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종종 내게 묻는다.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잠이 들었을 때 어디로 가세요?"
잠들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 육체라고 불리는 차원을 떠나형상이 없는 차원으로 들어간다. 잠자는 내내 순수하게 생각에만 빠져 있으며 그래도 다 괜찮다. 잠에 빠지는 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어나면서 "휴! 이 꿈속에 계속 머무르게 될까 봐너무 무서웠어!"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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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만큼 보인다》Youill See It When You Believe li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이 책 제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보이는 것만 믿으면 제한된정보만 얻는다. 하지만 믿는 만큼 보인다는 걸 이해하면 모든 생명체 너머의 우주에 특별한 지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 이상을 볼 때 갑자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람임을 알게 된다. 겉모습이나 육체적 감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 이상의 사람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훨씬 크고 위대하며 엄청난 존재라는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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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합니다. 수많은 경험을 쌓고 시련에 맞서 승리하면서 성장합니다. 인간이 한 번 태어나서 죽고 존재가 사라진다면성장의 전체 과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시점은 현재뿐이며,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면 존재의 의미니 잠재력의 표현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 무용지물이 됩니다.
인류는 계속 성장하지만, 인간은 죽는다는 얘기가 됩니다. 현대과학의 격언 중 하나입니다. "인류는 풍요로움을 향해 계속 발전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처럼가난한 상태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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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축제가 한창일 때 해골을 날라 와서 손님들에게 자기 운명을 상기시켰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도 이 사실을 알았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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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죽음을 동경하지 않았다.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이러한 삶에 대한 동경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우리는 삶과 죽음이 순차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먼저 살고, 그다음 죽는다. 하지만 몽테뉴는 사실 "죽음이 우리 삶 속에 평생 녹아들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몽테뉴는 내가 가능할 거라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숙고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가지고 놀고심지어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안다) 죽음의 친구가 된다. "죽음이내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함께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 삶의 커다랗고 중요한 일부다."
이해하기 힘들다. 커다랗고 중요한 일부는 고사하고, 나는 애초에 죽음이 내 삶의 일부이길 원치 않는 것 같다. 궁금해진다. 어떻게 안전한 거리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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