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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레디앙'의 토요연재-책읽기에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의 필진들이 가세를 했다. 지난 11월부터의 일이다. 게스트 필자로 참여했던 잡지를 부분적으로 온라인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이게 '중복' 게재되는 기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꼭지를 읽다가 어제 인디고와 관련해서 올린 페이퍼와도 연관되는 '인문학 위기'에 관한 기사 세 편을 연달아 옮겨놓는다(글이 뱀 꼬리를 물듯이 이어진 탓이지 나의 계산 탓은 아니다). 필자는 <텍스트>의 권희철 기자이다.  

레디앙(07. 01. 2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지난해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 이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수학사의 난제 ‘푸앵카레의 추측’을 푼 뒤 인터넷에 이를 올렸다(*페렐만에 대해서는 나도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다). 학계는 응분의 보상을 하려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최근에는 연구소 일도 그만두고 노모와 함께 은둔해 살고 있다. 이처럼 몇 안 되는 제한된 정보들이 페렐만에 대한 모든 것인데, 그럼에도 페렐만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유별난 삶을 살아서일까. 그런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만한 존재들을 학계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런 개인을, 그런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제도와 사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학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해’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비 정신을 촉구해야 하기 때문일까. 황우석은 이런데, 페렐만은 저렇지 않느냐면서.

페렐만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잖으신 학자분들께선 ‘인문학 위기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일갈하고 나섰다. 실상 양치기 소년의 호소에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글자깨나 쓴다는 분들이라면 저마다 위기의 징후를 담지하고 분석한 지도 너무 오래된 일이니, ‘죽었다’ ‘위기다’ 소리는 지겹기도 하고 뒷북처럼 느껴져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강정구 교수 강의를 수강한 학생에 대한 재계의 공갈 협박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분들, 이건희 철학박사 학위 수여가 무산되자 매체를 빌려 읍소하거나 보직 사퇴를 결행하던 분들, 학생들이 좀 버릇없게 굴었다고 교문 밖으로 영구히 쫓아내신 분들과 이에 침묵으로 눈감아 주던 분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자들만의 위기’라는 조롱을 받을 만도 하다.

다시 페렐만으로 돌아오자. 페렐만의 아래와 같은 발언은, 그가 단지 돈 키호테나 세상을 등지고 은둔해 사는 계룡산 도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다수의 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직하다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냥 수용하는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다.”(박노자, 「페렐만이 괴짜라고?」에서 재인용)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흔히 학문의 위기, 좁게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면,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사리가 밝아 고전을 탐독하는 등의 행위를 수지타산 맞지 않는 것으로 몰아가는 사회를 탓하게 된다. 인문학 위기의 발언은 곧 문명 비판이 된다(싸잡아 다 욕할 수 있는). 좁게는 교육을 비롯한 관련 제도의 허점을 지적할 때도 있다. 넓게는 ‘삶의 무늬를 새기는’ 게 인문학의 본령이라며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양양한 낙관론과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라며 비분강개의 목소리를 높이는 비관론이 묘하게 공존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도 사태를 충분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페렐만에 대한 상상은 질문 하나를 덧붙인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의 위기인가, 아니면 학문 권력의 위기인가. 몇 개의 글을 사례로 삼아 인문학 위기의 논의를 따라가 보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추적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문제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다시 흩뜨려놓는 꼴이 될 것이다.

지난 겨울 복간된 『비평』 13호의 한 꼭지(‘인문학과 인간적인 것’)에는 한국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김우창과 이어령의 글이 실렸다. 먼저 김우창의 글을 본다. 그는 페렐만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그가(페렐만이) 보여준 것은 간단히 말하여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하여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동시에 거꾸로 우리가 그러한 자유 선택의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하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p.94)

옳으신 말씀이다. 학문 차원까지 갈 것 없이, 뭣 하나 제 힘으로 제 의지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좁게는 가족의 요구에 등 떠밀려 살아야 하고, 넓게는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읽어보자.

“불편한 마음들이 이는 것은 학문 연구가 연구자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대한 사실적인 원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작은 일들에서 표현되고 있는, 근본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오늘의 정세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학문의 자유와 가치의 쇠퇴에 대한 당연한 불행의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p.95)

김우창의 발언은 자유롭지 못한 개인 이전에 그것을 야기하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즉,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 조건이 어떻기에 페렐만 같은 경우가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흔히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많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 특유의 굴절된 경험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우창의 답은 다르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존재를 위한 여유라는 관점에서 우리 사회는 극히 좁은 공간밖에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체제보다도 우리의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 일일 것이다.”(p.98)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이라면,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말하려는 것일까. 또는 그런 분위기 아래 도저하게 깔려 있는 거대한 ‘문화의 유산’을 언급하려는 것일까. 따라잡기 쉽지 않은 사색이다. 다만 김우창의 글을 읽으면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그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게 된다. 인문학의 위기와 사회 위기는 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독자는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억측해 보자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 또는 문화의 위기가 곧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의 장을 펼치게 된 것은 수돗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 뒤에 그리고 땅속에 묻혀 있는 수도관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온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p.85)

이어령 또한 인문학 위기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권유한다. 물이 말랐는데 다들 모여 수도꼭지만 바라보거나 그것만 고치면 죄다 해결될 것처럼 구는 건 옳은 해법이 아닐 것이다. 이어령에게 인문학이란 깊은 수원(水原)을 탐색케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문사철(文史哲)의 분야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밝히고 깨닫게 하는 학문입니다.”(p.86)

그렇다면 이어령에게 있어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발언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단순하게 말해서 휴머니티라는 말 그대로 인문학의 힘은 시스템을 중시하는 다른 학문과 달리 수리(數理)나 기계가 할 수 없는 공감empathy의 능력을 길러주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공감’은 타자에 대한 ‘열림과 소통’의 기능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이 글로벌화하는 세계 환경 속에서는 절대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p.88)

굳이 ‘절대’라는 단정적 화법을 쓰면서 ‘글로벌’까지 말해야 하는가 싶지만, 문장의 골자는 ‘공감’에 있음을 주지한다. 현 세태가 공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인문학의 처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인지, 인문학의 무능으로 개인과 사회의 공감 능력마저 상실되었다는 것인지, 인문학 내에서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지, 그 모두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기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또 하나의 접근법을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는 것. 김우창이 유일 체제의 문화를 언급했다면 이어령은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집중한다.

