의 전문직 여성 K는 8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 주변을 오가다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인문학을 전공한 운동권이었다. 둘은 오랜 연애 끝에 ‘동지적 사랑’으로 결혼했다. 남자는 결혼 후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사회운동 언저리를 맴돌았다. 가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여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자는 불만이 없었다. 그게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지적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가 벌어 주는 돈으로 공부를 하고 바람을 피웠다. 둘은 이혼했다. 여자는 현재 유통되는 ‘운동권’이란 말에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또 다른 386여자 Y는 학생운동을 하다 수배당한 경험이 있다. 그녀 역시 운동권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초기 둘은 잘 지냈다. 남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여자 역시 안정된 직장을 구해 사회생활을 잘했다. 몇 년 뒤 둘은 이혼했다. 남자는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스러움을 찾았고, 여자는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대학시절 여성스러움을 과도하게 억압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여자는 요즘 20대 여성들을 보면 부럽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386 여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386 운동권’이란 말에 까칠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적지않다. 적당히 운동한 경험이 있는 여성일수록, 결혼이든 연애든 운동권 남성과 사적 관계를 맺은 여성일수록 그런 성향은 더 강하다. 아마도 진보를 표방하는 시대와 남자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이제 80년대를 여성에겐 매우 억압적인 시대로 인식한다. 남성의 경우는 다르다. 운동을 했건 안했건 80년대를 고통스러웠지만 아름다웠던 과거로 회고한다. 미디어에 재현되는 80년대의 이미지도 거의 예외없이 이 어조를 깔고 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정치민주화의 주역이 자긍심에 차서 뒤돌아보는 자신들의 청춘시절이 80년대다. 진보를 자처한 386세대에 유난히 여성들의 존재가 미미하게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상수 감독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 원작의 전형적인 운동권 후일담이지만 영화는 좀 다른 각도에서 80년대를 본다. 시국사범으로 수배중인 인물과 그를 숨겨주는 시골 학교 미술교사의 러브스토리인 이 영화의 초점은 여자 주인공에게 맞춰져 있다. 분신을 하는 인물도 여자이다. 그들은 남자에 ‘엮여서’ 운동에 참여한다. 반독재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운동의 방식은 철저하게 타인의 방식을 강요당한다. 그 방식은 남성의 방식이자 폭력의 방식이다. 그것이 시대적으로 불가피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영화는 시대의 요구에 이끌려 자신의 방식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386 여자들을 그린다. 그게 어디 여자뿐이겠는가. 반독재라는 대의와 투쟁이라는 방식의 부조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 전 한 일간지에 학생회장 출신의 386 정치인 두 명과 기자의 대담이 실렸다. 거기서 두 정치인은 ‘386 진보이념은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살아보니 분배가 아니라 생산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나는 참 웃겼다. 80년대 386세대의 노고가 몇몇 학생회장 출신 정치인들의 현재와 과거로 재단되다니. 실패한 것은 386의 이념이 아니라 386의 노고를 개인적 권력으로 전유한 정치판 386들의 미숙한 현실정치 일터인데도 말이다. 진보 이념은 일상적인 실천에 의해 사회속에 점진적으로 스며들지언정 ‘나의 단기적 성과’를 갈망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좀체 이룩되진 않는다. 정원을 오래 지키는 것은 무명의 잡초와 들꽃들인 모양이다.(남재일/ 문화평론가)

07. 01. 19.

P.S. 필자는 기자 출신의 언론학자이며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비평으로 잘 알려져 있다(나는 <씨네21>의 칼럼란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듯하다. 김규항만큼 날카롭지는 않지만, 이 칼럼을 읽어보니 오버하지도 않는군). 대표작(?)은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강, 2006). 제목이 액면 그대로 저자의 포지션을 말해주는 듯하다. 작년에 구내서점에서 자주 보고 자주 지나쳤던 책인데, 언제 도서관에서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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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신영복 교수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의견..

