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에는 읽어야 할 책이 너무나도 많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외양으로 독자를 유혹하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책, 꼭 거쳐야만 하는 책들은 왜 그리도 곳곳에 널려 있는지...

책들은 언제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부족의 주술사가 동굴벽화를 그리던 선사시대를 말하든, 미스테리하고 불확실한 것 투성이인 20세기의 역사를 토해내든, 10년, 20년 후의 미래를 이야기하든, 팔팔 끓는 도가니탕 속 같은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책의 근본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이라는 부제를 달고 탄생한 이 책도 필시 그러할 것이다.

'모색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모색이 일반적 전망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의지나 욕망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 책 앞에

...역시 그렇다. 현실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다시금 그 현실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더군다나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앞으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신문 연재물로서의 이 책은 저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현실에 피드백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것이다.

흔히들 글쓰기에 있어 중도를 걷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을 한다. 저널리즘 식의 다채로운 메뉴를 갖는 화려한 글쓰기와 아카데미즘의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정확성을 가진 글쓰기의 사이에서 둘을 절충해 내거나 둘의 장점을 추려내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 뭐, 고종석은 거기에 대단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주제 자체가 저널리즘적인 것이고, 신문에 발표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니까... 그럼에도 칼럼이라는 형식 자체는 정도 이상의 정확성과 깊이를 요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책에서도 이름난 그의 미문은 충분히 즐길 만 하다.

이 그럴싸한 도구를 사용해서 그는 우리시대의 낯익은 혹은 낯선 코드들을 샅샅이 훑어 나간다. 정치권력·체제의 문제, 문화와 권력의 관계, 자연과 문명의 관계, 생태주의에 대한 천착, 종교, 지식인, 문학과 예술, 언어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 생명공학, 인터넷, 마리화나.... 하나하나 다 열거하자면 서평 하나를 넉넉히 다 채우고도 모자랄, 또 그 개개의 주제만으로도 개설서 몇 권은 거뜬히 써 낼만한 엄청난 주제들의 밀림을 그는 거침없이 헤쳐나간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 책 뒤표지

그의 책에 계속 따라다니는 한 교수의 '분석'처럼 그는 '인간'과 '체제'가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권력(그것이 거시든 미시든 간에)의 문제들에 대한 탐색을 끊임없이 거듭한다. 그는 적어도 '진보'를 사고할 줄 알고, '우리 안의 짐승'을 직시할 만한 용기와 예리함을 가졌으며, 자연과 우주 앞에 겸손할 수 있는 생태적 마인드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마리화나와 술·담배를 비교하며 '자유의 한계'를 논하는 마지막 글은 보기 드문 탁견이며 우리의 현실에서 상당한 대담성을 필요로 하는 발언이다. 단지 하나, 그가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일 순 있겠지만 '좌파'가 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 든 한 마디, '시장의 가격기구가 늘 최선은 아니지만, 그것은 적어도 합리성의 근처에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미래의 교육)라는 말이 주는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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