“우리는 그동안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사용하다가 인문학의 고립과 위기를 자초했는지도 모릅니다.”(p.84)

상식선에 그치는 분석이지만, 그 상식이 무서울 때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인문학을 멀리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인문학 고유의 난해한 어법과 문체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쉽게 쓰고 말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꽤 오래 전 일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쉬운’ 고전 읽기와 ‘쉬운’ 철학·역사 서적 등이 서가를 잠식했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파리 날리고 하품만 나와도, 바깥에서 열리는 각종 인문학 강좌들은 반응이 뜨겁다. 매체는 항상 인문학 위기와 위의 사례들을 대비하여 설명한다. 그것이 맞다면 인문학 위기는 그저 학계의 위기, 제도의 위기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적어도 출판계와 강단 바깥의 인문학이 건재하다면 인문학 위기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어야 할 텐데 사태는 그렇지가 않다. 단지 강단만의 위기라고 단정 짓기엔 사태를 호도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문학의 소통 능력은 해당 인문학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소통 문제를 위기의 본질로 삼기보다는 위기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유력한 시험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이 논의를 보충할 만한 책 한 권이 있다.('희망의 인문학'으로 이어짐) 

레디앙(07. 01. 20) 모두와의 소통 또는 낮은 곳을 향한 소통

“모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다양성과 보편성 그리고 옛것과 새것이 항상 공존하는 둥지의 알들이야말로 인문학의 희망입니다.”(p.91)

이어령의 ‘둥지의 알’로 충분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소통의 측면에서는 얼 쇼리스가 쓴 『희망의 인문학』이 꽤 적절한 사례가 될 듯싶다. 물론 이어령은 모두와의 소통을 말하지만, 얼 쇼리스는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묻는 데서 차이가 제법 크기는 하다. 얼 쇼리스의 소통은 싸잡아 모두가 아니라 낮은 곳과의 소통이다.

책이 처음 소개된 것은 2004년 8월의 일이다. KBS의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클레멘트 코스 이야기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클레멘트’라 붙여졌지만, 이 말은 야구선수이자 선행의 대명사 ‘로베르토 클레멘테’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안팎을 살피려 취재한 도중 만난 번역자와 어느 사회복지사 얘기에서도 그 충격적 경험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사례들이다. 책이나 예술 근처에 가지도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놀라울 만한 변화.

“1996년 12월, 헨리 존스는 바드대학 흑인학생회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 데이비드 이사코프는 자신의 생물학 수업에서 과일파리를 이종 교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수산나는 그때까지도 화학자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아주 뛰어난 어느 교수의 수업을 듣고 난 다음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p.265~66)

더 나아가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 가난한 학생들의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책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가난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들이 있다. ‘그 사람은 게으를 거야’, ‘타고난 성품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등 가난의 이데올로기라 불릴 만한 생각부터 적절한 동기 부여와 직업 교육과 알선이 뒤따른다면 빈곤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얼 쇼리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기존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존 관점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가난에 대한 기존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그런 관점이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p.24)

가난이 선천적이라는 생각은 편견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일반인과 빈자를 분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직업 교육이나 훈련이 소득의 크기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얼 쇼리스가 생각하는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비니스라는 재소자에게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냐고 묻는다. 비니스의 대답.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p.168)

이 대화는, 얼 쇼리스가 미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기획하고 곧장 행동에 옮기게 만든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의 언급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읽는다.

“비니스는 고대 고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p.173)

인용문에서 보듯, 얼 쇼리스 생각의 기본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교양과 덕성을 갖춘 시민에 있다. 그런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든 사례들은 이러한 생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얼 쇼리스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책이 번역되자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런데 “가난 벗어나는 열쇠, 인문학”, “빈자에게 적선 대신 인문학을”과 같은 기사 제목을 보게 되면 책의 내용을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 쇼리스 말마따나 인문학 교육이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삶의 동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야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곧 부富로 직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여전히 배고픈 학문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경험이니까. 마음의 부를 말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우려 또한 든다. 요컨대 이런 논의는 한편으로는 (그 의도와 달리) 빈곤의 실제와 원인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니 넘어가자. 언론의 과장된 홍보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클레멘트 교육이 그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자. 빵과 장미가 있다. 세상은 지금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줄 빵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장미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미가 빵을 산출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경험적으로’ 옳(았)다. 사실상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곤란하다. 논리적 판단을 떠나 유의미한 사회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설픈 논리로 가늠할 수 없는, 책의 표현을 빌자면 ‘클레멘트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장미를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장미가 있기나 한 것인가. 혹여 그 장미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성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말하는데 한쪽에서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인문학이라……. 의문에 대한 접근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장미는 없다는 것이 하나라면, 또 하나는 ‘낮은 데로 임할 수 없는’ 한국 인문학 자체의 문제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주관한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설립을 위한 실제’ 워크숍 자료집을 보며 우려는 거의 불신이 되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에 참가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 요약문은 이랬다(*이 자료는 처음 보는데, '저명한 교수들'답다).

“자기 의식은 자기 확신은 물론 타자로부터의 인정도 필요하다. …… 전자는 자립적 의식으로서의 주인Herr,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으로서의 노예Knecht.” “페이디다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논의가, 이런 교육이 어떻게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정치적 삶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과문한 기자로서는 판단키 어렵다. 다만 적어도 위에서 이어령이 언급했던 ‘공감’의 문제를 상기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는 거의 소통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장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장미를 전달하는 태도가 고압적이다. 게다가 이 장미 전달식 주최 측의 마인드를 알 수 있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문학 강의를 위한 강사의 조건은 사회적 지명도, 강의 실력, 노숙인에 대한 애정 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적 지명도는 참여자들의 자긍심을 세우기 위해서 중요하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현실의 인문학은 어떠한지, 인문학이 죽음에 이르렀을 만큼 한심한 작태라면 그 대안적 인문학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언사이다. 혹여 이들에게 인문학이란 ‘뽀대 나고’ ‘그럴싸한’ 게 아니던가. 물론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음과 같은 노숙인 수강생들의 반응을 보자니 ‘환상의’ 허울 좋은 장미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전달된 셈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나 혼자서 생각하는 공간이 없어서 불편하다. 내가 편안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과연 내가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내가 원하는 이상이 높아져서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책이 말하는 자기 성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그들만의 ‘성찰’.

이 책은 양면적인 문제작이다. 빈곤의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그 해결책을 달리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인문학 교육을 염두하고 읽노라면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교육 예술’이라는 문화예술 관계자 워크숍에서 몇몇 논자들의 지적도 기자의 이런 시선과 맥을 같이 한다.

“클레멘트 과정에 비록 비판적 글쓰기가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원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재 하부구조 자체를 파고드는 직접성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목적은 언젠가는 그 직접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라는 김지섭의 말이나 “텍스트 중심주의에 있는 아카데미 인문학은 정전 해석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세계와의 대화, 삶과의 대화, 현장과의 대화를 외면하는 인문학자 또는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풍토에서 ‘대화’는 사교에만 필요할 뿐입니다”라는 이광준의 지적이 그렇다.

