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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평점 :
사원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사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울 뿐이며,
그 이하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 본문 중, 인도 나시크지역 칼라람사원 집회에서 바바사헤브 연설 -
불가촉천민, 이 아이러니를 구체적으로 사진과 함께 접한 것이 내셔날지오그라픽 한국어판에서 다룬 이들의 특집 기사였는데, 아직도, 그 사진의 눈망울을 생각한다. 전혀 상관없지는 않겠으나 그 기사와 함께 떠오르는 영화 역시 “블러드 다이아몬드”이다. 그냥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개의 각각의 이미지들을 불가촉천민이란 단어와 함께 떠올리는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라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 그냥.. 그렇다는 것 외에는...
“신도버린사람들, 불가촉천민”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카스트제도의 그늘아래, 인도의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들 중에 한명이 되어 있는 나렌드라 자바브의 가족 연대기이다. 아버지 다모라르 룬자지 자다브의 일생을 아버지 “다무”(집에서는 “다다”라는 애칭), 어버니 “소누”(바이라는 애칭)의 번갈아 가며 구술하는 양식으로, 아버지의 삶을 통해 한 가족이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고립과 박해 속에서 동등한 권리와 행복을 찾아가는 소설보다 재미있는 논픽션이다. 사랑과 유머로 똘똘 뭉친, 세상을 바로 알고, 이 죽어가는 화초 같은 세상에 건강한 물을 뿌릴 줄 아는 한 가족의 아주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한 가족의 연대기속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통상적으로 말한다면, 바바사 헤브라고 애칭으로 불리며, 지은이보다도 더 일찍, 더 인지도가 높은 학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전역의 불가촉천민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3500년 이상 굳어져 있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내부의 이해와 화해를 통해 개혁하고자 했으나, 결국 1956년 그를 따르는 50만명과 함께 불교로 개종한 암베드카르 박사 말이다.
아버지 다무는 두 개의 기회를 갖는다. 하나는 몸바이에서 신문을 팔다가, 우연히 만난 영국인을 통해서 평등과 사회성을 배운다. 이 첫 번째 기회는 평생 어떤 직업을 갖게되더라도,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인정받는 곧은 처세술의 근간이 된다. 나머지 하나 기회가 바로 암베드카르 박사의 정신을 배우고, 그를 따르며 평생 그의 추종자로서 삶을 가꾸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무와 같은 기회를 접했을 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사람들은, 이 기회라는 것의 파편, 아주 작은 부스러기 하나도 취할 기회조차 없었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인도는 드러내놓거나, 감추어 놓고, 이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만 있다면, 같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석가모니의 평등사회, 14세기 이후 바티크운동, 1873년 지요티바 플레의 비브라만계급을 위한 학교설립, 그리고 1950년 1월 26일 불가촉천민의 폐지를 선언하는 인도 헌법이 발효로 비로소 법적으로야, 이 사람들이 땅을 더럽힐 수 있는 침을 받아내는 목에 맨 오지그릇,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한 엉덩이에 단 빗자루를 떨쳐 낼 수 있다지만, 과연 몇 천년을 유지해온 4개의 카스트와 3000여개의 아웃카스트제도로 굳어 있는 인도인의 관습 속에는?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T 강국으로 불리우고 있는 나라들, 시민개혁과 평등과 행복이라는 이 21세기에 도처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악습과 폭력과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진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사람이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이렇게 불가능한 일인지, 지니고 있는 탐욕의 10분의 일, 아니 몇백분의 일만 덜어내도, 몇 배의 공동행복을 가져 올 수 있을 수 있는 데도, 결코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사악해야 하는 가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의 울렁거림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이런 신분제도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옛이야기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구호 안에서 점차 더 간격이 벌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말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권력과 힘과 경제를 움켜지고 있는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찬물을 끼얹어도 되고, 몇 사람 정도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는 “죽어 나가도” 되고, 힘없는 것들은 그들을 감싸고, 변호해 줄 소위 “상급단체”와의 연계도 불법이 되고, 탄압의 이유가 된다고 선언하고, 자신들의 다소의 불편함도, 손실(아니 약간의 실현이익의 감소라는 표현이 더 적정하겠다만)도 용납할 수 없는 부류가 점점 더 조직의 힘과 동의을 얻는다면, 지금 내가 막 읽기를 끝 낸 책보다 더 몸서리 쳐지는 카스트 제도가 도처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책 한권의 독후감 속에 갑자기 흥분하는 것은 염치가 없으므로, 매우 경쾌한 한 가족이, 합병과 사기, 전략을 세우지도 않고, 오직 정직과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책 한권을 통해 그저 호흡한번 크게 가지면 될 일이다.
“다무”의 생각들을 옮겨 놓은 것은, 그가 소위 학력과 관계없이 얼마나 올곧은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아 온 막내아들인 저자에게 묻는다.“그걸로 보통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해도 길거리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면 전부 낭비일 뿐이다.”그에게는 박사학위는 운전면허증과 같은 것이다.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명예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명예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인증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례, 큰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온 동네의 축복을 받으며 임지로 떠나는 그 경사에 취해, 다무가 다니고 있는 철도 크러스트의 사장은 이 경이로운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그에게 정년연장의 기회를 준다. 다무는 그 연장의 기회를 같이 일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옮겨 줄 것을 요청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자기는 자식들이 다 자랐으며, 일용할 양식이 있으며, 지금 동료 중에는 아직도 자식을 교육시키거나, 생계를 꾸려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의식과 실천을 하는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에서 나와야 하는 지, 좀 더 많은 학식과 명예와 부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면 안되는 것인지? 지난 세기말부터 불기 시작한 세계화의 모진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며, 50여년 전에 외친 “교육하고, 단합하고, 궐기하라”라는 실천 구호외에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제 이 역사의 교훈 앞에서 힘 있는 자들이 먼저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힐 수는 결코 없는 것일까? 없겠지? 그러니, 바바사 헤브 아마르 라헤(바바사 헤브여 영원하라)!라고 외칠 수 밖에 없겠지. 그 날, 승리의 그 날까지 말이다.