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푸르셰 지음, 김주경 옮김 / 비채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수용하고 치유해야 하는 정서적 상처 또는 영혼의 상처가 있다. 이는 대부분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기인하는데 세월이 가면서 만성화된 정서적 상처는 성인이 되어 파트너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마리아 푸르셰의 프랑스 소설 <불>은 소위 '불'같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등장한다. 첫인상은 매너리즘에 빠진 두 중년이 그저 육체적 욕망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서 받은 영향이 아직도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었다.


사회학과 교수인 로르는 현시대를 규정짓는 사회과학 심포지엄에 은행가 클레망을 발언자로 초청한다. 속이 다 비칠 듯한 투명한 피부에 가느다란 손목을 가진 클레망은 아름다우면서도 생기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첫눈에 빠져든 로르 그리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클레망 역시 로르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교수와 엄마 그리고 아내의 역할에 지쳐 다시 열정적인 연애에 뛰어들고픈 로르. 한편 어린 시절부터 은행의 임원이 된 지금까지 남성성을 강요 당하며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클레망. 둘은 각기 다른 욕구의 실현을 위해 서로를 갈구하고 있었다.


소설은 로르와 클레망의 시점을 오가며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풀어내고, 시시때때로 그들의 머릿속에 등장해 사회적 규범과 관습을 읊조리는 윗 세대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죽은 어머니가 들이대는 윤리적 잣대에 스스로를 둘로 분리하는 로르는 불길 밖의 로르가 불길 속의 로르에게 이야기를 전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한편 종교적 교리에 빠져 자신에게 냉혹한 어머니로 인해 무력감을 느끼며 자란 클레망은 꺼져 가는 불씨였다. 유일하게 마음을 준 반려견 '파파'와 함께 오직 일뿐인 일상에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길 같은 로르가 그의 작은 불씨를 다시 키워줄지 그리고 둘의 정서적 상처는 치유될지 기대하며 읽게 된다.


현대 프랑스 소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기욤 뮈소 외에는 자주 접하지 못했는데 오래간만에 진짜 프랑스 소설을 읽은 것 같다. 평소 선입관처럼 느끼던 프랑스인들 특유의 철학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언어유희 같기도 한 문장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속에는 프랑스뿐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공유할 수 있는 주제가 담겨 있다. 종종 찾아오는 무력감과 두려움 속에서 무엇이 됐든 각자 추구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놀랐고 내면의 목소리에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광란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1920년대, 일명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한 F. 스콧 피츠제럴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익숙한 그의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했던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정도지만 사실 알려지지 않은 소설들도 참 많다.


전성기 때 작품이 유명해지면서 덩달아 그의 일상까지 유명세를 치렀지만 그 시기는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여겼던 그는 말년에 이르러 어려운 생활 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다. 이 시대의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후기 작품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북큐레이션을 하고 번역한 F. 스콧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어느 작가의 오후>


1896년에 태어난 F. 스콧 피츠제럴드는 194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글을 썼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는 짧은 생을 살다간 피츠제럴드의 인생 후반기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을 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각 작품마다 직접 코멘트를 달고 피츠제럴드의 글이 자신의 작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언급하기도 한다.


피츠제럴드 에세이 3부작
망가지다 | 붙여놓다 | 취급주의


천생 글쟁이인 만큼 삶이 곧 글이 되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에는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아내 젤다는 정신병이 심해져 병원을 오가며 지냈고 홀로 아이를 양육하며 빚에 시달리던 그는 생계유지를 위해 상업적인 글을 쓰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과거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제 자신을 뛰어넘어 그의 작품을 비난하기도 하는 상황에 더욱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차분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삶을 정리하는 에세이 3부작은 하루키의 말처럼 두고두고 다시 읽고 싶어지는 글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고 얼마 전 읽었던 디 에센셜 F. 스콧 피츠제럴드를 다시 펼쳐보았다. 장편, 단편, 에세이, 편지글까지 겹치는 작품이 하나도 없어 두 권을 함께 곁에 두고 수시로 펼쳐보게 될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마음은 앞으로도 내게 큰 힘이 되어줄 것 같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 두고픈 가장 애정하는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 그런 그를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위대한 작가라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애정해왔다니 왠지 모를 반가움에 책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을 훔치는 자는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 일본 서점 대상 후보작이었던 후카미도리 노와키의 판타지 소설 <이 책을 훔치는 자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책을 훔치는 자는'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저주문의 앞구절로, 각 장의 제목이 이 구절과 합쳐져 하나의 저주문이 완성된다.


책으로 유명한 요무나가 마을 그 중심엔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으로 이뤄진 거대한 서고 '미쿠라관'이 있었다. 이곳은 과거엔 요무나가 주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찾은 적 있을만큼 마을의 명소였으나 이제는 폐쇄되어 오직 가족들만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미쿠라관을 세운 증조 할아버지 미쿠라 가이치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책 수집가이자 평론가였다. 집안 대대로 책을 사랑하고 '미쿠라관'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온 미쿠라네 가족. 이런 집안 내력을 거스르고 증조녀 미쿠라 미후유는 책을 싫어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평소 책을 좋아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미쿠라관'에도 출입을 꺼렸던 미후유는 어느 날 아빠의 교통사고로 하는 수 없이 서고를 맡고 있던 고모를 돕기 위해 미쿠라관으로 향한다. 가족 외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에서 '마시로'라는 의문의 소녀를 만나게 되고 두 소녀는 책 속 이야기 세계로 들어가 모험을 시작한다.