요컨대 문제는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적 적용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이미 노출된 인문학의 여러 문제들이 한참이나 선행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고 진정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에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저 여러 양상들을 보면서 문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간단치 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인문학 위기 이전에 인문학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그러한 편견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그것은 한국의 인문학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공부』 서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읽힌다.('장정일의 공부'로 이어짐)

레디앙(07. 01. 20) 중용, 사유도 고민도 없는 허위거나 기만

장정일은 평소 존경받던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의 엉뚱한 말들에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떤 동기에 의해 사상적 전향이 이루어지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장정일은 그 원인을 잘못된 중용의 태도에서 찾는다.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 애쓰다 보면 현실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발언을 할 수밖에 없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p.5)

그리고 이어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p.4~5)

솔직하면서도 읽는 이를 뜨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중용의 태도와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조차 장정일의 고백을 듣노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용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 고백이 날카로운 것은, 중용 비판으로 사회와 문명의 허위를 까발리는, 하나마나한 그럴싸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용을 취하려는 태도를 앎(무지)의 문제와 연결한다. 이는 인문학 위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한국에서 인문학이 잘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의 ‘둥글게 둥글게’ 의식/무의식들 때문이다. 장정일을 응용하자면, ‘중용을 취하고 있으면 인문학의 허세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교양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인문학의 중용은 인문학의 결여였다.’ 책의 세부 내용은 물론 서문의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꼼꼼한 텍스트 읽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장정일은 스스로에게 공부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그런 공부의 과정 자체란다.

공부하겠다 마음먹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고백은, 인문학에서 커다란 범위를 점하고 있는 문학 입장에선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무게를 지닌다. 허세와 허위에 빠진 철학도 문제라지만, 상서롭기 그지없고 세상에 태평하며 나오는 것마다 문제작 범주에 드는 문학 판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 시인의 참고서지는 오직 시집밖에 없으니, 시인이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p.5~6)

07. 01. 22.

P.S. 개인적으론 기사를 며칠 전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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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ffmm > 걸작인줄 몰랐던 걸작, <강철군화>
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평점 :
절판


 

강철군화 (1907년)


지은이: 잭 런던

우리말 옮긴이: 차미례

펴낸 곳: 도서출판 한울

펴낸 날: 1995년(9쇄)

읽고 평하는 이: 고장원

작성일자: 1999년 6월 10일 


우리는 뉴욕행 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우리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시카고를 향해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세 대나 우뢰와 같이 지나쳐 갔다. 그 열차는 
남루한 모습의 미숙련 노동자들, 새로운 밑바닥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시카고의 재건을 위해 징발된 노예들이에요."어니스트가 말했다. "아다시피, 시카고의
 노예들은 전부 살륙되었으니까요."

(본문 310~311쪽 중에서 발췌)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내가 올해 읽은 모든 종류의 글 가운데 가장 전율할만한 
걸작이다. 이것이 옥석인줄 모르고 따분한 사회과학 교양 입문서 정도로만 여겼던 내 
얄팍한 선입관이 불과 몇 장을 넘기자마자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난생 처음 '전율'이란 표현을 쓰게 만든 <강철군화>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야말로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하나는 칼 막스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본론>을 수백 번 읽어도 깨닫지 못할 삶의 진실과 현실의 논리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서술한 논리정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숨쉬는 듯한 문체로 내달리는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이다. 

솔직히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떠나서 <강철군화>가 이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소설인 줄은 몰랐다. 철학자나 이념가들의 머리 속에서 떠돌법한 개념을 바로 
우리의 현실에다 곧바로 대입하면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음모가 얼마나 흉폭하고 
잔인한가를 (감정적이 아니라) 아주 과학적이고 현실감있게 전달하는 작가 잭 런던의 글재주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그 결과 예프게니 자먀찐의 <우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고전 과학소설의 반열에 들면서도 <강철군화>는 그중 가장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우리>는 체제의 검열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상징과 은유에 깊이 빠져 있는데 비해, <강철군화>는 올곧은 표현으로 세상의 문제를 설명한다. 한울 출판사가 이 소설을 펴낸 것은 사회과학 관련 문학선집 출간의 일환이었던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충분히 과학소설의 울타리 안에 넣어 볼 수 있다. <강철군화>는 과학소설 하위 장르인 '미래사'나 '대체역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험악한 노동계의 현실을 전투적으로 헤쳐나간 강인한 한 인간의 일대기가 7백년 후에 발견되어 재조명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사'이며,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1910년대 이래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이 도를 넘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골육상쟁으로 비화한다는 가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 역사'다. (그러나, 물론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작품의 설정에서와 같은 우려를 하게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여건이 무척 열악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철군화>는 노동계급이 비참한 삶에서 허덕이던 20세기의 미국에서 활동한 한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내 애비스 에버하드의 시점에서 일단 기록된 문헌이 이미 사회주의 세상이 되어버린 700년 후 시대의 한 문헌학자에게 발견되어 덕지덕지 주석을 달은 채로 다시 재출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미래 학자의 주석은 어디까지나 가공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1800년대 말엽부터 1910년 전후까지의 노동환경에 대한 진짜 정보를 담고 있어 헷갈릴 정도로 그럴듯하다.) 

작가는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애비스의 문체는 상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서술하되, 곳곳에 추가된 미래 문헌학자의 주석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체를 가장(?)한다. 이같은 두 가지 상이한 스타일의 저술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 전체적인 총합이 객관적인 느낌이 들도록 기여한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는 투철한 의지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핵심 주인공 같지만 작품이 진행될 수록 초점은 그 아내인 애비스로 넘어간다. 잭 런던은 왜 그렇게 처리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어니스트는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정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인본주의자의 이상적인 전형이다. 그래서 때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사람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캐릭터는 그의 이름을 '어니스트 에버하드'라고 지은 잭 런던의 의도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굳이 해석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노동계급에 충성을 다하는 정직한 사나이'가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애비스는 어니스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교수인 존 커밍햄의 딸로 아무런 아쉬움없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중산층 처녀였지만, 노동자 출신의 지식인 어니스트에게 감화되면서 계급사회의 비정함을 몸소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이자 이념적/ 행동적 동반자로서의 운명을 선택하는 진화하는 캐릭터다. 

독자들은 처음부터 신념이 확고한 어니스트에 감정이입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애비스와 함께 한발 한발 사회의 모순에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잭 런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다만 애비스가 어니스트의 계급결정론에 애초에는 반발하여 노동시장의 밑바닥을 직접 탐방하고 다니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너무 감상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중산층의 아쉬울 것이 없이 곱게 자란 처녀가 사회의 문제를 깨달았다 해서 그렇게 쉽게 행동주의자로 변모할 수 있을까?)

<강철군화>는 서두에서는 주로 사회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인 입장에서 토론과 논쟁 위주로 내용을 전개해나가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정도면 충분한 명분(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교두보)을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현장실습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은 사회학/ 인간학/ 정치경제학 교과서이자 자극적인 액션 어드벤쳐 오락물이 공존하는 희안한 플롯을 갖게 되었다. 

앞 부분의 토론도 명쾌하고 도발적이지만, 후반부에서 애비스 일행이 정부 비밀요원으로 위장하고 홍길동처럼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활약에서는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더우기 애비스의 눈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시카고 코뮨의 대혼란 속에서 군경이 합동작전을 펴서 수십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광경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잭 런던 자신이 어려서부터 저임금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처절하게 결단나는 꼴을 수없이 보고 겪은 덕분이라 한다. 

