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 하더라도 히틀러는 잇따른 선거에서 독일 유권자 3분의 1의지지를 얻은 것이 고작이었다. 히틀러를 찍지 않은 유권자의 3분의 1은좌파 지지자였다. 좌파는 내부 갈등을 겪기는 했어도 요지부동이었다.나머지 3분의 1은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주저했고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않았다. 1권이 끝나 갈 무렵 우리는 히틀러가 절대 권력을 굳히는 것을보았다. 내부의 반대파는 괴멸되었다. 선뜻 마음을 주지 않던 유권자들도 국내에서 대대적으로 재건 사업이 이루어지고 밖으로도 힘을 과시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모와 치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자히틀러 쪽으로 돌아섰다.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권위주의를 축복으로받아들였다.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걷는 사람들, 소수 인종, 사회 부적응 집단을 억누르는 것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조그만 희생처럼 보였다. 히틀러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저항 세력이 나날이 위축되어 유명무실해지자 군부, 대지주 귀족 세력, 기업가, 고위 공직자 같은 엘리트 집단은 체제에 힘을 실어주었다.
1 2권 합쳐 1900여쪽 게다가 각주 200여쪽 많은 사건과 인물 조악한 법까지 이 책으로 대학 서양사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면 아마 중간 기말고사는 독후감으로 대체해야 할 듯.
이런 거칠지만 강력한 이상을 품고 나치당에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다. 둘은 함께 갔고, 강력하고 단합된 신생 국가라는 동일한 유토피아의 일부분이었다. 1930년에 경제 위기가 깊어지면서 나치당에 표를 던졌거나 나치당에 들어온사람 중에는 히틀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으로관심을 기울이게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나치당 쪽으로 기운 사람들이었다. 나치당은 우익 진영 안에서 다른 경쟁 단체들과 이념적으로 차별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와 반(反)마르크스주의는농도는 다를지언정 좌파를 제외하고는 모든 정파가 공유한 정서였다.반유대주의는 나치당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운동이 남달라 보였다면 그것은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고 역동적이고 활력에 넘치는 젊은조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보기에 나치당은 현재와 완전히 결별했으면서도 그 옛날 튜턴 기사단의 진정한 가치를 간직한 앞날의 새로운 독일‘을 상징했다. 그들은 독일을 착취하는 세력과 한판승부를 벌이고 싶었던 꿈과 독일의 부활을 염원하는 마음을 히틀러에다실었다. "진정한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독일의 구원자를 진실로 소망하고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를 신뢰를 가득 담고 우러러본다." 고 이 무렵 새로 나치당에 들어온 또 다른 사람도 고백했다.
나중에 오래 전부터 히틀러에게 순종하고 아첨해 온 ‘히틀러 신도 루돌프해스에게 지도자 숭배는 단순히 운동에 도움을 주는 기능적 가치가 아니라 깊은 믿음의 문제, 아니 정신적으로 꼭 필요한 요소였다.외무부에서 리벤트로프의 오른팔 노릇을 하는 발터 헤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스는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이미 강조한 "아래로는 무조건적 권의, 위로는 무조건적 책임" 이라는 지도자의 원칙‘을 상기시켰다.그리고 그것을 ‘게르만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원칙 아래하나로 뭉치는 강한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위대한 민중 지도자를 위대한 종교 창시자에 빗댔다. 그런 지도자가 할 일은 학자처럼 장점과 단점을 저울질하고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