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ffmm > 걸작인줄 몰랐던 걸작,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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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평점 :
절판
강철군화 (1907년)
지은이: 잭 런던
우리말 옮긴이: 차미례
펴낸 곳: 도서출판 한울
펴낸 날: 1995년(9쇄)
읽고 평하는 이: 고장원
작성일자: 1999년 6월 10일
우리는 뉴욕행 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우리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시카고를 향해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세 대나 우뢰와 같이 지나쳐 갔다. 그 열차는
남루한 모습의 미숙련 노동자들, 새로운 밑바닥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시카고의 재건을 위해 징발된 노예들이에요."어니스트가 말했다. "아다시피, 시카고의
노예들은 전부 살륙되었으니까요."
(본문 310~311쪽 중에서 발췌)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내가 올해 읽은 모든 종류의 글 가운데 가장 전율할만한
걸작이다. 이것이 옥석인줄 모르고 따분한 사회과학 교양 입문서 정도로만 여겼던 내
얄팍한 선입관이 불과 몇 장을 넘기자마자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난생 처음 '전율'이란 표현을 쓰게 만든 <강철군화>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야말로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하나는 칼 막스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자본론>을 수백 번 읽어도 깨닫지 못할 삶의 진실과 현실의 논리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서술한 논리정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숨쉬는 듯한 문체로 내달리는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이다.
솔직히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떠나서 <강철군화>가 이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소설인 줄은 몰랐다. 철학자나 이념가들의 머리 속에서 떠돌법한 개념을 바로
우리의 현실에다 곧바로 대입하면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음모가 얼마나 흉폭하고
잔인한가를 (감정적이 아니라) 아주 과학적이고 현실감있게 전달하는 작가 잭 런던의 글재주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그 결과 예프게니 자먀찐의 <우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고전 과학소설의 반열에 들면서도 <강철군화>는 그중 가장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우리>는 체제의 검열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상징과 은유에 깊이 빠져 있는데 비해, <강철군화>는 올곧은 표현으로 세상의 문제를 설명한다. 한울 출판사가 이 소설을 펴낸 것은 사회과학 관련 문학선집 출간의 일환이었던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충분히 과학소설의 울타리 안에 넣어 볼 수 있다. <강철군화>는 과학소설 하위 장르인 '미래사'나 '대체역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험악한 노동계의 현실을 전투적으로 헤쳐나간 강인한 한 인간의 일대기가 7백년 후에 발견되어 재조명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사'이며,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1910년대 이래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이 도를 넘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골육상쟁으로 비화한다는 가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 역사'다. (그러나, 물론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작품의 설정에서와 같은 우려를 하게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여건이 무척 열악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철군화>는 노동계급이 비참한 삶에서 허덕이던 20세기의 미국에서 활동한 한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내 애비스 에버하드의 시점에서 일단 기록된 문헌이 이미 사회주의 세상이 되어버린 700년 후 시대의 한 문헌학자에게 발견되어 덕지덕지 주석을 달은 채로 다시 재출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미래 학자의 주석은 어디까지나 가공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1800년대 말엽부터 1910년 전후까지의 노동환경에 대한 진짜 정보를 담고 있어 헷갈릴 정도로 그럴듯하다.)
작가는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애비스의 문체는 상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서술하되, 곳곳에 추가된 미래 문헌학자의 주석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체를 가장(?)한다. 이같은 두 가지 상이한 스타일의 저술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 전체적인 총합이 객관적인 느낌이 들도록 기여한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는 투철한 의지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핵심 주인공 같지만 작품이 진행될 수록 초점은 그 아내인 애비스로 넘어간다. 잭 런던은 왜 그렇게 처리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어니스트는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정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인본주의자의 이상적인 전형이다. 그래서 때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사람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캐릭터는 그의 이름을 '어니스트 에버하드'라고 지은 잭 런던의 의도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굳이 해석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노동계급에 충성을 다하는 정직한 사나이'가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애비스는 어니스트를 만나기 전만 해도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교수인 존 커밍햄의 딸로 아무런 아쉬움없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중산층 처녀였지만, 노동자 출신의 지식인 어니스트에게 감화되면서 계급사회의 비정함을 몸소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이자 이념적/ 행동적 동반자로서의 운명을 선택하는 진화하는 캐릭터다.
독자들은 처음부터 신념이 확고한 어니스트에 감정이입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애비스와 함께 한발 한발 사회의 모순에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잭 런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다만 애비스가 어니스트의 계급결정론에 애초에는 반발하여 노동시장의 밑바닥을 직접 탐방하고 다니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너무 감상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중산층의 아쉬울 것이 없이 곱게 자란 처녀가 사회의 문제를 깨달았다 해서 그렇게 쉽게 행동주의자로 변모할 수 있을까?)
<강철군화>는 서두에서는 주로 사회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인 입장에서 토론과 논쟁 위주로 내용을 전개해나가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정도면 충분한 명분(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교두보)을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현장실습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은 사회학/ 인간학/ 정치경제학 교과서이자 자극적인 액션 어드벤쳐 오락물이 공존하는 희안한 플롯을 갖게 되었다.