<강철군화>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 예언은 하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고 끝난다. (비록 막연히 먼 미래인 700년 후의 사회주의로 통일된 세계의 시점에서 주석을 담으로서, 미래가 가야할 길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하긴 자본과 노동의 대립관계를 소설 한편에서 결론까지 내린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잭 런던은 소설 서두에 등장하는 문헌학자의 해설을 통해 애비스가 이 회고록을 집필 도중 습격을 받아 황급히 이 문헌을 숨기고 달아나야 했던 것 같다는 추정을 덧붙이는 트릭을 쓴다. 그래서 실제로 이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져 있다. 결론과 행동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강철군화>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지고 각국의 이해득실과 속좁은 민족주의가 지역분쟁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강철군화>의 테제는 유효한가? 현실적으로 보건대, 국가와 민족을 떠나 노동자라는 계급의식 하나로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한데 뭉쳐 자본계급의 일방통행에 맞서는 날이 오리라는 잭 런던의 극적 설정은 그야말로 염원에 불과하다. 역사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실례들을 무수히 보여준다.(실례로, 지금도 코소보 사태를 비롯해서 미해결로 남아있는 수많은 국지전들의 동기를 생각해보라.) 

<강철군화>는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문제를 정교한 논리로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연대의식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자본계급의 대응수준을 너무 평가절하한 약점이 있다. 오늘날의 거대자본과 권력은 잭 런던이 예언한대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결탁해있는지 모를 정도로 한 몸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소설에서와 달리 권력과 자본계급의 과두지배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각성하는데 헷갈릴 정도의 선에서 늘 빵과 곤봉을 교대로 내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잭 런던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날카롭게 짚어내면서도 그가 이념적으로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자본계급의 과두독재의 부작용을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탈선하여 또 다른 전체주의 지배체제라는 기형아를 낳았다는 사실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지구 반대편에서 자먀찐이 <우리>라는 또다른 철학적 과학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체제가 박탈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잭 런던은 알고 있었을까. 

잭 런던의 <강철군화>와 자먀찐의 <우리>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두 작품 다 고국에서 금서 처분을 당한 것은 그 만큼 지배계급과 국가체제가 그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으며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솔직히 이 작품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강철군화>에 대한 진지한 리뷰는 커녕 단평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해야 몇 줄짜리 촌평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한참을 뒤져서야 찾은 것이다. 잭 런던은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가인지라 그의 동물소설과 모험소설에 관한 자료들은 많았지만 초창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원문 그 자체를 싣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듯한 인상을 준다. 어니스트 에버하드를 통해 잭 런던이 우려했던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처럼 다극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강철군화>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은 명쾌하고 단일한 대립노선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철군화>는 불의에 맞서 진실을 캐내고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이어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기록을 소설화 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이 땅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붇돋는 성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로 해석되면서 명을 이어갈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 덧붙이는 말


<강철군화The Iron Heel>는 첫 출판된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 이내 금단의 열매가 되어버렸지만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심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찌 독일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는데 그 법적 근거는 '반(反) 포르노그래피' 법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 소련의 일원이었던 국가들, 중국, 인도네시아, 캐나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북한이 있다.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 명단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에 구 소련과 중국, 북한 같은 공산국가들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비단 자본주의의 폐해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지배체제의 권력장악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잭 런던 같은 휴머니스트 출신의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들로부터조차 고립되고만 역설적인 케이스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1998년 개봉되었다. 제목은 <과두지배체제의 강철군화THE IRON HEEL OF THE OLIGARCHY >로서, 잭 런던의 오리지널과 칼 막스의 자본론을 원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음은 그 영화에 대한 간략한 정보다. 


<과두 지배체제의 강철군화>- Russia, 1998, 70분, colour

- 촬영지: 1990년대의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 각본/ 감독: Aleksander Bashirov

- 촬영: Sergei Lando, Vladimir Brylyakov

- 편집: Alexander Bashirov

- 디자이너: Vladimir Svetozarov

- 의상: Ekaterina Shapkaits, Ljudmila Romanovskaya

- 음악: Yevgeni Fedorov

- 제작자: : Rodion Ismailov, Alexander Bashirov

- 제작사: DEBOSHIR-FILM

- 출연: Alexander Bashirov, Rita Margo, Elena Yudanova, Inna Volkova, Natalia Pivovarova, 
Irina Sharovatova, Yevgeny Fedorov, Konstantin Fedorov, Alexander Voronov

- 나레이션: Rita M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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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ffmm > 걸작인줄 몰랐던 걸작, <강철군화>
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평점 :
절판


 

강철군화 (1907년)


지은이: 잭 런던

우리말 옮긴이: 차미례

펴낸 곳: 도서출판 한울

펴낸 날: 1995년(9쇄)

읽고 평하는 이: 고장원

작성일자: 1999년 6월 10일 


우리는 뉴욕행 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우리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시카고를 향해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세 대나 우뢰와 같이 지나쳐 갔다. 그 열차는 
남루한 모습의 미숙련 노동자들, 새로운 밑바닥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시카고의 재건을 위해 징발된 노예들이에요."어니스트가 말했다. "아다시피, 시카고의
 노예들은 전부 살륙되었으니까요."

(본문 310~311쪽 중에서 발췌)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내가 올해 읽은 모든 종류의 글 가운데 가장 전율할만한 
걸작이다. 이것이 옥석인줄 모르고 따분한 사회과학 교양 입문서 정도로만 여겼던 내 
얄팍한 선입관이 불과 몇 장을 넘기자마자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난생 처음 '전율'이란 표현을 쓰게 만든 <강철군화>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야말로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하나는 칼 막스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본론>을 수백 번 읽어도 깨닫지 못할 삶의 진실과 현실의 논리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서술한 논리정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숨쉬는 듯한 문체로 내달리는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이다. 

