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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덟 계단, 팔복
이상학 지음 / 넥서스CROSS / 2020년 8월
평점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께서 산 위에서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하셨던 말씀이다. 옮겨 온 말씀은 그 중 팔복으로 알려진 부분이다.
'비움'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새문안교회에서 사역하시는 이상학 목사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들고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을 전한 설교를 엮은 책이다. 워낙 유명한 말씀이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척 많이 들었을테고 암송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해서 자주 이 말씀을 접한다. 그러면서 나는 이 중에 몇 가지나 해당이 될까(?)하고 생각하곤 했더랬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흠 보자, 심령이 가난한 자? 이게 무슨 의미일까? 모르겠으니 패스. 그러나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그리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도 할 수 있잖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내가 아직 경험이 없지만 여덟 가지 중 여섯 가지 정도는 할 수 있겠네. 그러니 나는 최소한 여섯 가지 복은 조금씩이라도 받을 수 있는건가?! 이런 무지한 생각을 야무지게도 했었지.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익히 듣고 자주 읽어서 지극히 잘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일단 제목이 '비움'이다. 팔복과 비움은 무슨 연관성이 있는것일까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일단 그것에 관해서는 서문에서부터 친절하게 밝히고 있었다. 저자인 목사님께 팔복은 비움에서 채움으로, 안에서 밖으로, 성품에서 사역으로, 나에게서 시작해 세계로 나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크게 3부로 나누어 내면을 채우는 복;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 타인을 향하는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복;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구분하여 전한다.
그러면서 여덟 가지의 복을 낱개로 하나씩 따로 떼어 설명하지 않고 첫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 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듯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성품과 신앙하는 태도에 대한 말씀이며 이 성품이 갈고 닦여 형성되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존재로 드러난다는 것. 그 첫번째 성품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는 사람, 하나님 존재 그 자체를 그리워 하는 자,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구하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자가 복이 있다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두번째, 애통하는 자는 스스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에 눈물로 참여하며 함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을 이야기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애통하다라는 의미로 쓰고 있는 헬라어 원문 펜손테스는 당시에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 중 가장 강력한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뱉는 감정이라고.. 애간장이 녹을 만큼 통곡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이렇게 원문의 의미까지 풀어서 단계를 밟아가듯 팔복의 말씀을 풀어준다. 세 번째 온유한 자의 온유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영적 곤고함과 비참함에 대해 애통해 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만지심과 위로를 경험하며 천국이 내 마음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과의 내적 만남이 주는 풍요로움이 자연스럽게 외적 성품으로 발현되는 것이 바로 온유라고 한다. 책을 끝까지 읽어가며 나는 아직 첫번째 단계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살짝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만 같은. 다행히도 갈급한 마음으로 이 심령들을 구하게 되었다는 것이 한가지 위로가 되었다. 다 안다고 여겨온 신앙인들, 하나님을 애타게 갈구하는 이들, 나를 비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채워 그것이 차고 넘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이들이 읽고 묵상하면 좋겠다. 신앙적이되 신화나 전설같지 않고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으면서 도전이 되는 말씀들이 있어 그 점이 참 좋았다.
책을 통해 팔복의 이 과정들을 거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박해를 받아도 기꺼이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자리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라게 되어 감사하다.
p.20 하나님의 방식은 오히려 단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p.31 많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세계와 세속적 축복에 각각 한 발씩 걸쳐놓은 채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삶에는 에제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시대나 돈, 명예,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예수님은 복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언제나 '성품'을 향해 있습니다.
p.33 영혼에 만족감이 없음을 깨닫고 구걸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사람 또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 즉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이 이런 사람에게 임합니다.
p.37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비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의 곤고함을 알아차리라는 말입니다.
p.37 산상수훈과 복음의 말씀을 바탕으로 사회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반은 맞을 수 있지만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팔복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시작 지점입니다. 내가 아무리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고 해도, 아무리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도, 내 심령에 하나님의 영을 향해 구걸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이후에 채우는 모든 것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p.42-3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심리적 마인드 게임을 통해 내 마음을 바꿔서 나는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라면서 자기최면을 거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갖는 충만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p.65 온유란 가난한 심령과 애통해하는 심령을 통해 생긴 내적 파워,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강철 같은 내적 확신이 외적 성품으로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입니다.
p.72 마틴 로이드 존스는 팔복을 누리는 성품 중에는 단 한 가지도 타고난 기질에서 오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팔복의 성품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맺어지는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p.93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산상설교)에서 의를 향한 목마름을 온갖 형태의 죄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욕구라고 했습니다.
p.96 의(디카이오쉬넨)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말해요. 신앙적인 의 righteousness,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p.99 의가 가진 두 번째 의미는 윤리적인 의 justice입니다. ... 윤리적인 차원의 정의와 공의를 포함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은 것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목말라하는 것을 뜻합니다.
p.108 긍휼은 은혜와 비슷한 것 같지만 좀 다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리는 사랑이 은혜라면 긍휼은 죄악의 결과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사랑입니다.
p.127 밖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과 내 안의 모습을 일치시키려면 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p.143 어떻게 하면 내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되면 화평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p.145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악과 화평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는 선한 것과 원수가 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p.161 하나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는 자의식이 하나님보다 더 크다면, 그것은 이미 자기 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