신영복 교수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의견..여기 오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요?
원문 :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6/12/021128000200612280641043.html

개인적으로 미흡한 면도 있고 해서 생각중입니다..다른 분들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강변 :: 사람님, 글 잘 읽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나름의 생각을 한 뒤에 글을 올려보고싶군요. 고맙습니다.    (218.50.247.xxx) 삭제
숨쉬는 바람 :: 잘 읽었네요. 전 읽으면서 대체로 고개가 끄덕거려졌어요.    (84.56.100.xxx) 삭제
사람.. :: 교수신문의 원래 기사는 여기에 있습니다.. target=_blank>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0874


일단 우선 제가 미흡하게 느끼는 것은 강준만 교수가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고 권하는 대상이 된 그 '진보'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입니다..그것이 진정으로 진보일(혹은 였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61.111.181.xxx)
삭제
joylss :: 사람../동감입니다. 진보=민주화 세력=노무현,김대중 정부, 라는 등식에 기초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핀트가 맞지 않아 생뚱맞다는 느낌과 함께요.    (61.96.61.xxx) 삭제
농협인 ::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탄핵 찬성을 아직도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222.112.42.xxx) 삭제
강유원 :: 신영복에 '공감'하는, 또는 미워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진보진영으로 간주하고,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의 그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정치적 호소문이라 생각합니다.    (211.49.80.xxx)  
숨쉬는 바람 :: 음..전 좀 다르게 읽었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정치적 방향성 뿐만 아니라, 진보를 그것이 터잡고 있는(혹은 있어야만 하는) 윤리적인 방향성, 즉 공적 신뢰의 회복을 통해서도 규정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강준만 교수의 주목을 끌었던 것도 이 부분인 것 같구요.

'진보라는 용어 아래에서 포섭되는 대상들, 주체들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전'에, '진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성찰적 계기를 통해 진보로서 존속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 아닐까요?    (84.56.92.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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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 노무현에게(으로부터) 좌절한 자들, 돌아섰는데 습관 때문에 자꾸 돌아보(게 되)는 자들, 현재도 노무현을 지지하거나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내심 그리고 있을 법한 가공된 노무현의 얼굴 - 자신들이 그린 얼굴을 들여다보며... 근데 누구세여?를 반복하게 만드는 - 을 신영복으로 상징조작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묶어보려는 대국민 호소문이자 자기 머리속에서 뽀인트 잡고 던진 떡밥에 낚시글입니다. 과거 민주당의 이데올로그라는 세간이 규정한 입지를 부정하고 민주당에서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당선 됐을 당시, 들뜬 분위기에서의 인터뷰에서 튀어나온 말실수가 저를 약간 웃겼는데 앞으로 얼마나 재미를 줄지 아직은 알 수 없군요.    (203.90.49.xxx) 삭제
사람.. :: 강유원,회사원/두분께선 강준만 교수의 글 내용 자체에 대한 검토의 결과로 그런 표현(정치적호소문,떡밥에 낚시글)을 하시는 건가요?..아니면 정치적 의도가 뻔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보시는 지 궁금합니다..저 개인적으로는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생각이 어려워서 헤메고 있습니다만 ..;;    (211.193.210.xxx) 삭제
강유원 :: 사람../ 글 내용을 검토한 다음에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정치적 의도는, 아주 간단히 말하면 '대선 후보 신영복'이라는 것입니다. 좌파와 진보로서의 신영복은 그리 매력이 없지만, 대선 후보라면 달라지겠지요. 그의 정년퇴임 공연에, 노선 불문하고 모여든 사람들 -- 특히 삼성의 이학수까지 왔으니 -- 을 떠올려보면 그의 눈에는 썩 매력있는 인물로 보이겠지요. 강준만 교수는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등의 저작을 통해 나름대로 해온 바가 있기도 하니 그런 혐의가 가는군요.    (211.49.80.xxx)  
사람.. :: 강유원/대단한 유머감각이십니다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 ㅎㅎ..
다른 말씀을 좀 드리자면..이 사이트에서 신영복 교수가 몇번 거론된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제 생각으론 강교수가 든 5가지 '진보'측의 신영복 평가가 이 사이트에서 거론된 것을 거의 압축 요약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따라서 강교수의 반론은 제가 과문해서 인지 몰라도 상당히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우선 들었습니다..그래서 직접적으로는 그 때 신영복 교수에 대한 평가를 주셨던 이 사이트 딴분들의 의견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제가 "미흡"(반대가 아니고 미흡입니다)하게 느끼는 부분은 3 논쟁(?) 당사자(강준만/신영복/반론자 그룹) 모두에게서 비롯됩니다..아직 생각중이지만 사실 3 논쟁 당사자의 미흡하게 보이는 측면을 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중입니다..또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61.248.180.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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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 사람../ 강준만 교수의 상상력 -- 물론 본인은 엄밀한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라 하겠지만 -- 에 정치공학적인 잔머리를 조금 가미해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선 후보 신영복', 그 파괴력이 꽤나 커보입니다. 소주에 자기 글씨를 새겼으니 말입니다.    (211.49.80.xxx)  
회사원 :: 사람.. / 강준만교수의 스타일입니다. 먼저 애매하게 말을 꺼내지 않고 구체적인 인물을 먼저 거론합니다. 이는 그 다음에 따르게 되는 주변의 반사적 반응들을 상대적으로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술입니다. 애매한 것들은 난리를 죽여도 힘의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인물을 부정하거나 찬성하거나 쌩까거나 시선은 강준만의 포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의 첫번째 기술은 대략 그렇다고 보기에 재미있어 해본 말입니다. 의도가 대선 개입 자체에 있다고 보기에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저는 대선개입 외에 강준만의 기고문에서 다른 것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란 다른 가치들을 상상하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종종 비판 등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판은 무기처럼 구체적인 육체에 닿지 않으면 무기력합니다. 강준만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과거 그의 말실수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도중 아주 짧은 호흡으로 지나갔는데 '우리 민주당'이라는 다섯 음절이었습니다만 다른 내용으로 급히 집어 삼켰지요. 결론은 대선분위기에 강준만에 아 재밌다 입니다. 더불어 민노당에서 진중권처럼 파토스 만땅인 자가 하나 나와서 설레발친다면 좀더 집중된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습니다.    (203.90.49.xxx) 삭제
dan :: "진보는 강유원을 다시 사색하라" 이런 글은 정녕 볼수 없단 말입니까?    (59.4.16.xxx) 삭제
강유원 ::