솔직히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떠나서 <강철군화>가 이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소설인 줄은 몰랐다. 철학자나 이념가들의 머리 속에서 떠돌법한 개념을 바로 
우리의 현실에다 곧바로 대입하면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음모가 얼마나 흉폭하고 
잔인한가를 (감정적이 아니라) 아주 과학적이고 현실감있게 전달하는 작가 잭 런던의 글재주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그 결과 예프게니 자먀찐의 <우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고전 과학소설의 반열에 들면서도 <강철군화>는 그중 가장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우리>는 체제의 검열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상징과 은유에 깊이 빠져 있는데 비해, <강철군화>는 올곧은 표현으로 세상의 문제를 설명한다. 한울 출판사가 이 소설을 펴낸 것은 사회과학 관련 문학선집 출간의 일환이었던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충분히 과학소설의 울타리 안에 넣어 볼 수 있다. <강철군화>는 과학소설 하위 장르인 '미래사'나 '대체역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험악한 노동계의 현실을 전투적으로 헤쳐나간 강인한 한 인간의 일대기가 7백년 후에 발견되어 재조명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사'이며,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1910년대 이래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이 도를 넘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골육상쟁으로 비화한다는 가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 역사'다. (그러나, 물론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작품의 설정에서와 같은 우려를 하게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여건이 무척 열악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철군화>는 노동계급이 비참한 삶에서 허덕이던 20세기의 미국에서 활동한 한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내 애비스 에버하드의 시점에서 일단 기록된 문헌이 이미 사회주의 세상이 되어버린 700년 후 시대의 한 문헌학자에게 발견되어 덕지덕지 주석을 달은 채로 다시 재출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미래 학자의 주석은 어디까지나 가공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1800년대 말엽부터 1910년 전후까지의 노동환경에 대한 진짜 정보를 담고 있어 헷갈릴 정도로 그럴듯하다.) 

작가는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애비스의 문체는 상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서술하되, 곳곳에 추가된 미래 문헌학자의 주석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체를 가장(?)한다. 이같은 두 가지 상이한 스타일의 저술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 전체적인 총합이 객관적인 느낌이 들도록 기여한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는 투철한 의지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핵심 주인공 같지만 작품이 진행될 수록 초점은 그 아내인 애비스로 넘어간다. 잭 런던은 왜 그렇게 처리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어니스트는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정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인본주의자의 이상적인 전형이다. 그래서 때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사람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캐릭터는 그의 이름을 '어니스트 에버하드'라고 지은 잭 런던의 의도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굳이 해석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노동계급에 충성을 다하는 정직한 사나이'가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애비스는 어니스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교수인 존 커밍햄의 딸로 아무런 아쉬움없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중산층 처녀였지만, 노동자 출신의 지식인 어니스트에게 감화되면서 계급사회의 비정함을 몸소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이자 이념적/ 행동적 동반자로서의 운명을 선택하는 진화하는 캐릭터다. 

독자들은 처음부터 신념이 확고한 어니스트에 감정이입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애비스와 함께 한발 한발 사회의 모순에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잭 런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다만 애비스가 어니스트의 계급결정론에 애초에는 반발하여 노동시장의 밑바닥을 직접 탐방하고 다니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너무 감상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중산층의 아쉬울 것이 없이 곱게 자란 처녀가 사회의 문제를 깨달았다 해서 그렇게 쉽게 행동주의자로 변모할 수 있을까?)

<강철군화>는 서두에서는 주로 사회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인 입장에서 토론과 논쟁 위주로 내용을 전개해나가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정도면 충분한 명분(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교두보)을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현장실습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은 사회학/ 인간학/ 정치경제학 교과서이자 자극적인 액션 어드벤쳐 오락물이 공존하는 희안한 플롯을 갖게 되었다. 

앞 부분의 토론도 명쾌하고 도발적이지만, 후반부에서 애비스 일행이 정부 비밀요원으로 위장하고 홍길동처럼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활약에서는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더우기 애비스의 눈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시카고 코뮨의 대혼란 속에서 군경이 합동작전을 펴서 수십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광경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잭 런던 자신이 어려서부터 저임금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처절하게 결단나는 꼴을 수없이 보고 겪은 덕분이라 한다. 

<강철군화>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 예언은 하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고 끝난다. (비록 막연히 먼 미래인 700년 후의 사회주의로 통일된 세계의 시점에서 주석을 담으로서, 미래가 가야할 길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하긴 자본과 노동의 대립관계를 소설 한편에서 결론까지 내린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잭 런던은 소설 서두에 등장하는 문헌학자의 해설을 통해 애비스가 이 회고록을 집필 도중 습격을 받아 황급히 이 문헌을 숨기고 달아나야 했던 것 같다는 추정을 덧붙이는 트릭을 쓴다. 그래서 실제로 이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져 있다. 결론과 행동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강철군화>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지고 각국의 이해득실과 속좁은 민족주의가 지역분쟁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강철군화>의 테제는 유효한가? 현실적으로 보건대, 국가와 민족을 떠나 노동자라는 계급의식 하나로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한데 뭉쳐 자본계급의 일방통행에 맞서는 날이 오리라는 잭 런던의 극적 설정은 그야말로 염원에 불과하다. 역사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실례들을 무수히 보여준다.(실례로, 지금도 코소보 사태를 비롯해서 미해결로 남아있는 수많은 국지전들의 동기를 생각해보라.) 

<강철군화>는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문제를 정교한 논리로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연대의식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자본계급의 대응수준을 너무 평가절하한 약점이 있다. 오늘날의 거대자본과 권력은 잭 런던이 예언한대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결탁해있는지 모를 정도로 한 몸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소설에서와 달리 권력과 자본계급의 과두지배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각성하는데 헷갈릴 정도의 선에서 늘 빵과 곤봉을 교대로 내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잭 런던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날카롭게 짚어내면서도 그가 이념적으로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자본계급의 과두독재의 부작용을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탈선하여 또 다른 전체주의 지배체제라는 기형아를 낳았다는 사실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지구 반대편에서 자먀찐이 <우리>라는 또다른 철학적 과학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체제가 박탈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잭 런던은 알고 있었을까. 

잭 런던의 <강철군화>와 자먀찐의 <우리>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두 작품 다 고국에서 금서 처분을 당한 것은 그 만큼 지배계급과 국가체제가 그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으며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솔직히 이 작품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강철군화>에 대한 진지한 리뷰는 커녕 단평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해야 몇 줄짜리 촌평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한참을 뒤져서야 찾은 것이다. 잭 런던은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가인지라 그의 동물소설과 모험소설에 관한 자료들은 많았지만 초창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원문 그 자체를 싣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듯한 인상을 준다. 어니스트 에버하드를 통해 잭 런던이 우려했던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처럼 다극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강철군화>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은 명쾌하고 단일한 대립노선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철군화>는 불의에 맞서 진실을 캐내고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이어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기록을 소설화 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이 땅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붇돋는 성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로 해석되면서 명을 이어갈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 덧붙이는 말


<강철군화The Iron Heel>는 첫 출판된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 이내 금단의 열매가 되어버렸지만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심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찌 독일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는데 그 법적 근거는 '반(反) 포르노그래피' 법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 소련의 일원이었던 국가들, 중국, 인도네시아, 캐나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북한이 있다.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 명단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에 구 소련과 중국, 북한 같은 공산국가들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비단 자본주의의 폐해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지배체제의 권력장악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잭 런던 같은 휴머니스트 출신의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들로부터조차 고립되고만 역설적인 케이스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1998년 개봉되었다. 제목은 <과두지배체제의 강철군화THE IRON HEEL OF THE OLIGARCHY >로서, 잭 런던의 오리지널과 칼 막스의 자본론을 원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음은 그 영화에 대한 간략한 정보다. 