앞 부분의 토론도 명쾌하고 도발적이지만, 후반부에서 애비스 일행이 정부 비밀요원으로 위장하고 홍길동처럼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활약에서는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렵다. 더우기 애비스의 눈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시카고 코뮨의 대혼란 속에서 군경이 합동작전을 펴서 수십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광경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잭 런던 자신이 어려서부터 저임금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처절하게 결단나는 꼴을 수없이 보고 겪은 덕분이라 한다.
<강철군화>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 예언은 하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고 끝난다. (비록 막연히 먼 미래인 700년 후의 사회주의로 통일된 세계의 시점에서 주석을 담으로서, 미래가 가야할 길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하긴 자본과 노동의 대립관계를 소설 한편에서 결론까지 내린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잭 런던은 소설 서두에 등장하는 문헌학자의 해설을 통해 애비스가 이 회고록을 집필 도중 습격을 받아 황급히 이 문헌을 숨기고 달아나야 했던 것 같다는 추정을 덧붙이는 트릭을 쓴다. 그래서 실제로 이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져 있다. 결론과 행동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강철군화>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지고 각국의 이해득실과 속좁은 민족주의가 지역분쟁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강철군화>의 테제는 유효한가? 현실적으로 보건대, 국가와 민족을 떠나 노동자라는 계급의식 하나로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한데 뭉쳐 자본계급의 일방통행에 맞서는 날이 오리라는 잭 런던의 극적 설정은 그야말로 염원에 불과하다. 역사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실례들을 무수히 보여준다.(실례로, 지금도 코소보 사태를 비롯해서 미해결로 남아있는 수많은 국지전들의 동기를 생각해보라.)
<강철군화>는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문제를 정교한 논리로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연대의식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자본계급의 대응수준을 너무 평가절하한 약점이 있다. 오늘날의 거대자본과 권력은 잭 런던이 예언한대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결탁해있는지 모를 정도로 한 몸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소설에서와 달리 권력과 자본계급의 과두지배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각성하는데 헷갈릴 정도의 선에서 늘 빵과 곤봉을 교대로 내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잭 런던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는 날카롭게 짚어내면서도 그가 이념적으로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자본계급의 과두독재의 부작용을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탈선하여 또 다른 전체주의 지배체제라는 기형아를 낳았다는 사실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지구 반대편에서 자먀찐이 <우리>라는 또다른 철학적 과학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체제가 박탈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잭 런던은 알고 있었을까.
잭 런던의 <강철군화>와 자먀찐의 <우리>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두 작품 다 고국에서 금서 처분을 당한 것은 그 만큼 지배계급과 국가체제가 그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으며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솔직히 이 작품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강철군화>에 대한 진지한 리뷰는 커녕 단평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해야 몇 줄짜리 촌평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한참을 뒤져서야 찾은 것이다. 잭 런던은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가인지라 그의 동물소설과 모험소설에 관한 자료들은 많았지만 초창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원문 그 자체를 싣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듯한 인상을 준다. 어니스트 에버하드를 통해 잭 런던이 우려했던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처럼 다극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강철군화>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은 명쾌하고 단일한 대립노선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철군화>는 불의에 맞서 진실을 캐내고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이어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기록을 소설화 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이 땅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붇돋는 성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로 해석되면서 명을 이어갈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 덧붙이는 말
<강철군화The Iron Heel>는 첫 출판된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 이내 금단의 열매가 되어버렸지만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심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찌 독일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는데 그 법적 근거는 '반(反) 포르노그래피' 법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 소련의 일원이었던 국가들, 중국, 인도네시아, 캐나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북한이 있다.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 명단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에 구 소련과 중국, 북한 같은 공산국가들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비단 자본주의의 폐해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지배체제의 권력장악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잭 런던 같은 휴머니스트 출신의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들로부터조차 고립되고만 역설적인 케이스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1998년 개봉되었다. 제목은 <과두지배체제의 강철군화THE IRON HEEL OF THE OLIGARCHY >로서, 잭 런던의 오리지널과 칼 막스의 자본론을 원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음은 그 영화에 대한 간략한 정보다.
<과두 지배체제의 강철군화>- Russia, 1998, 70분, colour
- 촬영지: 1990년대의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 각본/ 감독: Aleksander Bashirov
- 촬영: Sergei Lando, Vladimir Brylyakov
- 편집: Alexander Bashirov
- 디자이너: Vladimir Svetozarov
- 의상: Ekaterina Shapkaits, Ljudmila Romanovskaya
- 음악: Yevgeni Fedorov
- 제작자: : Rodion Ismailov, Alexander Bashirov
- 제작사: DEBOSHIR-FILM
- 출연: Alexander Bashirov, Rita Margo, Elena Yudanova, Inna Volkova, Natalia Pivovarova,
Irina Sharovatova, Yevgeny Fedorov, Konstantin Fedorov, Alexander Voronov
- 나레이션: Rita Mar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