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엔, 일본의 국민축제>

올해도 어김없이 고시엔의 열풍이 불고 있다. NHK 위성방송을 통해 본 고시엔 풍경. 그건 차라리 두려움이었다. 올림픽에 버금가는 화려한 개막식. 빼곡히 들어찬 스탠드. 재학생과 동문들의 요란하지만 질서있는 응원. 잘 정돈된 새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의 선수들을 돋보이게 하는 흑토. 거의 대부분의 팀이 등번호판만 새로 달아 조금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니폼들. 그리고 중계방송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 어느덧 치열한 전투와도 같은 경기가 끝나면서 승리팀의 교가가 울려퍼진다.
일본은 야구의 나라다. 야구로 날이 밝고 야구로 날이 샌다. 스포츠 분야에서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톱뉴스도 야구고,한해를 마감하는 톱뉴스 역시 야구다. 가판대의 스포츠신문은 예외없이 프로야구를 톱기사로 다루고 있다. 어찌보면 전체 국민이 야구라는 거대한 시나리오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일본 야구에는 이렇듯 무언가 '정제된 힘'이 느껴진다. 프로야구는 프로야구대로, 고교야구는 고교야구대로 수많은 팬들을 동원하는 이면에는 이런 정제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프로와 고교만이 아니다. 대학야구와 사회인야구에도 관중석은 가득하다. 앞서의 두려움은 바로 이것이다. 분명 억지로 동원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 경기가 열리는 스탠드에는 관중으로 가득할까?
일본의 고교야구팀수는 99년 현재 4200여팀에 달한다. 간토지방의 경우 840여팀이 있고, 북부의 홋카이도에도 300여팀이 있다. 등록된 선수수는 약 15만명에 이른다. 흔히 고시엔이라는 것은 오사카에 소재한 한신고시엔(阪神甲子園)구장에서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 대회의 공식 명칭은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와 「선발고교야구대회」이다. 전자는 7~8월중에 벌어지는 관계로 "여름고시엔"이라 부르고,후자는 3~4월중에 열려 "봄고시엔" 또는 선발(選拔)의 일본식 발음을 따 "센바츠"라고도 부른다. 일본 고교야구에선 이 두 대회말고는 이렇다할 전국 대회는 없다. 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국민체육대회"에 고교야구 경기가 포함돼 있지만 크게 주목받는 입장은 아니다.
1915년에 창설된 선수권대회는 올해로 82회째. 대회방식은 전국 49개 지구에서 지역대회를 거친 최정예팀이 참가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 예선을 거쳐 부산상,휘문고보,선린상 등이 참가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발대회는 1924년 창설되었다. 올해 대회가 72회다. 홋카이도등 10개 지역의 추계대회에서 선발된 36개교가 다음해 봄에 고시엔에 모여 결전을 치르는 방식이다. 시점을 놓고 볼 때 가을철에 지역대회→이듬해 봄 선발고교대회→49개지구 예선대회→여름 선수권대회→가을철 지역대회...연중 경기를 갖는 셈이다. 흔한 말로 일본의 고교야구선수들의 목표는 '고시엔' 땅을 밟아 보는 것. 따라서 3년내내 고시엔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한 선수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고교선수들에 있어 고시엔 무대는 바로 '꿈의 무대'인 셈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단 고시엔 무대에 서면 언론이며 각 프로팀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프로선수 프로필에도 일단 고시엔 출장 경험 유무가 중요한 경력으로 등재된다.
고시엔 출전 자체가 중요한 경력일진대 그 무대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면 '고시엔의 영원한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프로 진출시 상당한 몸값을 보장받는다. 1949년 나카니시(中西太)는 호타준족의 "괴동"으로 3차례의 고시엔서 2번이나 그라운드 홈런을 기록하였고,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입단해 그해 신인왕이 되었다. 60년 강속구 투수 오자키(尾崎行雄)는 고교 2년의 약관 16세 나이로 팀을 고시엔 정상에 올려놓고선 학교를 중퇴하고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 역시 신인왕에 올랐다.