<과두 지배체제의 강철군화>- Russia, 1998, 70분, colour

- 촬영지: 1990년대의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 각본/ 감독: Aleksander Bashirov

- 촬영: Sergei Lando, Vladimir Brylyakov

- 편집: Alexander Bashirov

- 디자이너: Vladimir Svetozarov

- 의상: Ekaterina Shapkaits, Ljudmila Romanovskaya

- 음악: Yevgeni Fedorov

- 제작자: : Rodion Ismailov, Alexander Bashirov

- 제작사: DEBOSHIR-FILM

- 출연: Alexander Bashirov, Rita Margo, Elena Yudanova, Inna Volkova, Natalia Pivovarova, 
Irina Sharovatova, Yevgeny Fedorov, Konstantin Fedorov, Alexander Voronov

- 나레이션: Rita M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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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ffmm > 걸작인줄 몰랐던 걸작, <강철군화>
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평점 :
절판


 

강철군화 (1907년)


지은이: 잭 런던

우리말 옮긴이: 차미례

펴낸 곳: 도서출판 한울

펴낸 날: 1995년(9쇄)

읽고 평하는 이: 고장원

작성일자: 1999년 6월 10일 


우리는 뉴욕행 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우리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시카고를 향해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세 대나 우뢰와 같이 지나쳐 갔다. 그 열차는 
남루한 모습의 미숙련 노동자들, 새로운 밑바닥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시카고의 재건을 위해 징발된 노예들이에요."어니스트가 말했다. "아다시피, 시카고의
 노예들은 전부 살륙되었으니까요."

(본문 310~311쪽 중에서 발췌)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내가 올해 읽은 모든 종류의 글 가운데 가장 전율할만한 
걸작이다. 이것이 옥석인줄 모르고 따분한 사회과학 교양 입문서 정도로만 여겼던 내 
얄팍한 선입관이 불과 몇 장을 넘기자마자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난생 처음 '전율'이란 표현을 쓰게 만든 <강철군화>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야말로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하나는 칼 막스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본론>을 수백 번 읽어도 깨닫지 못할 삶의 진실과 현실의 논리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서술한 논리정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숨쉬는 듯한 문체로 내달리는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이다. 

솔직히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떠나서 <강철군화>가 이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소설인 줄은 몰랐다. 철학자나 이념가들의 머리 속에서 떠돌법한 개념을 바로 
우리의 현실에다 곧바로 대입하면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음모가 얼마나 흉폭하고 
잔인한가를 (감정적이 아니라) 아주 과학적이고 현실감있게 전달하는 작가 잭 런던의 글재주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그 결과 예프게니 자먀찐의 <우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고전 과학소설의 반열에 들면서도 <강철군화>는 그중 가장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우리>는 체제의 검열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상징과 은유에 깊이 빠져 있는데 비해, <강철군화>는 올곧은 표현으로 세상의 문제를 설명한다. 한울 출판사가 이 소설을 펴낸 것은 사회과학 관련 문학선집 출간의 일환이었던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충분히 과학소설의 울타리 안에 넣어 볼 수 있다. <강철군화>는 과학소설 하위 장르인 '미래사'나 '대체역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험악한 노동계의 현실을 전투적으로 헤쳐나간 강인한 한 인간의 일대기가 7백년 후에 발견되어 재조명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사'이며,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1910년대 이래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이 도를 넘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골육상쟁으로 비화한다는 가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 역사'다. (그러나, 물론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작품의 설정에서와 같은 우려를 하게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여건이 무척 열악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철군화>는 노동계급이 비참한 삶에서 허덕이던 20세기의 미국에서 활동한 한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내 애비스 에버하드의 시점에서 일단 기록된 문헌이 이미 사회주의 세상이 되어버린 700년 후 시대의 한 문헌학자에게 발견되어 덕지덕지 주석을 달은 채로 다시 재출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미래 학자의 주석은 어디까지나 가공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1800년대 말엽부터 1910년 전후까지의 노동환경에 대한 진짜 정보를 담고 있어 헷갈릴 정도로 그럴듯하다.) 

작가는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애비스의 문체는 상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서술하되, 곳곳에 추가된 미래 문헌학자의 주석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체를 가장(?)한다. 이같은 두 가지 상이한 스타일의 저술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 전체적인 총합이 객관적인 느낌이 들도록 기여한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는 투철한 의지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핵심 주인공 같지만 작품이 진행될 수록 초점은 그 아내인 애비스로 넘어간다. 잭 런던은 왜 그렇게 처리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어니스트는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정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인본주의자의 이상적인 전형이다. 그래서 때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사람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캐릭터는 그의 이름을 '어니스트 에버하드'라고 지은 잭 런던의 의도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굳이 해석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노동계급에 충성을 다하는 정직한 사나이'가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애비스는 어니스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교수인 존 커밍햄의 딸로 아무런 아쉬움없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중산층 처녀였지만, 노동자 출신의 지식인 어니스트에게 감화되면서 계급사회의 비정함을 몸소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이자 이념적/ 행동적 동반자로서의 운명을 선택하는 진화하는 캐릭터다. 

독자들은 처음부터 신념이 확고한 어니스트에 감정이입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애비스와 함께 한발 한발 사회의 모순에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잭 런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다만 애비스가 어니스트의 계급결정론에 애초에는 반발하여 노동시장의 밑바닥을 직접 탐방하고 다니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너무 감상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중산층의 아쉬울 것이 없이 곱게 자란 처녀가 사회의 문제를 깨달았다 해서 그렇게 쉽게 행동주의자로 변모할 수 있을까?)

<강철군화>는 서두에서는 주로 사회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인 입장에서 토론과 논쟁 위주로 내용을 전개해나가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정도면 충분한 명분(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교두보)을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현장실습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은 사회학/ 인간학/ 정치경제학 교과서이자 자극적인 액션 어드벤쳐 오락물이 공존하는 희안한 플롯을 갖게 되었다. 

앞 부분의 토론도 명쾌하고 도발적이지만, 후반부에서 애비스 일행이 정부 비밀요원으로 위장하고 홍길동처럼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활약에서는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더우기 애비스의 눈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시카고 코뮨의 대혼란 속에서 군경이 합동작전을 펴서 수십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광경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잭 런던 자신이 어려서부터 저임금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처절하게 결단나는 꼴을 수없이 보고 겪은 덕분이라 한다. 