dan/ 강유원은 진보였던 적이 없으니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겠습니다.^^    (211.49.80.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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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같은 데에 관심 가지는 것도 이젠 질린다만^^ 넘 재밌어서 펐다.

강준만의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는 글을 읽고는 원론적으로 생각했는데 강유원이 이 글은 신영복을 대선에 내 보내라는 뜻으로 재해석한 걸 보고 포복절도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럴 듯한 생각인 듯하다.  킹메이커로서의 강준만의 위상을 놓고 보면 그가 이제 움직일 때가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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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책들을 한번씩 점검하고 있는데,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도 그 중 한권이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이번에 옮겨놓은 건 오마이뉴스의 리뷰이고 필자는 우연찮게도 정민호 기자이다. 며칠전 <금지를 금지하라>에 이어서 연이어 정기자의 글을 옮겨놓는 셈이 된다(그가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는다는 게 허언은 아니겠다). 책상맡에 책이 놓여 있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 보니 나는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다. 내주쯤에나 관심있는 장들을 좀 훑어볼 참이다. 마음가짐을 다잡는 차원에서 리뷰도 다시 읽어본다.  

오마이뉴스(07. 01. 02) 미국을 향한 미국 역사학자의 냉철한 비판!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가 있다. 바로 자유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자유의 나라임을 강조한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철저하게 자유의 나라라고 말이다. 동시에 부정하고 있다. 미국이 말하는 자유는, 미국이 지키고자 하는 자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그 의미는 언제나 변했을 뿐더러, 또 미국을 좋아한다고 해서, 미국에 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중심에 있는 자들만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아무리 자유의 나라임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누구나 그것을 누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소개되는 에릭 포너는 우리에게 낯선 학자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인정받은 실력파 역사학자로 입지를 굳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이란 매카시즘이 풍미하던 그때, 소위 '빨갱이' 집안의 자식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색안경 낀 사람들은 그를 미국을 망치는 인물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주요 역사학 단체의 회장을 지내며 영향력을 키워왔다. 편견을 뛰어넘는 실력이 있다는 말일 게다.