마치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이 판타지 소설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전철 밖을 흐르는 풍경, 사람들로 북적이는 꼬치구이 가게의 풍경 등 생생하고도 정겨운 묘사들은 마치 영화처럼 와닿았다.


초반에 등장하는 친숙한 한국인 캐릭터 '지훈'의 등장은 한국 독자들에게 친숙함을 더해주는데 이 또한 몰입의 작은 재미를 더해주었다. 특히나 어릴 적 경험으로 독서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주인공의 성장담은 성인층 뿐 아니라 어린이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소설로 가닿을 수 있는 포인트가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스릴러 소설 작가로 유명한 기시 유스케의 호러 기담집 《가을비 이야기》. 저자는 일본 설화문학의 진수로 꼽히는 에도시대의 고전 《우게쓰 이야기》 속 초자연적 이야기들을 모티브로 삼아 《가을비 이야기》를 집필했는데 제목이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작가가 쓸까 봐 출간하기까지 초조함이 들었다고 한다.


기담집 속 네 가지 단편의 공통된 주제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기꺼이 맞서는 인간의 숙명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따스한 봄비가 주는 낭만 대신 스산하고 음습한 가을비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고통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스릴러 소설은 얼마나 무서울지 조금 겁이 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책을 펼쳤다.


<아귀의 논>은 사랑에 굶주린 아귀 신세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슬프고도 비참한 그의 업보를 들려준다. 전생이 정말 있는 걸까 윤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푸가>는 실종된 작가 아오야마 레이메이가 남긴 원고를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편집자가 등장한다. 독백처럼 읊조리는 원고 속 화자의 이야기에 금세 몰입되어 빠져드는데 영화를 보는 듯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백조의 노래>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듯한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담긴 저주에 관한 이야기로 무섭기보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특히 클래식과 사운드에 대한 작가의 깊은 조예를 느낄 수 있었는데 한 편의 글을 위해 작가는 얼마나 치밀한 조사를 하는지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고쿠리상>은 동전을 이용해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로 오리지널이 아닌 일명 러시안룰렛 버전이라고도 하는 어둠 버전 이야기다. 누구 한 명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인듯하지만 반전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분신사바'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는데 어릴 적 무서워하면서도 친구들과 열심히 연필을 돌렸던 추억이 떠오른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기꺼이 맞서는 인간들의 이야기 <가을비 이야기>. 읽기 전엔 엄청 겁이 났는데 막상 펼쳐 보니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무섭지는 않았다.


심장을 저격하는 강렬한 서스펜스를 기대한다면 아쉬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기시 유스케의 팬이라면 읽어봄직하다. 스릴러 소설에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공포를 유발하기 위한 그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닌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의 작가 욘 포세. 낯선 이름이었지만 유럽권에서는 이미 극작가로 유명하다고 한다. 희곡과 소설, 시와 에세이, 아동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중인 그의 장편소설 <멜랑콜리아 1-2>. 제목에서부터 전해오는 짙은 음습함에 덩달아 차분해진다.


소설은 실존 인물인 19세기 노르웨이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일생을 담고 있다. 노르웨이의 외딴섬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라스는 지역 유지인 후원자를 만나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위대한 풍경화가가 되고자 떠난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는 같은 노르웨이 출신 화가 한스 구데가 교수로 있었다.


"나는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빛도 사라질 것이다."


스승과의 만남을 앞둔 어느 아침 라스는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혼잣말을 이어간다. 읽는 이에게 자칫 지루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반복되는 독백에 몰입하다 보면 마치 홀린 듯 덩달아 미쳐가는 건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멜랑콜리아 1에서 라스는 사랑하지만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헬레네, 자신을 무시하는 동료 화가들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자만과 자기 경멸 사이를 오간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그는 결국 정신병원으로 옮겨지고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며 매일 탈출을 꿈꾼다.


멜랑콜리아 2에서는 라스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를 시점으로 그의 누이 올리네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는 일도 힘겨울 만큼 치매로 고통받고 있다. 조금 전의 일은 기억조차 할 수 없지만 흐릿한 기억력을 더듬어 라스와의 지난 추억을 되새기려 애쓴다.


19세기를 살다간 노르웨이 풍경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작품은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비로소 재조명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을 통해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라스와 치매로 고통받던 누이 올리네. 육체는 꽃이 시들듯 점점 약해지는 와중에도 내면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멜랑콜리아 1-2> 속 두 화자를 통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의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관찰자가 되어 바라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변화무쌍한 인간 내면의 한 단면을 보여주려 했던 걸까. 주인공들의 외롭고 그늘진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