<강철군화>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 예언은 하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고 끝난다. (비록 막연히 먼 미래인 700년 후의 사회주의로 통일된 세계의 시점에서 주석을 담으로서, 미래가 가야할 길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하긴 자본과 노동의 대립관계를 소설 한편에서 결론까지 내린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잭 런던은 소설 서두에 등장하는 문헌학자의 해설을 통해 애비스가 이 회고록을 집필 도중 습격을 받아 황급히 이 문헌을 숨기고 달아나야 했던 것 같다는 추정을 덧붙이는 트릭을 쓴다. 그래서 실제로 이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져 있다. 결론과 행동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강철군화>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지고 각국의 이해득실과 속좁은 민족주의가 지역분쟁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강철군화>의 테제는 유효한가? 현실적으로 보건대, 국가와 민족을 떠나 노동자라는 계급의식 하나로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한데 뭉쳐 자본계급의 일방통행에 맞서는 날이 오리라는 잭 런던의 극적 설정은 그야말로 염원에 불과하다. 역사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실례들을 무수히 보여준다.(실례로, 지금도 코소보 사태를 비롯해서 미해결로 남아있는 수많은 국지전들의 동기를 생각해보라.) 

<강철군화>는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문제를 정교한 논리로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연대의식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자본계급의 대응수준을 너무 평가절하한 약점이 있다. 오늘날의 거대자본과 권력은 잭 런던이 예언한대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결탁해있는지 모를 정도로 한 몸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소설에서와 달리 권력과 자본계급의 과두지배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각성하는데 헷갈릴 정도의 선에서 늘 빵과 곤봉을 교대로 내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잭 런던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날카롭게 짚어내면서도 그가 이념적으로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자본계급의 과두독재의 부작용을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탈선하여 또 다른 전체주의 지배체제라는 기형아를 낳았다는 사실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지구 반대편에서 자먀찐이 <우리>라는 또다른 철학적 과학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체제가 박탈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잭 런던은 알고 있었을까. 

잭 런던의 <강철군화>와 자먀찐의 <우리>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두 작품 다 고국에서 금서 처분을 당한 것은 그 만큼 지배계급과 국가체제가 그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으며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솔직히 이 작품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강철군화>에 대한 진지한 리뷰는 커녕 단평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해야 몇 줄짜리 촌평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한참을 뒤져서야 찾은 것이다. 잭 런던은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가인지라 그의 동물소설과 모험소설에 관한 자료들은 많았지만 초창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원문 그 자체를 싣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듯한 인상을 준다. 어니스트 에버하드를 통해 잭 런던이 우려했던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처럼 다극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강철군화>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은 명쾌하고 단일한 대립노선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철군화>는 불의에 맞서 진실을 캐내고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이어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기록을 소설화 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이 땅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붇돋는 성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로 해석되면서 명을 이어갈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 덧붙이는 말


<강철군화The Iron Heel>는 첫 출판된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 이내 금단의 열매가 되어버렸지만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심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찌 독일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는데 그 법적 근거는 '반(反) 포르노그래피' 법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 소련의 일원이었던 국가들, 중국, 인도네시아, 캐나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북한이 있다.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 명단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에 구 소련과 중국, 북한 같은 공산국가들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비단 자본주의의 폐해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지배체제의 권력장악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잭 런던 같은 휴머니스트 출신의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들로부터조차 고립되고만 역설적인 케이스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1998년 개봉되었다. 제목은 <과두지배체제의 강철군화THE IRON HEEL OF THE OLIGARCHY >로서, 잭 런던의 오리지널과 칼 막스의 자본론을 원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음은 그 영화에 대한 간략한 정보다. 


<과두 지배체제의 강철군화>- Russia, 1998, 70분, colour

- 촬영지: 1990년대의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 각본/ 감독: Aleksander Bashirov

- 촬영: Sergei Lando, Vladimir Brylyakov

- 편집: Alexander Bashirov

- 디자이너: Vladimir Svetozarov

- 의상: Ekaterina Shapkaits, Ljudmila Romanovskaya

- 음악: Yevgeni Fedorov

- 제작자: : Rodion Ismailov, Alexander Bashirov

- 제작사: DEBOSHIR-FILM

- 출연: Alexander Bashirov, Rita Margo, Elena Yudanova, Inna Volkova, Natalia Pivovarova, 
Irina Sharovatova, Yevgeny Fedorov, Konstantin Fedorov, Alexander Voronov

- 나레이션: Rita M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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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ffmm > 걸작인줄 몰랐던 걸작, <강철군화>
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평점 :
절판


 

강철군화 (1907년)


지은이: 잭 런던

우리말 옮긴이: 차미례

펴낸 곳: 도서출판 한울

펴낸 날: 1995년(9쇄)

읽고 평하는 이: 고장원

작성일자: 1999년 6월 10일 


우리는 뉴욕행 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우리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시카고를 향해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세 대나 우뢰와 같이 지나쳐 갔다. 그 열차는 
남루한 모습의 미숙련 노동자들, 새로운 밑바닥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시카고의 재건을 위해 징발된 노예들이에요."어니스트가 말했다. "아다시피, 시카고의
 노예들은 전부 살륙되었으니까요."

(본문 310~311쪽 중에서 발췌)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내가 올해 읽은 모든 종류의 글 가운데 가장 전율할만한 
걸작이다. 이것이 옥석인줄 모르고 따분한 사회과학 교양 입문서 정도로만 여겼던 내 
얄팍한 선입관이 불과 몇 장을 넘기자마자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난생 처음 '전율'이란 표현을 쓰게 만든 <강철군화>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야말로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하나는 칼 막스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본론>을 수백 번 읽어도 깨닫지 못할 삶의 진실과 현실의 논리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서술한 논리정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숨쉬는 듯한 문체로 내달리는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이다. 

솔직히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떠나서 <강철군화>가 이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소설인 줄은 몰랐다. 철학자나 이념가들의 머리 속에서 떠돌법한 개념을 바로 
우리의 현실에다 곧바로 대입하면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음모가 얼마나 흉폭하고 
잔인한가를 (감정적이 아니라) 아주 과학적이고 현실감있게 전달하는 작가 잭 런던의 글재주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그 결과 예프게니 자먀찐의 <우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고전 과학소설의 반열에 들면서도 <강철군화>는 그중 가장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우리>는 체제의 검열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상징과 은유에 깊이 빠져 있는데 비해, <강철군화>는 올곧은 표현으로 세상의 문제를 설명한다. 한울 출판사가 이 소설을 펴낸 것은 사회과학 관련 문학선집 출간의 일환이었던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충분히 과학소설의 울타리 안에 넣어 볼 수 있다. <강철군화>는 과학소설 하위 장르인 '미래사'나 '대체역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험악한 노동계의 현실을 전투적으로 헤쳐나간 강인한 한 인간의 일대기가 7백년 후에 발견되어 재조명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사'이며,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1910년대 이래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이 도를 넘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골육상쟁으로 비화한다는 가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 역사'다. (그러나, 물론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작품의 설정에서와 같은 우려를 하게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여건이 무척 열악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철군화>는 노동계급이 비참한 삶에서 허덕이던 20세기의 미국에서 활동한 한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내 애비스 에버하드의 시점에서 일단 기록된 문헌이 이미 사회주의 세상이 되어버린 700년 후 시대의 한 문헌학자에게 발견되어 덕지덕지 주석을 달은 채로 다시 재출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미래 학자의 주석은 어디까지나 가공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1800년대 말엽부터 1910년 전후까지의 노동환경에 대한 진짜 정보를 담고 있어 헷갈릴 정도로 그럴듯하다.) 

