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릴러 소설 작가로 유명한 기시 유스케의 호러 기담집 《가을비 이야기》. 저자는 일본 설화문학의 진수로 꼽히는 에도시대의 고전 《우게쓰 이야기》 속 초자연적 이야기들을 모티브로 삼아 《가을비 이야기》를 집필했는데 제목이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작가가 쓸까 봐 출간하기까지 초조함이 들었다고 한다.기담집 속 네 가지 단편의 공통된 주제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기꺼이 맞서는 인간의 숙명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따스한 봄비가 주는 낭만 대신 스산하고 음습한 가을비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고통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스릴러 소설은 얼마나 무서울지 조금 겁이 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책을 펼쳤다.<아귀의 논>은 사랑에 굶주린 아귀 신세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슬프고도 비참한 그의 업보를 들려준다. 전생이 정말 있는 걸까 윤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푸가>는 실종된 작가 아오야마 레이메이가 남긴 원고를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편집자가 등장한다. 독백처럼 읊조리는 원고 속 화자의 이야기에 금세 몰입되어 빠져드는데 영화를 보는 듯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온다.<백조의 노래>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듯한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담긴 저주에 관한 이야기로 무섭기보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특히 클래식과 사운드에 대한 작가의 깊은 조예를 느낄 수 있었는데 한 편의 글을 위해 작가는 얼마나 치밀한 조사를 하는지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고쿠리상>은 동전을 이용해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로 오리지널이 아닌 일명 러시안룰렛 버전이라고도 하는 어둠 버전 이야기다. 누구 한 명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인듯하지만 반전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분신사바'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는데 어릴 적 무서워하면서도 친구들과 열심히 연필을 돌렸던 추억이 떠오른다.인간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기꺼이 맞서는 인간들의 이야기 <가을비 이야기>. 읽기 전엔 엄청 겁이 났는데 막상 펼쳐 보니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무섭지는 않았다.심장을 저격하는 강렬한 서스펜스를 기대한다면 아쉬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기시 유스케의 팬이라면 읽어봄직하다. 스릴러 소설에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공포를 유발하기 위한 그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닌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