그 실력이란, 사각지대를 볼 줄 아는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에릭 포너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공산당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흑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 시절 흑인의 인권에 관심을 갖던 이가 누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성장한 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남들과 달리,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르다.

에릭 포너가 이야기 하는 진정한 '자유'
앞에서 언급된 '자유'로 생각해보자. 미국이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미국인들이 스스로 자유롭다는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자유와 반대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즉 '자유의 땅, 미덕의 현장, 피압박자의 피난처'라는 주장을 펼치게 하려면 상대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바깥 세계를 과장해서 부정적으로 그려야 한다. 동시에 스스로 미국을 특별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운동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독립 전쟁을 "인류 역사에서 새 시대를 열어젖힌 사건"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미국과 나머지 인류의 차이를 부각"되는 계기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 옳든 그르든 간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이 퍼질 수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에릭 포너의 답이다. 그는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자유가 무엇인지 강의하려고만 들지 말고 바깥 세계에도 뒤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유를 수호하고자 한다면, 자족적인 독백에 그치지 말고, 바깥세계와 주고받는 대화가 돼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요즘의 미국의 행동을 본다면, 특히 권력의 나팔수가 된 이들의 말이 무성할 때에, 이 말의 의미는 그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미국엔 왜 사회주의가 없을까?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 외에도 진지하게 탐구할 것들을 던져주고 있다. 남북전쟁이 끝날 때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이뤄졌다고 알려진 '화해'는 사실 백인들끼리만 했다는 것, 또 흑인들을 차별하면서 모순적으로 자유를 주장하는 태도를 탐구하는 것 등이다. 물론 이제껏 흑인 문제를 지적하는 책들은 많았다. 그렇기에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뭐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다른 의미가 보이고 있다. 그것은 날카롭다는 것이다.

흑인이 차별받았으며, 또 지금도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만 해도 자주 듣고 있다. 그럼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또한 그들을 이상하게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인식 속에는 암묵적으로 '우리'를 '미국인이라고 믿는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에릭 포너는 오랜 역사부터 거슬러 오면서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는 현존하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 착각이 어울릴 때, 이 의미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자유에서 배제된 문제들은 지나간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중요한 것은 흑인만 그런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이 아닌 모두가 흑인처럼 대우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말이다. 흑인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 셈인데 이 책은 그것을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눈길을 끄는 것으로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는가?'하는 주제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을까? 유럽만 하더라도 사회주의가 있다. 그들은 선거에 나서서 꽤나 큰 지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미국은 그 단어와 거리가 멀다. 결벽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에릭 포너는 그 이유를 다양한 측면에서 풀이하고 있는데 그 과정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지금껏 떠올리던 미국과는 다른 모습이 보이는지라 몇 번 놀라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요즘 유행하는 역사책들과 달리 흥미진진한 주제를 다룬 것은 아니다. 흥미와는 거리가 먼, 오랫동안 생각해야 할 것들을 던져주는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매력적이다. 미국하면 떠올리던 이미지들, 특히 맹목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졌던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접근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목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정민호 기자) 

07. 01. 18.

P.S.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란 주제에 관련하여 떠오르는 책은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란 부제를 가진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립셋의 논의들은 포너 자신도 참조하고 있는데, '미국 사회주의의 역사'에 관해서라면 권위자가 아닌가 한다. 예전에 관련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작년에 나온 미국학 관련서들 가운데에서는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과 함께 나대로는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아두고 있다(한데 전자는 아직 구입을 못했다. 목돈이 나올 구멍을 알아봐야겠다).

참고로,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란 질문은 독일의 사회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처음 던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사치와 자본주의>로 소개된 사회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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