작가는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애비스의 문체는 상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서술하되, 곳곳에 추가된 미래 문헌학자의 주석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체를 가장(?)한다. 이같은 두 가지 상이한 스타일의 저술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 전체적인 총합이 객관적인 느낌이 들도록 기여한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는 투철한 의지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핵심 주인공 같지만 작품이 진행될 수록 초점은 그 아내인 애비스로 넘어간다. 잭 런던은 왜 그렇게 처리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어니스트는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정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인본주의자의 이상적인 전형이다. 그래서 때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사람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캐릭터는 그의 이름을 '어니스트 에버하드'라고 지은 잭 런던의 의도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굳이 해석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노동계급에 충성을 다하는 정직한 사나이'가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애비스는 어니스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교수인 존 커밍햄의 딸로 아무런 아쉬움없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중산층 처녀였지만, 노동자 출신의 지식인 어니스트에게 감화되면서 계급사회의 비정함을 몸소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이자 이념적/ 행동적 동반자로서의 운명을 선택하는 진화하는 캐릭터다. 

독자들은 처음부터 신념이 확고한 어니스트에 감정이입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애비스와 함께 한발 한발 사회의 모순에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잭 런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다만 애비스가 어니스트의 계급결정론에 애초에는 반발하여 노동시장의 밑바닥을 직접 탐방하고 다니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너무 감상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중산층의 아쉬울 것이 없이 곱게 자란 처녀가 사회의 문제를 깨달았다 해서 그렇게 쉽게 행동주의자로 변모할 수 있을까?)

<강철군화>는 서두에서는 주로 사회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인 입장에서 토론과 논쟁 위주로 내용을 전개해나가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정도면 충분한 명분(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교두보)을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현장실습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은 사회학/ 인간학/ 정치경제학 교과서이자 자극적인 액션 어드벤쳐 오락물이 공존하는 희안한 플롯을 갖게 되었다. 

앞 부분의 토론도 명쾌하고 도발적이지만, 후반부에서 애비스 일행이 정부 비밀요원으로 위장하고 홍길동처럼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활약에서는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더우기 애비스의 눈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시카고 코뮨의 대혼란 속에서 군경이 합동작전을 펴서 수십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광경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잭 런던 자신이 어려서부터 저임금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처절하게 결단나는 꼴을 수없이 보고 겪은 덕분이라 한다. 

<강철군화>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 예언은 하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고 끝난다. (비록 막연히 먼 미래인 700년 후의 사회주의로 통일된 세계의 시점에서 주석을 담으로서, 미래가 가야할 길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하긴 자본과 노동의 대립관계를 소설 한편에서 결론까지 내린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잭 런던은 소설 서두에 등장하는 문헌학자의 해설을 통해 애비스가 이 회고록을 집필 도중 습격을 받아 황급히 이 문헌을 숨기고 달아나야 했던 것 같다는 추정을 덧붙이는 트릭을 쓴다. 그래서 실제로 이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져 있다. 결론과 행동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강철군화>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지고 각국의 이해득실과 속좁은 민족주의가 지역분쟁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강철군화>의 테제는 유효한가? 현실적으로 보건대, 국가와 민족을 떠나 노동자라는 계급의식 하나로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한데 뭉쳐 자본계급의 일방통행에 맞서는 날이 오리라는 잭 런던의 극적 설정은 그야말로 염원에 불과하다. 역사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실례들을 무수히 보여준다.(실례로, 지금도 코소보 사태를 비롯해서 미해결로 남아있는 수많은 국지전들의 동기를 생각해보라.) 

<강철군화>는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문제를 정교한 논리로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연대의식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자본계급의 대응수준을 너무 평가절하한 약점이 있다. 오늘날의 거대자본과 권력은 잭 런던이 예언한대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결탁해있는지 모를 정도로 한 몸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소설에서와 달리 권력과 자본계급의 과두지배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각성하는데 헷갈릴 정도의 선에서 늘 빵과 곤봉을 교대로 내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잭 런던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날카롭게 짚어내면서도 그가 이념적으로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자본계급의 과두독재의 부작용을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탈선하여 또 다른 전체주의 지배체제라는 기형아를 낳았다는 사실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지구 반대편에서 자먀찐이 <우리>라는 또다른 철학적 과학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체제가 박탈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잭 런던은 알고 있었을까. 

잭 런던의 <강철군화>와 자먀찐의 <우리>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두 작품 다 고국에서 금서 처분을 당한 것은 그 만큼 지배계급과 국가체제가 그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으며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솔직히 이 작품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강철군화>에 대한 진지한 리뷰는 커녕 단평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해야 몇 줄짜리 촌평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한참을 뒤져서야 찾은 것이다. 잭 런던은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가인지라 그의 동물소설과 모험소설에 관한 자료들은 많았지만 초창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원문 그 자체를 싣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듯한 인상을 준다. 어니스트 에버하드를 통해 잭 런던이 우려했던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처럼 다극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강철군화>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은 명쾌하고 단일한 대립노선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철군화>는 불의에 맞서 진실을 캐내고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이어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기록을 소설화 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이 땅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붇돋는 성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로 해석되면서 명을 이어갈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 덧붙이는 말


<강철군화The Iron Heel>는 첫 출판된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 이내 금단의 열매가 되어버렸지만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심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찌 독일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는데 그 법적 근거는 '반(反) 포르노그래피' 법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 소련의 일원이었던 국가들, 중국, 인도네시아, 캐나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북한이 있다.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 명단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에 구 소련과 중국, 북한 같은 공산국가들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비단 자본주의의 폐해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지배체제의 권력장악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잭 런던 같은 휴머니스트 출신의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들로부터조차 고립되고만 역설적인 케이스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1998년 개봉되었다. 제목은 <과두지배체제의 강철군화THE IRON HEEL OF THE OLIGARCHY >로서, 잭 런던의 오리지널과 칼 막스의 자본론을 원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음은 그 영화에 대한 간략한 정보다. 


<과두 지배체제의 강철군화>- Russia, 1998, 70분, colour

- 촬영지: 1990년대의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 각본/ 감독: Aleksander Bashirov

- 촬영: Sergei Lando, Vladimir Brylyakov

- 편집: Alexander Bashirov

- 디자이너: Vladimir Svetozarov

- 의상: Ekaterina Shapkaits, Ljudmila Romanovskaya

- 음악: Yevgeni Fedorov

- 제작자: : Rodion Ismailov, Alexander Bashirov

- 제작사: DEBOSHIR-FILM

- 출연: Alexander Bashirov, Rita Margo, Elena Yudanova, Inna Volkova, Natalia Pivovarova, 
Irina Sharovatova, Yevgeny Fedorov, Konstantin Fedorov, Alexander Voronov

- 나레이션: Rita M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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