57년 봄 고시엔에선 고시엔 첫 "괴물'이 등장해 화제를 낳았다. 와세다실업학교고등부의 오(王貞治)는 대회 준결승까지 3경기를 완봉하고 결승에서 8회에 실점하기까지 34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는 프로에선 타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며 '세계의 홈런왕'으로 이름을 떨쳤다. 73년은 "괴물투수" 에가와(江川卓)의 해. 에가와는 고교통산(현 대회 포함) 퍼펙트 2번, 노히트노런 12번에 통산 방어율은 0.50. 또 3학년 선발대회에서 기록한 4경기 60탈삼진은 불멸의 대기록으로 꼽히고 있다. 85년 여름은 PL가쿠엔의 구와타(桑田眞澄)와 기요하라(淸原和博)가 고시엔 열풍에 불을 붙였다. 고시엔 통산 20승3패 방어율 1.55의 구와타와 통산 13홈런의 기요하라는 고시엔 사상 최강의 명콤비였다. 92년 언론의 집중 취재 대상이었던 마쓰이 히데키(松井秀喜)는 그로선 최후의 고시엔이었던 여름대회 2회전 경기에서 5연타석 경원 사구(四球)로 걸어나가는 진기록을 낳았다. 고교 통산 60홈런을 친 그의 방망이가 두려워 상대팀들은 가급적 그와의 정면대결을 피했다. 고시엔 우승 경험은 없었지만 마쓰이는 그해 요미우리에 드래프트 1위로 지명되었다. 98년에는 "괴물"의 계보를 잇는 요코하마고의 마쓰자카(松坂大輔)가 최고구속 150Km를 넘나드는 광속구를 뽐내며 봄,여름 고시엔을 휩쓸었다. 특히 여름 고시엔에서는 결승전서 사상 두번째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 "괴물"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고시엔의 별"들이 팬들의 열기를 이끌어 내며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이렇듯 고시엔은 단순히 야구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일본의 영웅"들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언론의 역할. 지역대회부터 밀착 취재해 쓸만한 선수들을 일찌감치 발굴,포장해 간다. 본선대회가 열리기 직전엔 유망주들을 사진과 함께 대거 소개하고, 역대 고시엔 스타들의 당시 활약상을 회고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특별히 주연과 엑스트라가 구분된 것도 아니다. 모두가 주연이다. 여기서 교묘히 지역 정서와 애교심을 자극한다. 일본 특유의 온갖 분석을 총동원하여 지역별·학교별 우승회수,지역별·학교별 프로선수 배출 현황,지역별 고교팀 현황 등을 집중 보도한다. 대회중에는 경기 전적이 프로야구 이상으로 상세히 보도된다. 대회가 끝나면 대회를 총결산하는 야구 전문지의 특집호가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대회전의 전망호와 대회후의 결산호는 미리 예약해 놓지 않으면 구하기가 힘들 정도다. 일본은 야구전문지가 잘팔린다. 한국말로 주간야구인 "슈칸베스보루"는 1947년 창간되어 올해로 53년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이 책을 발행하는 베스보루마가진(Baseball Magazine)사는 주간지 뿐만아니라 월간지(메이저리그),계간지(주요 이슈 특집호) 및 각종 야구 관련 단행본을 내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국영방송인 NHK는 고시엔 전경기를 방송한다. 연장전에 들어간다 해서 방송을 중단하는 법이 없다. 오래전 얘기지만 88년 여론조사에선 가장 보고싶은 스포츠로 고교야구가 58%, 프로야구가 54%를 기록한바 있고, 현재도 고교야구 시청율은 프로야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게임업체인 아트딩크는 고시엔을 목표로 고교야구 선수를 육성하는 게임을 만들어 붐조성에 일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일본에는 야구장이 많다. 가장 부러운 점이 이것이다. 거대한 돔구장에서부터 동네 야구장에 이르기까지 야구장의 수가 축구장만큼 많다. 동네 야구장도 그냥 말만 야구장이 아니라 잔디도 깔려있는 제대로된 야구장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어린 선수들은 1차적으로 고시엔을 꿈꾼다.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일본의 국민성이다. 야구에 대해 편식을 하지 않는다. 프로야구는 프로야구대로 아마야구는 아마야구대로의 멋을 즐긴다. 도쿄 네리마에 거주하는 가와무라(川村倫世.여)씨는 일본 고교야구가 프로 못지 않게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대해 "고교야구는 '순수' 그 자체이며,팬들은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경기장을 찾는다"고 말한다. 프로측도 고교야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너는 너 나는 나"의 개념이 아니다. 관심을 갖고 키우려 노력한다. 잘알다시피 한신 타이거즈의 본거지인 고시엔구장은 내야 흑토와 외야 천연잔디를 고수하고 있다. 12개 프로 구단 가운데 흑토-천연잔디 구장은 고시엔과 히로시마시민구장 두곳 뿐이다. 히로시마구장의 경우와는 다르게 고시엔 구장은 고시엔에 참가하는 고교 선수들이 기념으로 구장의 흙을 퍼갈 수 있게끔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대회후 구장을 다시 보수하는데 꽤 비용이 들어가고, 고시엔 기간 동안 홈팀 한신은 장기간 방랑길에 오르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고교야구가 있음으로서 프로야구가 존재함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또 어떤 "고시엔 괴물"이 출현할까? 어찌보면 이웃 나라의 단순한 고교야구 대회로 치부해 버릴수 있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매력적인 축제이다.
<2000.4/ 이 글은 2000년 중앙일보 주최 대통령배야구대회 팜플렛에 게재된 기사임>
박성호의 야구이야기에서 발췌한 내용임. <http://www.np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